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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 희 (희곡작가) - 희곡 . 개성있는 인물에 시선을

monomomo 2008. 6. 19. 09:12
희곡 . 개성있는 인물에 시선을





이 만 희 (희곡작가)



저는 데뷔 이래 3, 4년 전까지 계속해서 연극의 대본인 희곡을 써왔습니다. 그 후로는 TV 드라마를 집필한 적도 있고 시나리오 집필에도 참여한 바 있습니다. 그 여파로 지금은 연극계로부터는 변절자(?)가 되었습니다. 변명 아닌 변명이지만, 지금은 저의 작가 생활 중 최초로 뮤지컬 대본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극문학 하면 희곡과 TV 드라마, 시나리오, 요즘은 애니메이션 장르까지 통틀어서 말합니다. 저는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 몸담고 있으면서 인물에 대해서만도 한 학기 동안 강의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문학이 시, 소설 위주로 꾸며져 있었는데 앞으로는 영상의 시대를 외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그 뿌리에 희곡이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영상시대라는 것을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서 평가할 때는 바람직한 면과 함께 부정적인 면도 많이 갖고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선 독자층의 상상력이 좀 저하될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영상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즉각적이고 즉물적인 반응이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독자들이 생각하고 즐기면서 여유를 가지고 스스로 완성하는 패턴이 점차 약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면이 우려됩니다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도도하게 흐르는 물결이니까, 영상시대는 앞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진행될 것입니다.




저는 희곡에 대한 정의를 내림에 있어 일단 '모순의 문학'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음악 등 모든 예술 장르를 통틀어 봤을 때, 음악이나 미술 쪽을 보면 주로 상징적인 작업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음악 작곡을 한다고 했을 때, 비애 쪽의 톤을 지니면 대략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은 그렇지가 않고 구체성을 띠는 것입니다. 문학 중에서도 시나 수필은 그런 게 훨씬 약화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소설과 희곡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얘기를 합니다. 즉 어떤 슬픔이며, 그 슬픔의 파장은 어디까지였고, 그 슬픔은 인간에게 어떤 결말을 냈는가 하는 구체적인 것을 얘기합니다.

