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빴다.
것도 몹시.
2월 중순부터 놀았으니 약 4개월 정도 빈둥댔다.
길고 지난한 나날이었지만 텃밭에서 야채도 기르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잠도 자고, 집을 하나 살까 연구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병원도 다니면서 그야말로 알아서 빈둥빈둥 잘 놀았다.
놀아보니 좋았다.
그러나 놀려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
이젠 늙어서 빛나는 아이디어도 없고 하여 영화고 드라마고 벌려 놓은 것은 있지만 직접적으로 현실로 연결 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 너무 요원한 일이었다.
이에 한계를 느끼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레방아 돌리는 드라마 기획 역시나 내가 하기 버거운 일이기도 했지만 갑자기 이제 와서 뭐 새로울 것도 없고 고루하다나 어쨌다나?
금방 식상해 하는 걸로 봐서 조루라면 모를까 고루는 무슨 얼어 죽을 고루?
인구 늘이며 사는 방법이 태고 이래로 이어져 오던 방법 외에 전에 없던 파격적인 신기술이 도입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어쨌든, 보험 든 것 7개중에서 새로운 보험을 들기 위해 2개를 해약했었는데 이번에 또 보장성 연금 보험과 암 보험만 남기고 나머지를 해약했다.
나 죽으면 약 4억 5천만 원이 나온단다.
헉, 죽어서 돈 나오면 뭐하나?
얼마 되지 않지만 유산은 일단 다 맹인협회에 기증하기로 했으나 내가 살아서 쓰고 남은 것이지 내가 안 쓰고 남길 마음은 없었다.
보험을 해약하고 보니 이차저차 합해서 몇천만 원 여유 돈이 생겼다.
일단 놀고 보자, 족히 2년은 놀 수 있지 않느냐? 이리 생각하니 편했다.
으하하하.
그러다가 뭔가를 도모해 볼까 연구를 했다.
커피숍?
빵집?
밥집?
어딘가 한 자리에 붙박이로 붙어서 뭔가를 한다는 것을 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사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난 번 사례로 보아 남을 두고 일을 벌이면 또 백발백중 망할 것이 뻔해서 한다면 직접 나서야지 누구를 내세워 맞기면 안 된다고 판단을 했다.
어쨌든 게으른 족속인 내게 어울릴 만한 일이 뭐 없을까 연구를 해보니 그나마 재고도 없고 커피 타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돈이 턱없이 모자랐고 그렇다고 밥 집을 하자 하니 손이 너무 많이 가고,
빵은 내가 안 좋아하니 별 맘이 안 땅기고,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고 하는 심보가 아닌가 싶기도 해서 여기저기 둘러 보며 자료들만 모았다.
지난 10월 말에 남도 지방을 돌면서 이러저러한 친환경 농수산물 유통을 할까 하고 조사도 해 봤다.
해남에서 나는 농수산 특산물 유통을 해 보라는 권유도 받았고 내가 한다면 물량을 다 나한테 밀어주겠다고 했다.
매실, 마늘, 호박 고구마, 무화과, 된장, 소금, 김, 멸치, 절임 배추, 등등.
사이트도 열고 홈쇼핑 판매도 알아 보란다.
그때 약 200억 규모로 전복 양식을 하는 동창녀석을 만나 전복 죽과 전복 구이 집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말을 들어서 잠시 잠깐 조사를 한 것이 있었다.
워낙 죽을 좋아해서 집에서 가끔 죽 파티를 하곤 했는데 전복 죽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실버 사업에 관한 일을 할 때 본 죽, 죽 이야기, 현죽 등등 죽집 홍보 담당들과 협력업체 건으로 접촉을 했었다.
거기에 전복을 납품하는 일을 다시 한 번 시도 해 봐?
나의 무대뽀 정신과 불도저 스타일의 일 처리 방식이 LG텔레콤과 1001 안경점 그리고 몇몇 업체들과 협력사 계약 체결을 성공적으로 끌어냈던 과거 전적으로 보아 만일 일이 잘만 성사되면 청정지역에서 나는 해남 산 전복을 죽 집에 납품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여 또 프랜차이즈 죽 집을 이 잡듯 뒤졌고 슈퍼마켓에서 파는 죽 만드는 공장 아이와도 연락을 해야 했고
병원 앞에서 죽 집을 하는 친구에게 노하우를 물어 보고 전복 시세도 알아 봤다.
이마트나 하나로 마트 혹은 조개 구이 전문점과 횟집에 납품을 해도 괜찮을 듯 싶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니 원가 대비 승산이 있었다.