까다로운 관객이 곧 좋은 비평가 쉽게 말하면 화가 중에서는 산만 계속 그린다 해도 대가(大家)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체성을 띤 문학인 소설이나 희곡은 상징적인 것만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헤어졌으며 그 슬픔은 얼마나 컸고 인생을 얼마만큼 바꾸어 놓았는가. 그랬을 때 소설과 희곡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가 하면, 똑같이 웅장한 얘기입니다. 웅장한 얘기지만 소설은 첫째 독자가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독자가 상상을 해 나가고 글을 읽어 가면서 결론을 자기가 완성시킨다는 얘기입니다. 극문학 쪽은 다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소설의 독자가 독자 스스로 마지막에 집을 짓는다고 하면, 극문학의 작가는 집을 다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관객은 비판 내지는 평가를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독자층은 굉장히 양질입니다. 호의적이 독자층일 수 있고 극문학 쪽의 관객들은 굉장히 비판적이고 까다로운 관객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소설이 자기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충분히 서술로 설명할 수 있다면, 똑같이 웅장한 얘기를 써 나감에도 불구하고 극문학의 작가들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달리는 사건 속의 대사를 통해 자기가 의도하는 바를 간간이 내비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희곡 대본이라는 것은 TV 드라마나 시나리오보다도 훨씬 제약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여자가 당했다고 하면 카메라로 당한 느낌, 비오는 날 그 사람의 신발이 떠내려갔다는 것을 카메라의 기법으로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만 희곡이라는 것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희곡은 모순의 문학입니다. 그 모순의 실체는 이렇습니다. 우선 웅장한 얘기를 하라고 하면서 웅장한 얘기를 작가가 시시콜콜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차단된 제약의 문학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사람들이 글을 쓸 때 일기에서부터 출발해서 편지로 발전하고 수필이 되어서 시도 쓰고 소설도 쓰다가 마지막 장르로 희곡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가 희곡작가니까 폼잡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제가 대학을 다닐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듣던 얘기입니다.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그만큼 쓰기가 까다롭다는 것입니다. 독자나 관객도 훨씬 까다롭습니다. 독자의 컨디션을 들여다볼까요. 소설을 읽을 때 컨디션이 좋으면 읽게 되고 졸리면 덮습니다. 그러나 극문학의 관객은 일정 시간 안에서 몰입을 시켜야 되고 작가가 의도하는 바로 이리저리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조건 자체가 불리하다는 것입니다. 불리한 걸로 말하면 TV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연극이나 영화는 돈을 주고 즐기러 온 관객입니다만 TV 드라마는 자기 마음대로 채널을 바꾸어버리기 때문에, 첫 신(scene)을 아이스스틱으로 눈알을 후벼 팔 듯이 그 정도의 충격을 주라고 얘기합니다. 그만큼 관객을 잡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곡 자체가 지니는 것은 굉장히 모순이리는 것입니다. 모순이나 제약 자체가 어떻게 하다 보면 사랑도 되고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쪽으로 발전되기도 해서, 지금까지 희곡을 써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의 제1요소로 플롯(plot, 구성)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제2요소로 인물(character)을 들었습니다. 연극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드라마인데, 드라마라는 것은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떼아뜨르(theatre)'는 본다는 뜻입니다. '어떤 배우가 행동하는 걸 보는 것'으로 연극을 규정지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인물이 나와서 행동하는 걸 본다는 것으로 극문학의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좀 잘못되지 않았는가 하는 반론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꾸어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옛날에는 플롯 하면 기승전결(起承轉結)이었지만 요즘은 기승전결로 끝나는 작품이나 드라마는 별로 없습니다. 클라이맥스에서 그냥 끝내 버리곤 합니다. 클라이 맥스를 넘기고도 더 길게 인생을 얘기하는 걸 이제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아마 조금 더 지나면 발단과 클라이맥스만 있는 투톱 시스템으로도 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보면 클라이맥스에서 시작해서 클라이맥스로 끝나는 그런 드라마도 예상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완전한 경쟁체제이고 저 같은 경우에도 제가 집필한 두세 작품이 실패한다면 누가 저한테 작품 집필을 부탁하겠습니까. 결국 저희들은 즉각적인 답을 요구하는 관객들과 더불어 싸움을 펼칠 때, 선의의 관객이 아니기 때문에 평가를 받고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관객들이 점점 아우성을 치면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하기 위해서 클라이맥스에서 시작해서 클라이맥스로 갈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요즘의 관객은 너무나도 스피디한 걸 원하니까 그렇게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에 와서는 인물을 제1요소로 보고, 플롯을 제2요소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물이 걸리지 않고서는 사건은 필요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문학 얘기를 주로 연애 얘기로 생각을 하면 틀리는 말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아주 매력없는 친구가 저를 찾아와서 두 시간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고 합시다. 저는 그 친구가 아주 웃기게 말했다고 해도, 그저 지겨울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물 자체가 저한테 매력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제 앞에 와서 졸아도 좋습니다. 일을 안하고 코를 풀어도 좋습니다. 게다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한 마디 하면 저는 깜박 가버릴지도 모릅니다. 인물 자체가 매력을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얘기를 하든, 어떤 종류의 위험에 처하든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승전결의 '기(起)'에 해당하는 '도입부에서 관객에게 인물을 어필시켜라.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다'라고들 말합니다. 우리 나라 대학로 연극에서 과연 그런 인물의 깊이에 천착한 분들이 많은가 하면 저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인물의 깊이에 천착해서 글을 썼을 때 그것이 다 수용되기보다는 상당히 비판적인 얘기를 들을 때도 많습니다. 앞으로는 인물 위주의 작품이 드라마의 꽃으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연극을 도입하면서 서구 연극을 받아들였는데 우리한테는 새로운 양식과 스타일이 필요했습니다. 1900년대는 끊임없는 스타일의 양산시대였습니다. 우리 나라 현재 연출가 중에 스타일리스트가 많고 평론가들도 스타일리스트가 많습니다. 이 작품을 어떤 형식에 담았는가 하는 쪽이 많은데, 그 형식을 따지면 인물은 상당히 반감된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인물 자체에 사건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글을 쓴다고 하면 아마 모종의 구상을 할 겁니다. 다음에는 그 사건에 맞는 인물을 넣을 것입니다.