더 연구를 해 보고 가능성 타진을 하고 확신이 서면 한 번 덤벼 볼까 한다.
사이트를 여는 문제도 같이 더 연구를 해 볼 계획이다.
어쨌든 제일 먼저 매실과 마늘에 도전을 하기로 했다.
헌데 이런 저런 조사를 해 보니 물류비가 너무 올라 타산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아니면 산지에서 밭떼기를 해야 하는데 그건 초기 자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더구나 마늘 같은 경우는 대량으로 사서 비싸게 팔려고 저온 저장고에 몽땅 저장을 하기 위해 도리를 치는 장사꾼들이 있어서 쉽지도 않거니와 트럭도 사야 하고 운전을 못하니까 운전수 인건비도 줘야 하고 기름값도 장난이 아니었다.
매실 역시 시간차가 안 맞아서 어려웠다.
해서 둘 다 포기하고 그냥 놀면서, 혹은 드라마나 기획하든지 시나리오를 쓰든지 하려고 했는데 친구의 어머님이 돌아가서 장례식장엘 갔다.
그 친구의 어머님은 일찍이 혼자 되셔서 일평생 마늘 장사를 해서 1남 3녀를 먹이고 가르치고 하신 분이다.
돌아가신 날 내려가서 2박 3일을 함께 했는데 낮엔 사람들이 없어서 잠깐 산책을 나갔었다.
마침 병원과 거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마늘 장수 소매를 하는 분이 계셨는데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장사를 하시는 모습이 안쓰러워 마늘을 담아 주고 잡아 주고 하면서 서너 시간 도와 드렸다.
아저씨가 말했다.
먼지도 나고 허리도 아플 텐데 도와 줘서 고맙다고 밥이나 한끼 사주고 싶다고.
난 장례식에 왔는데 시간이 나서 그냥 혼자 하는 게 버거워 보여서 도와드린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루에 얼마나 버느냐고 물었다.
많이 번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 많이가 얼마 정도냐고 묻자 저녁 먹으면서 가르쳐 주겠단다.
하하하하.
또 이것 저것 물었더니 다 가르쳐 줄 테니 이따 만나잔다.
난 그냥 알았다고 말하고 장례식장으로 와서 친구를 돕고 있는데 그 아저씨가 찾아왔다.
밥도 이미 먹었지만 일단 따라 나가서 순댓국 집에 앉아 소주를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하루에 한 차씩 팔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데 딱 한 달에서 두 달 장사를 하는 거란다.
못 벌어도 하루에 22만원에서 80만원은 번다고 하셨다.
나도 사실을 마늘 밭떼기를 해 볼까 했었고 친구 어머님이 마늘 장사를 했기 때문에 아저씨가 눈에 들어 왔다고,,만일 친구 어머님이 과일 장사나 생선 장사를 했다면 아마도 거기 가서 보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더니 마늘 장사 한 번 해 볼 생각 있으면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돈을 벌 거라고 제의를 했다.
부인과 함께 노점상을 8년 동안 했는데 작년에 부인이 죽어서 그 자리에 사람을 사서 쓰고 있다면서 몫이 좋으니 못 놓는다고 하면서 그 자리를 주겠단다.
일생에 노동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고 더구나 장사를 안 해 본 나로서는 겁이 나기도 했지만 어차피 마늘 장사를 한 번 해 보기로 했던 게 있어서 하루를 할 지 아니면 열흘을 할지는 모르나 한 번 생각해 보고 전화 드린다고 하고 왔다.
서울에 와서 줄줄이 이어진 약속들을 다 지키고 몇몇 주위 사람들에게 묻고 경험 삼아 한 번 해 보기로 결심을 하고 가겠다고 전화를 드렸다.
가기 하루 전날 나를 예뻐해 주시는 선배님께 여차저차한 일을 할까 한다 했더니 나 보다 더 걱정을 하셨다.
다음 날 선배님께 전화가 왔다.
“돌아서서 떠나라-영화’약속’-박신양, 전도연 주연 /드라마’연인’ 이서진, 김정은 주연-의 원작 희곡-라는 작품을 연극으로 올리는데 총감독을 해 볼 생각은 없느냐고.
있다고,,그럼 마늘 장사 가지 말고 연극 기획을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미 약속을 하고 난 후라서 거절을 하더라도 만나서 거절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고 갔다.
난 예전부터 수락을 하는 일은 전화로 하지만 거절 해야 할 일은 꼭 만나서 말을 한다.
그래야 오해도 없고 내 맘이 편했기 때문이다.