인물을 먼저 정하고 시작한다




그런데 저는 제 작품의 반 이상에서 인물을 먼저 정했습니다. '이 캐릭터를 가지고 어떤 사건을 넣으면 재미가 있을까.' 생각하는 식입니다. 제 작품 중의 {불 좀 꺼주세요}와 같은 경우 인물이 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여섯 명의 배우를 모아놓고 제가 당신들을 위해 글을 쓰겠습니다. 어떤 배우는 경상도 말 외에는 하지 못해서 그 배우는 경상도 사투리를 썼습니다. 저는 인물 위주로 썼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심한 편입니다. 인물이 어떤 사건을 주는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고시생이 10년 동안 공부를 해서 고시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 고시 합격 방을 보는 순간 공중전화 박스 앞으로 뛰어갑니다. 전화기를 잡고 번호를 누르는데, 순간 이 친구가 다시 수화기를 힘없이 내립니다. 그리고 나서는 고개를 푹 숙입니다. 알고보니 이 친구는 고아입니다. 굉장히 기뻤던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주고 싶었는데, 이 똑같은 기쁨을 같이 누려줄 대상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수화기를 내려놓습니다. 만약 이런 신을 배우가 기가 막히게 연기해 내었다면, 아마 이것은 어떤 사건 못지 않게, 다리가 절단된 것 못지 않게 우리한테 아픔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기쁜 일을 겪었을 때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싶은데 똑같은 기쁨을 느껴줄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나 했던 체험을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어떤 영화에서 백혈병으로 곧 죽어야만 할 꼬마를 둔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계속해서 깔깔거리며 아이와 노는 걸 보면 의문이 갑니다. 그러다가 카메라가 창문 쪽에서 혼자 있는 어머니를 비춥니다. 그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고 있는데, 눈물을 엄청 흘리면서 뜨개질을 하고 있을 때 그 인물 자체에서 엄청난 사건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인물은 관객에게, 얼마나 슬펐으면 혼자 있을 때 저렇게 울어야 되고, 열흘 있으면 그 비극적인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조차 우리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웃었던 장면까지도 아픔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인물이 관객한테 걸리면, 그 어머니가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고 해도 다 용서해 줍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면 저렇게 할까, 남편이 야단을 치면, '남편이 속이 좁다, 저 사람이 얼마나 힘든 사람인데…' 하면서 관객은 이미 그 사람 편으로 다 몰입이 되어 있습니다. 그걸 인물이 걸린다고 합니다.
작가로서는 도입부에 관객한테 인물을 어떻게 걸리게 만드느냐가 승패의 조건입니다. 만약 제가 복수장면의 영화를 그리려 한다면, 도입부에 들어갈 것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의 부모가 얼마만큼 처절하게 당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잉잉 우는 꼬마녀석한테 클로즈업을 시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 꼬마에 의해서,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무자비한 복수가 크면 클수록 관객은 자기 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사건 자체에 엄청난 힘이 있을 것 같은데, 사실은 인물 자체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우리의 관점 자체를 바꾸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매력 있는 인물을 드라마에 투입을 시켜야 됩니다. 영화나 연극이나 캐스팅이 작품의 80%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작품에 한석규가 나오느냐 무명배우가 나오느냐는 설득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지닙니다. 그것은 이미 한석규라는 친숙도에 의해서 관객들이 플러스 알파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서 난리를 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배우가 나오면 작품에 도움이 되고 관객을 걸리게 하는 데 훨씬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캐스팅이 실패로 끝나면 아무리 잘 만들고 열심히 해도 원했던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캐스팅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가' 하고 땅을 칠 때가 많습니다.




희곡이라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드라마는 좋지 않은 관객들을 향해서 인물을 걸도록 하면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가는데, 소설과는 달리 굉장히 스피디하고 놀라움도 줘야 되고 긴장감도 주면서 끌고 나갑니다. '드라마는 곧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건이 좋지 않은 관객들을 대상으로 해서 자기에게 몰입시켜야 하기 때문에 느슨한 구조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첫째, 매력있는 인물이 들어와서 그 사람이 아주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혹은 비극적인 얘기를 하면서 관객을 쉴 틈 없이 몰입시켜서 클라이맥스에 올려놓은 다음 작품을 끝내야 되는데 어떤 인물이 효과적이겠는가라는 얘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모래시계 같은 경우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인물은 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모범생이었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 사회의 엘리트이고, 하나는 양아치에 부랑아인, 나중에는 조직에 몸을 담은 이 두 친구의 우정과 배신을 그린다고 하면 일단은 인물이나 성격이 뚜렷해서 끌고 가는 스토리 라인 자체가 강렬할 것 아닙니까. 이렇듯 대비적인 인물을 가지고 효과를 거두는 드라마도 있을 수 있고 또 하나는 아주 작은 걸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마추어 작가들한테 작품을 써보라고 하면 큰 것만 가지고 씁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그리라고 하면 5백만의 유태인의 죽음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런데 5백만의 유태인의 죽음을 다루면 재미가 있겠습니까. 즐비한 시체뿐이겠지요. 똑같은 인물을 가지고도 다루면 재미있을 수가 있지요. 대비되는 인물이 매력이 된다면, 똑같은 인물은 어떨까요. 둘이 친하고 1, 2 등을 다투면서 모범생이고 둘 다 서울대학에 합격해서 놀러 간다고 하면, 놀러 가면서부터 아주 작은 걸로 꼬이기 시작할 겁니다. 내가 라면을 3번 끓일 때 저는 한번만 끓이고, 내 세숫수건에 저는 발을 닦아? 양말을 벗어서 머리맡에 놓는 거야 고린내 나게, 내 세숫비누라고 해서 물에 불려 못쓰게 만들어도 좋아?

이러면서 하다보면 3박 4일로 놀러갔다가 올라올 때에는 원수가 되고 맙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사건을 놓고, 그렇게 친했던 친구가 밥을 씹는 것만 봐도 '저렇게 악착같이 처먹어야 사는 거야?' 하고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게 됩니다.
나중에는 자기 자신이 굉장히 쩨쩨하고 이기적인 걸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대비되는 인물을 택할 것인가, 같은 인물을 택할 것인가를 글쓰기 전에 정해야 됩니다. 저는 인물에 대해서 몇 가지의 법칙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물에는 향리의 법칙이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인물은 관객에게 어떤 식으로든 매력적인 인물이어야 되겠다는 얘기입니다. 그 매력은 작가의 몫입니다. 또 하나는 비틀즈의 법칙이 있습니다. 인물을 비틀어서 생각을 해보자는 얘기입니다. 제 작품 중에 {돌아서 떠나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깡패 두목과 여의사와의 사랑얘기입니다. 제가 시나리오를 써서 [약속]이라는 영화로 발표를 했습니다. 그 {돌아서 떠나라}의 첫날 공연은 연극계 관계자들을 모셔서 리허설 비슷하게 열렸는데, 그 작품이 끝나고 나서 여기저기서 저를 씹는 얘기들이 나왔습니다. 평론가들의 얘기는 "야, 어떻게 되어서 깡패 두목은 여성적인 말씨에 행동도 여성적으로 하고 여의사는, 완전히 왈가닥으로 설정하여 말도 거칠고 함부로 행동하느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할 말이 없어서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연극배우인 윤석화씨가 제 편이 되어서 "아, 선생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깡패 두목 중에는 얌전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진짜예요" 하면서 열을 내는 겁니다. 저는 속으로 고맙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글을 쓰게 된 동기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유형적인 인물과는 과감하게 결별하라