아저씨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친구 집에서 자고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친구가 갈아 주는 더덕 즙을 마시고 5시에 나갔다.
서산으로 마늘을 사러 가는데 동행을 해야 했다.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마늘을 이리저리 보면서 가격을 치고 차에 싣고 왔다.
아저씨가 마늘을 내려 준 자리에서 마늘을 진열을 하고 감자, 양파, 토마토, 참외, 수박도 같이 팔아야 했다.
진열하는 법이랑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배우는 중에 마늘을 사러 온 사람이 있어서 마늘 단을 들고 작두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가서 너풀거리는 마늘 대를 작두를 벌리고 막 자르려는 순간,
헉,
바로 손이 나갔다.
첫 날, 첫 마늘을 파는 첫 단이었다.
뼈가 보일 지경으로 깊이 베었다.
피가 철철 났다.
작두에서 마늘 찌꺼기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상처 깊숙이 혀로 두 번 정도 밀어냈다.
아,,,쓰라림과 아림의 특이한 통증.
약국으로 뛰었다.
지압을 하고 피가 멈추자 연고를 바르고 항생제를 먹고 내과엘 갔다.
내과에서 정형외과로 가서 꿰매라고 했다.
정형외과로 가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갔다.
괜히 서러웠다.
정형외과에서 보더니 연고를 깨끗이 닦아 내고 두 바늘 정도 꿰매면 좋긴 하지만 흉터가 생기니까 연고 바르면 살이 안 붙으니까 바르지 말고 움직이지 말고 일주일 동안 물도 묻히지 말란다.
그리고 밴드를 붙여 줬는데 세상에나 손을 구부리면 벤 상처에서 피가 또 나서 다시 밴드를 떼고 면봉으로 응급처치로 깁스를 했다.
크하하하하.
당장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하루도 못 해 보고 간다는 것이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더구나 산지와 중간 상인과 소매상인, 소비자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을 밥이나 술을 사 주면서 취재를 한다 해도 제대로 된 취재가 될까말까한데 돈을 벌면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아 더 속이 상했다.
“죽기 아니면 까물어치기지 뭐. 일단 일주일은 무조건 버텨보는 거야. 군대 가서 제대 날 세듯 딱 일주일만 할 건데 까짓 거 거꾸로 매달아 놔도 참아낼 수 있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 다친 거 어떠냐고 아저씨가 묻자 뭐 견딜 만 하다고 말하고 하겠다고 했다.
선배님들께 전화를 했다.
손을 다쳤다고 하자 당장, 지금 당장 올라 오라고 난리가 아니었다.
괜히 또 눈물이 주르르 흐르면서 울컥했다.
그냥 일주일만 버티겠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야말로 뼈 빠지게 마늘을 자르고 다른 것도 팔았다.
친구가 와서 4시간 정도 함께 마늘을 자르고 팔아 주었다.
길거리에 서서 먼지를 먹고 차 소음과 오고 가는 사람들이 묻는 말에 대답하고 어쩌고 저쩌고 장난이 아니었다.
여기서 하나 느낀 점은 인상 좋은 사람들은 맘 씀씀이도 좋더라는 사실.
백인이면 백색이라 입 달린 사람이면 오만 가지 자기 생각을 툭툭 던지고 가는데 이상한 건 득도한 사람처럼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그럴 수도 있겠지,,,그래도 피곤 한 건 견디기 힘들었다.
나중엔 다리가 풀리고 발이 화닥화닥하며 뜨거웠다.
꼴 난 다섯 평 텃밭 삽질 잠깐 하고도 헉헉거리는 데,,,
내가 만일 이 일을 평생 해야 하거나 이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면 정말 서러울 뻔했다.
쩝,
내일은 집에 간다고 말해야 지를 백만 번쯤 생각했다.
그런데 차마 말을 못했다.
아침, 점심, 두 끼를 다 못 먹었다.
너무 힘이 드니까 뭘 당췌 씹어 넘길 수가 없었다.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도 모르겠었다.
죄 없는 물만 원 없이 마셨는데 화장실을 한 번 밖에 가지 않았다.
다 땀으로 나와서 소변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일을 다 마무리를 하고 친구 집에 도착하자 11시가 되었다.
온 몸이 땀에 절어 마른 소금기를 씻어야 하는데 다친 손에 물을 묻히지 말라는 의사의 말을 따라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친구한테 부탁을 했다.
“왼쪽은 어떻게 내가 씻어보겠는데 오른쪽은 씻기가 어려우니 네가 좀 수고스럽겠지만 씻어 줄래?”