탤런트 오지명 씨가 제게 TV 드라마 집필 기회를 마련해 주려고 공을 들인 적이 있었습니다. 깡패들의 얘기를 한번 써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좋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가까이 지내고 있는 보스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첫인상이 해맑았습니다. 그분 얘기 중에 30대 초반에 세 명을 죽였는데, 경찰에 잡혀서 형사한테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니까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만나러 어떤 재즈바에 갔는데, 그 여자는 바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치는 피아니스트였다고 합니다. 그 여자한테 "사랑한다.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하고 나쁜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하다"고 말하고서 교도소로 갔습니다. 7, 8년 뒤에 이 남자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이 60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 여자를 기다리면서 싱글로 있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데 제가 감동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때 그 인물이 떠올랐기 때문에, 저는 {돌아서서 떠나라}를 썼던 것입니다. 우리의 선입견을 깨고 시적이고 꽃을 든 남자 같은 보스와 왈가닥 여의사의 인물을 살짝 비틀어 보니까 재미있더군요.
그걸 쓰다보면 첫 번째 떠오르는 것은 유형적인 인물입니다. 예를 들어 선생은 이러하고 공무원은 이러하고 따위의 대략 직업에 따라 성격 위주로 고정된 캐릭터가 있습니다. 유형적 인물은 어떻게 보면 매력이 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형적 인물이 싫어서 다 괴상한 성격만 갖다 놓으면 종합 정신병원이 됩니다. 그건 너무나 독특하니까 작가의 치기가 앞서고 관객이 쫓아오기가 힘이 듭니다. 대략 이럴 때 방법은 주인공 정도는 유형적인 인물에다 개성적인 성격을 불어넣어 인물의 비틀기를 좀 시도하고, 나머지 주연이나 조연이 아닌 인물들은 가급적이면 유형화시키는 게 관극을 하는 데 좋습니다. 인물에서 성공하는 영화들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의 {공동경비구역(JSA)} 같은 경우에도 이병헌과 송강호의 캐릭터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북한 하면 아주 딱딱하고 매력없이 봤는데, 충분히 가능한 얘기지요. 이병헌과는 다른, 이병헌의 졸병을 보면 엘리트이고 송강호의 졸병을 보면 무지막지하게 자기의 원칙 그대로 인물 대비에 있어 네 명이 묘하고 다르게 대치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만약 북한 애들이 좀더 자유로웠고, 남한 애들이 일에 얽매이면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아마 그렇게 제작되었다면 어떤 시빗거리가 들어올지 모르니까 그렇게 제작된 것 같습니다. 그런 인물 정도면 얘기가 스무스하게 풀려가고 매력적이고 좋다는 것입니다. 인물에서 성공한 극문학이 굉장히 많습니다. 얼마 전에 공연된 {에쿠우스}도 인물이 성공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물이 말의 눈알을 뽑았다고 하니까 금상첨화지요.




인물은 드라마에 있어서 반드시 변화해야 합니다. 어떤 네 명의 전남 벌교 양아치들이 초등 학교 앞에서 초등 학생들을 대상으로 칼을 들이대고 돈을 빼앗았다면, 애들이 5년 뒤에 목포로 거점을 바꾸어 좀 잘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내는 해결사 같은 것을 칼을 들이대고 데뷔를 했습니다. 그 다음 10년 뒤에 서울의 노른자위를 다 장악하는 페밀리로 컸습니다. 이런 것을 영화를 그린다고 했을 때 이 영화는 인물이 확확 변하는 것입니다. 말투 같은 경우와 의상도 다 달라지겠지요. 그러다가 감옥소에 잡혀가고 나왔을 때는 빈털터리다. 인물 변화가 스피디함을 엄청나게 다르게 하는 겁니다. 인물이 사건마다 꺾여져야 재미가 있는 것이지요. 사건이 변한다는 것은 인물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물이 변한다는 것은 상황이 변한다는 얘기입니다. 사건은 변하는데 인물은 똑같다면 그 영화는 잘된 게 아닙니다. 내가 한석규 같은 탑스타일 때 대본을 택한다고 하면 인물 변화가 확실해야 연기자인 내가 확확 변할 것이고, 그래야 인기가 있고 점수를 받을 것 아닙니까. 당연히 그걸 택할 수밖에 없지요. 인물이 변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말투도 변하고 의상도 변하고 다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드라마를 쓸 때나 볼 때 변화의 법칙을 염두에 둔다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계단의 법칙입니다. 인물이 어지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면 절대로 푸대접받는 일이 없습니다. 전진만이 있는 것을 가리켜 계단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연극배우로 제가 아주 좋아하는 선배인데 40이 넘도록 결혼을 못했습니다. 한번은 타워호텔 커피숍에서 선을 봤습니다. 그날 저한테 와서 폼을 잡는데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형은 깨지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은 돈이 없거든요. 길거리에서 시작을 해야 했거든요. 라면 먹다가 지나면 떡라면을 먹고 다음은 짬뽕 삼선짬뽕, 진짜 결혼하기 전날 탕수육 결혼한 다음에는 안 먹어도 되지요. 계단을 만들어서 여기까지 쏠 수 있는 돈을 만들었어야 되는데 맨 처음에 잘 보이겠다고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돈을 꾸는 것도 한도가 있지, 누가 가난한 연극배우한테 돈을 꿔주겠습니까. 그냥 끝나고 말았습니다. 드라마가 그렇습니다. 처음에 요만한 인물로 시작했다가 인물이 계속 매력을 주면서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최고의 인물을 보여주고 끝을 내야 되는데, 처음의 인물은 매력있다가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오면 관객은 놓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인물은 계속 상승해야 합니다. 희곡이 어려운 것은 첫 도입이 되면 인물을 매력있게 걸어야 하고 이 인물은 계속 매력적으로 올라가야 됩니다. 스토리 라인도 계속 흥미있게 올라가야 하고, 이걸 그야말로 동시에 보여줘야 합니다.
한가하게 "이 사람은 이만흰데 전과 삼범으로서 나쁜 놈입니다." 한가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주 분주한 경찰서, 지나가던 간부가 담당형사에게 "누구야!?" "이만희라는 놈인데 악질이에요.' 식으로 긴박하게 넘어가야 됩니다. 상황이 계속 상승되면서 그 상황에 맞춰서 대사는 바빠지게 마련입니다. 상황 설명하랴, 흥미 있으랴, 인물을 매력있게 하랴…. 도와줄 데는 하나도 없는데 끝까

지 가야 되니, 드라머는 복잡해지게 됩니다.