친구 그 말을 듣자마자 무조건 반사적으로 곧바로 싱크대 서랍장을 열더니 위생장갑과 고무 밴드를 꺼내 주며 하는 말.
“장갑 끼고 고무 밴드로 물 안 들어 가게 잘 동여매고 씻어”
씻고 나오자 친구가 밥을 차려 놓았다.
그날 장사를 하고 남은 이익금이17만원 정도였다.
일단 10만원을 떼서 친구 딸이 고시공부를 하는데 용돈을 주라며 건네 줬다.
그리고 꼭 이런 말도 함께 하면서 주라고 당부했다.
“아그야, 육체 노동이란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이 이모가 경험을 해 보니 공부하는 네가 떠 올라서 공부하다 힘들면 맛있는 것 사먹어 가며 하라고 부러 머리털 나고 해 본 첫 육체 노동으로 번 돈을 네게 주는 것이니 열심히 공부해라” 라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시간은 새벽 1시.
다음날, 역시나 새벽 5시에 서산으로 떠났다.
날이면 날마다 집에 가겠다고 말해야 지를 되뇌며 매일 이런 스케줄로 일주일을 보냈다.
비가 오면 장사를 하지 않는다기에 제발 비가 오기를 빌고 빌면서 그만 둘 생각만 가득하게 안고, 하지만 하는 순간만큼은 열심히 했다.
다행히 일주일이 되는 날 비가 왔다.
으흐흐흐.
집으로 왔다.
은평 시민 넷 회원 몇 분이 주문한 마늘과 함께 팔다 남은 것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어찌나 기쁘든지.
어쨌든 그렇게 일해서 번 돈이 합이 일백일십만 원(1,100,000)
이십 년 전쯤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때 외엔 돈을 쫄딱쫄딱 벌어보지 못했다.
월급을 받기도 했지만 일의 특성상 거의 목돈 계약을 하고 일을 했기 때문에 티끌 모아 태산이라거나 하는 이런 돈벌이에 익숙지가 못하다.
힘들다 어렵다 하면서 했던 일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하고 산 것이 어디냐 싶어 이번 일을 통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돈을 버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뭘 하든 하기만 하면 힘이 들어서 그렇지 굶어 죽진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그 동안 해 왔던 일이 쉬웠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설마 아니 마늘 장사 보다 더 힘들겠나 싶기도 하고 뭘 하든 마늘 소매 장사를 하는 일보다는 쉬울 것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친구는 말했다.
니가 그 동안 얼마나 좋은 일을 하고 살았는지 알겠냐며 하루도 못 견딜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일주일씩이나 견디는 거 보고 뭘 하든지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이 생겼다고. 하면서 그래도 그렇지 한달 정도는 했어야 되는 것 아니냐란다.
속내는 따로 있었지만 아침마다 더덕 즙과 인삼 즙을 갈아 주던 친구의 마음이 혹시 상할까 봐 더 하고 싶어도,,,더 할 수도 있지만 일이 생겨서 가는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말라고 말해 줬다.
사실 이번에 했던 마늘 장사는 내게 있어 엄청난 경험이었다.
집에 와서 난 거의 매일 초 죽음이 되어 시체처럼 늘어져 잠을 잤다.
온 몸 구석구석 안 쑤시는 데가 없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 부어 쥘 수도 없을 만큼 아팠다.
벌어 온 돈을 다 되 물리고 싶을 정도였다.
힘든 만큼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농수산물 유통 구조를 희미하게나마 조금 알게 되었다.
지금은 조금씩 공부하는 마음으로 알아 보고 더 신중하게 생각해서 본격적으로 농수산물 유통업을 할지 말지는 일단 공연이 끝나고 나서 결정할까 한다.
작품 하나가 드라마 기획 중에 있다.
내가 쓴 작품(기적) 하나가 제작 준비를 하느라고 투자자를 찾기 위해 나돌아 다닌다.
그리고 시나리오 하나를 의뢰 받았다.
헌데, 왠 걸? 장르가 액션 멜로-르와르란다.
맨 처음엔 작가를 구해서 같이 개발해 보자고 하더니 내가 아트과라서 잘 안 어울릴지도 모르나 르와르가 별거냐면서 그래도 쓸 수 있으면 한 번 써 보란다.
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시높시스를 먼저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하긴 뭐 멜로라고 잘 쓸 리도 없겠지만 그래도 “사랑해요” 라는 말은 백만 번 연발해도 표절이 아니지만 줘 패고 두드려 맞는 것은 조금만 비슷해도 표절 시비가 붙는데 그 계통에 전문가도 아닌 내가 뭔 재주로 쓰냐 이 말이다.