또 하나 기둥의 법칙이 있습니다. 공모전에 투고된 시니라오나 희곡 같은 걸 보면 대부분 곁가지가 유난히 많습니다. 웃기는 것도 주인공의 상황에 따라서 그 한도 내에서 웃게 되는데, 웃기고 재미나는 걸 넣기 위해서 시나리오의 경우 대여섯 신을 무리하게 넣은 걸 보기도 합니다. 이런 건 실패입니다. 일단 주인공이 중심에 서서, 그 범주 안에서 주인공이 웃게 되는데, 곁가지가 너무 심해 스토리 라인을 흐릴 때가 많습니다. 코미디 영역을 계속 확장시켜가다 보니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만약 앞으로 극문학을 쓰시고자 한다면 가지치기를 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법주사 가는 길의 정일품송처럼 우람한 기둥을 중심으로 가지가 알맞게 있어야지, 부실한 기둥에 가지만 지나치게 무성한 소나무 같은 작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법칙에 의해서 비틀어 보고, 향기를 주고, 인물은 매력적으로 상승시켜야 되며, 기둥의 법칙을 지키면서 변화시켜 간다면, 그것이 곧 인물이 말하는 법칙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즉 반드시 따라 나오게 마련인 '대사'입니다. 그런데 흔히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를 가리켜 가끔 "대사를 문학적으로 잘 쓴다"는 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어떻게 하면 대사를 잘 쓸 수 있습니까. 대사 공부 따로 합니까?" 하고 묻는 이들도 있습니다.
희곡 대사는 조금 까다롭습니다. 예를 들어 은희경 씨의 소설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깨어진 사랑은 화려한 비탄이라도 남지만, 이루어진 사랑은 남루한 일상뿐이더라.' 참 맞는 말입니다. 그 문장을 읽으면서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희곡에서 이런 문장을 쓰면 되느냐 하면, 안 됩니다. 희곡 언어는 따로 있습니다. 대학로의 '이랑씨어터' 소극장에서 제 작품 {용띠 위의 개띠}가 공연되고 있는데, 저로서는 굉장히 잘 썼다고 자부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 문장은 "아프나?""아프다.", "얼마나?""번쩍번쩍.", "수박이 찬데 묵을까?""싫다.", "맥주가 시원테이.""싫다." 이렇게 딱 네 마디인데, 이게 굉장히 시적(詩的)으로 잘 쓴 문장입니다. 내기를 좋아하는 부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자기네 재산을 총투자해서 아파트 딱지를 샀는데 사기를 당했어요. 괴로우니까 여자가 자꾸만 채근질을 해서 내기를 하자고 합니다. 63빌딩의 전기세가 한 달에 얼마나 나올까? 맞추기 내기를 하자고 하면서 슬픔을 딛고 일어나려고 합니다.
남자에게 드디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있다." "뭔데?""니 시집올 때 처녀로 왔나, 처녀가 아닌 채로 왔나?" 그러니까 얻어맞는 겁니다. 잠시 사이가 있는 다음에 이어지는 게 위의 대사입니다. 이 대사를 왜 잘 썼다고 자부하는가 하면, 우선 잘 못 쓰는 작가의 경우를 상정해 봅시다. "야 임마, 너 아무리 내기를 해도 그렇지. 내가 처녀로 왔냐 처녀가 아닌 채로 왔냐 했는데, 처녀가 아니라면 어쩔거야?" 따위로 따지면서 "때린 건 미안하다. 미안한데 너 무했잖아." 하는 식으로 설명적으로 가겠죠. 그런데 "아프나?" 대목에서는 자존심이 팽팽하죠. "얼마나?" 대목에서는 조금 긴장감이 풀어지기 시작해, 마지막 "맥주가 시원하데이"에서는 딱 꼬리를 내리는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이것이 곧 희곡의 대사가 한가롭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희곡이 행동적이고 영상적인 언어라는 말도 되고요. 사건을 진행시키면서 단 대사 네 마디로 서로 대립에서 화해까지 가볍게 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듯 스피디하면서 깊이 있는 희곡 언어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랬을 때 인물도 그만큼 캐릭터를 분명히 갖고 행동할 수 있는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명대사란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산물세계에서 최고의 명문장으로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를 꼽습니다. 이 문장을 못 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 말이 왜 명문장인가를 생각해 보면, 대사는 상황에서 나옵니다. 절대절명의 상황, 셰익스피어는 그 문장을 잘 쓴 게 아니라 진짜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상황을 관객한테 완전히 자리를 깔아 준 것입니다. 그 다음에 대사를 치는 겁니다. 그게 상황과 맞아떨어지니까 명대사가 되는 것입니다. 대사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인물은 반드시 일을 합니다. 일을 하면서 성격이 나오게 됩니다. 성격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집니다. 그러면서 대사가 나오는 겁니다. 이 가운데 끼어야 될 것은 상황입니다. 어떤 인물이 나와서 어떤 일을 하게 되고, 어떤 일이라는 건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전화 받는 상황인가, 밥을 먹는 상황, 오줌 누는 상황, 옷 입는 상황, 학교 가는 상황, 그 상황에 따라서 성격차, 행동차에 따라서 대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대사는 우리 머릿속에서 나오는 문학적 수사가 아닙니다. 상황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부산물입니다.
학생 두 명이 있습니다. 한 학생은 나한테 도시락을 가져와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한 학생은 저한테 뭔가 나쁜 일로 대들었다가 욕을 먹었습니다. 둘이 화장실로 들어가고 나는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마주쳤습니다. 평소에 좋게 본 친구가 "야, 이만희 참 멋지지." 하고 말했을 때 "병신" 이 나오면 반응이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겁니다.