그래도 한 번 해 보잔다.
결정을 내린 건 아니지만 해 보는데 뭐 나쁠 것이야 없지, 계약도 해 준다는데.
지금 기획을(제작은 한양대 출신 극단 한양 레파토리 현업에서 뛰고 있는 젊은 놈이 맡기로 했다) 맡고 있는 연극 제목도 “돌아 서서 떠나라” 다.
제작 총감독을 하기로 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젊음에 밀린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 만큼 골머리를 쥐어짜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은 있다.
더욱 더 다행인 것은 이 시대 최고의 작가 이만희 선생님의 작품이라는 것과 연극계 최고의 연출가 강영걸 선생님과 최근 떠오르기 시작한 프로덕션 제작진(연인, 온에어를 제작한)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이다.
삼류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은 선택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류 옆에 빌붙어서 가는 삼류 인생.
나쁘지 않다.
이리하여 속으로만 따분따분 준비하던 나의 호주 행 여행은 또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앉게 되었다.
어쩌면 당분간,,,아니 오랫동안 못 갈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가끔 제목이 주는 뉘앙스에서 어떤 징크스가 있음을 느낀다.
“돌아 서서 떠나라”
무얼 하든 하고 나서 돌아 서서 떠나도 늦진 않겠지.
이상, 길바닥 인생 진짜 길바닥에서 뒹군 이야기였습니다.
새벽 다섯시 산지로 떠나는 차 안.
동이 트고 있다.
서해 고속도로
평택 항.
서산 진입로.
중간 도매상에 쌓인 마늘.
상차하는 모습.
팔려고 길에 쌓아 놓은 마늘.
첫단을 팔려다 잘린 손가락 응급처치 모습.
손을 자른 작두.
판 마늘 윗 다발.
그 외에 파는 각종 거시기들.
가끔씩 올려다 본 하늘.
심심하면 저 아파트 동 호수도 세 보고.
응급처치로 한 깊스.
마늘 팔다 먼지에 절은 손바닥.
심심풀이 노리개 개미들의 행진.
그래도 심심하면 마늘을 깠다.
상처가 아문 손가락.
그 와중에 위로가 된 꽃.
거의 다 아문 손가락.
이만하기 천만 다행이다.
내게 있는 흉터 중에 가장 큰 흉터는 4학년 때 넘어져서 생긴 정갱이에 있는 흉터이고 이 흉터가 두번째 큰 흉터다.
***왠만하면 노점상(스트리트 비즈니스) 이용해 주세요.
조사에 의하면 노점상인들 하루 평균 5만원 번답니다.
더 버는 날도 있겠지만 비오는 날, 노는 날 등등 평균 내면.
어느 노점상이나 거의 비슷한 주준이더라구요.
그리고 절대 뭐 하나 덜 먹고 말지 하나 더 달라는 말 하지 마세요.
바로 그 하나가 남는 돈이랍니다.
저런 거 팔아서 돈 얼마 안 남아요.
한 박스 팔아도 적게는 3천원에서 5천원 남는데 예를 들어 20킬로그램 감자 한박스를 2킬로그램으로 나눠 담으면 열 봉지가 나와요.
감자가 싸게는 1만 2천원에서 2만원 왔다 갔다 하는데 한 봉지에 2천원 받으면 2만원이죠?
그리고 참외 한 박스에 2만원 전후인데 36개 들이 5천원어치씩 담으면 6X6=36 . 6 봉지인데
다 팔면 1만원 정도 남아요.
그런데 거기서 상한 거 골라내면 말짱 꽝임.
감자랑 양파 참외들 중에서 이상한 거 빼내는 나를 보면 아저씨 한심스럽게 쳐다 보며 하는 말.
소질이 없어 장사는 못 해 먹겠다였어요.
다행이 그나마 장사를 잘한 건 오직 둥글넙뒈뒈한 인상이 좋아서,,,헤헤헤,쩝.
그 소질 없는 나도 마지막 날엔 바구니에 물건을 담으면 저울에 재지 않고도 딱딱 2킬로씩 담아내는 노하우가 생겼었더랍니다.
참고로 전 수박 3덩어리 깨고 안 익은 거 반품 받고 등등 그랬답니다.
제가 저리 돈을 번 건 오직 마늘을 팔아서랍니다.
마늘은 한 다발에 천원 남아요.
그 천원에서 기름값 이런 거 빼면 그것도 안 남아요.
그런데 마늘 한 다발 사가면서 천원 깎아 달라고 하면???
안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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