희곡에 있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적 대사는 어떻게 나오는가의 답은 상황이 문학적 이면 문학적 대사입니다. 예를 들어 상황이 문학적이라는 것은 헤어지면 20년 동안 못 만납니다. 그때 이 대사는 다 시입니다. 상황이 시이니까요. 아들이 군대에 가려고 합니다. 평소에 무뚝뚝한 경상도 아버지가 말합니다. "묵으라.", "아니 저 됐습니다.", "묵으라." 이것이 시입니다. 그 말에 엄청난 사랑이 들어 있는 겁니다. 아주 구두쇠였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무명배우였다가 TV에 엑스트라로 한번 나왔다면, 시외전화는 돈이 들고 표현은 해야 하겠고 "어, 누구냐 봤다." 하고 끊습니다. 그 사람의 상황이 "봤다." 한마디로 엄청난 사랑이 다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시이지 멋있는 말이 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극문학은 소설이나 시 쓰기와는 탄생 자체가 180도 다른 겁니다. 시나 소설 좀 쓸 줄 안다고 희곡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히 화성과 목성의 차이입니다. 완전히 다른 장르입니다. 같은 문학적 수사를 쓴다고 해서 "이 당신에 대한 사랑을 들어 나는 잠을 청하노라" 는 얘기는 셰익스피어가 쓰기는 썼어도 4백년 전에 한참 수사학이 널리 통용될 때 했던 얘기입니다. 그런 문학적 표현을 지금 희곡에서 한다고 하면, 작가가 정신이상자가 아니냐는 즉각적인 답이 나옵니다.




문학적인 드라마를 쓰고싶다고 했을 때는 문학적 상황을 만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다' 도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조금 있으면 3분 뒤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검사한테 갑니다. 담배 한 대만 달라고 합니다. 담배 한 대 피우는 것은 말 없어도 시입니다.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고 문학적 대사만을 넣으려 들면 안 되는 겁니다. 결국 인물 자체가 문학적이어야 되고, 그 인물이 일을 하는 게 문학적 상황이어야 됩니다. 그랬을 때 문학적 대사가 나오는 것이지 문학 대사만 가지고 문학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상황에서 대사가 나온다는 것을 아는 분들이라면 상당한 경지에 있는 분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사는 반드시 그 사람의 상황이어야 하니까, 그 인물이 그 상황이 되기까지 끌고 가는 게 드라마 작가가 해야 될 일입니다. 하여튼 시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야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잘 쓴 것은 'To be or not to be'가 아닙니다. 절대절명의 그 상황을 잘 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대사를 쓸 때 첫 도입부 얘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불행하게도 가장 좋은 첫 대사를 본 건 기존의 기성작가한테서 본 것이 아니라 대학교 3학년 짜리 작품을 점수를 매기다가 봤습니다. 첫 대사가 뭐냐면 "섹스 끝난 뒤에는 담배 피지 말랬지" 이 대사였습니다. 여자가 MBC나 KBS 앵커인데 얼굴이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까. 함부로 놀아날 수는 없고 애인을 아파트에 감금 비슷하게 해놓고 자기가 섹스를 원할 때 찾아와서 첫 장면이 여자가 욕조에서 타올을 입고 나오면 남자가 알몸인 채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그때 하는 얘기입니다. 인물의 성격이나 지위가 다 나옵니다. 아, 여자가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때는 틀림없이 지적이고 성공한 인물이다. 그리고 남자는 그의 하수인일 것이다. 이게 다른 사람은 10페이지 가량을 도입부에서 얘기해야 될 것을 흥미진진하게 화두처럼 던지는 데 놀랐습니다. 배우들이 신경 쓰는 것은 첫 대사와 마지막 대사입니다. 한 배우가 둘 다 해 버리면 작가의 술수가 아닌가 하는 눈초리를 보내고 그게 여배우로 끝났을 때는 남자 작가의 경우에는 "무슨 섬씽이 있는 것 아니야?" 그 정도로 신경을 씁니다. 첫 대사를 누가 치느냐 마지막 대사를 누가 치느냐 진짜 중요한 것은 첫 대사입니다. 인물 걸기에 성공해야 한다는 것처럼 첫 대사가 템포, 리듬, 앞으로의 상황 전개를 다 설명할 수 있는 말이면 그야말로 최고입니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國)}을 보면 '터널을 지나자 그곳은 설국이었다.'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뭔가 사건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될 듯한 분위기를 그 한마디에 많은 얘기를 응축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드라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작품이 재미있을까 어떨까 했을 때 첫 대사가 어떻게 꽂히는가에 따라서 흥미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물과 대사는 같은 맥락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