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은평 시민 넷 여름 캠프를 다녀와서

monomomo 2008. 8. 15. 08:10

"내 한 몸도 짐이다.
 

사람 사는 모습이 다 비슷비슷해서 누구나 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훌훌 털며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고 사는 게 우리네 사람 사는 모습이다.

나 역시 "내 한 몸도 짐이다"가 내가 꿈꾸는 삶의 한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이란 늘 지금 가능한 것이 아닌 것을 희망하는 것이라 여겨지기에

그렇게 살고 싶어도 말로만 떠들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짐을 떠 안고 살고 있다.

해서, 어디다 잃어버리고 찾아 다니는지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어하고

갇힌 것도 아닌데 자유로운 시간을 갖고자 꿈을 꾸고

어느 곳을 향해 간다기 보다 이곳을 떠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사방에 산재해 있는 짐들을 벗고 여행을 떠나고자 갈망한다.

여행을 다녀오면 간유리 너머로 보이는 희뿌연 정체들이 확연하게 드러날 지도 몰라,,,

현실을 에워싼 양피막같은 답답함이 좀 걷힐 지도 몰라,,, 가느다란 기대를 가지고.

 

어릴 적 소풍을 가거나 수학 여행을 가기 전날 밤.

비가 오면 어떡하나?

무슨 일이 터져서 못 가게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까?

행여 나만 보물을 못 찾으면 쪽 팔리겠지?

1년에 한 번 먹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오징어 뒷다리도 사고,

역시나 1년에 한 번 먹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사이다도 사고,

소풍 갈 때 아니면 절대 먹을 수 없었던 삶은 계란도 먹을 수 있고,

새로 산 빨강색 스타킹도 신고,

파란색 다우다 주름 치마도 입고,

빨간 수실로 수가 놓인 레이스 달린 하얀 블라우스도 입고,

등등 설레는 맘으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늘 자던 시간을 훌쩍 넘기고 설치다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어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던 기억은 사람마다 상상의 내용이 약간씩 다를 수는 있겠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이번 은평 시민 넷 여름 캠프는 지난 '84년 LA 올림픽이 열렸던 해,

친구들과 텐트, 코펠, 버너를 가지고 동해안으로 처음으로 캠핑을 갔던 이후 14년 만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캠프,

이는 과연 내게 있어 어릴 적 소풍 가기 전날 밤처럼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 이였을까?

 

가족 관계의 모호함이 혼란을 일으켜 '나'라는 존재의 모호함에 이르러 시달릴 만큼 영향을 받은 탓으로

설령 가족들이 모여서 여행을 가자고 했었다 한들 따라가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단 한번도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매년 여름 캠프를 가는 은평 시민 넷 식구들을 지켜보면서 조금은 부럽기도 했었던 터라

선배로부터 이번 여름 캠프에 같이 가자는 제의를 받고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그나마 무관할 수 있었던 마음이 조금 흔들리기도 했지만

사실, 마음은 갈까 말까 반반이었다.

'가족'이란 단어만 들어도 냉정을 넘어 비정에 가깝게 반응하는 내가 가족 단위로 묶여진 단체에서 과연 잘 적응 할 수 있을까?

괜히 잘 못 끼여 들어 분위기를 망치면 어쩌지??,

혹여, 적응을 잘 못해서 그간에 무지 기대고 살았던 친구인 술과 나 혼자만 너무 절친하게 지내게 되지나 않을까?

허이구야,,,여기서 모자라 거기까지 가서 또???

뭐 이런 저런 생각들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때 마침 매년 우리 집에서 모이던 친구들이 하필이면 캠프를 가는 날짜에 모두 시간이 맞아 온다고 해서 더 그랬었다.

 

어쨌든, 심정적으로 나 혼자 여러 가지 생각들로 가득 찬 머릿 속을 정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친구들과의 스케줄을 조정하고 함께 캠프에 가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으흐흐흐.

결정이란 내리기까지가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한 번 결정이 내려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쉬워지는 법.

 

갔다.

 

시민 넷 식구들과 2박 3일을 함께 하면서 많이 놀랐다.

뭔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새벽이 오는지 가는지 모를 정도로 대화를 하는 모습이야 이미 익숙하게 봐 왔으니

밤새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는 것쯤은 새삼 놀랄 것도 없었지만

일단, 애, 어른 할 것 없이 아흐레 이렛날을 굶긴 등짐 질 하는 머슴들 밥 먹듯 먹어 치우는 먹성에 놀랐고,

바위를 먹어도 될 만큼 돌아서면 배 고프다고 말하는 소화력에 놀랐고,

그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송계에 상주하는 걸신들이 잠시 이들에게 접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덕분에 말로만 다이어트였던 내 다이어트 전선에 이상 생겼다.-

역할 분담을 나눈 스케줄 표 하나 없이 알아서 각자 소임에 임하는 조직력에 놀랐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아이들이었다.

군것질 거리라고는 오로지 감자와 옥수수, 김치 부침개가 전부였는데

요즘 아이들답지 않게 탄산 음료나 과자를 찾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적게는 4살부터 많게는18살까지 터울이 많이 졌는데도

나름대로 또래끼리 어울리기도 했지만

큰 아이가 꼬맹이를 귀찮다 마다 않고 잘 챙기는 모습도 놀라웠다.

그리고,,,

정말 생경한 풍경이 하나 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다름아닌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엄마~~” 라는 단어였다.

단어에 숨은 어감으로 보아 모녀 혹은 모자 불 분리의 대 법칙 협정을 맺은 듯 착착 달라붙은 그 친밀감이라니,,,-나도 괜히 따라 불러 보기도 했다.-

또, 아내들을 불러 무엇이 어디 있는지 물어 보는 남정네들의 모습이었다.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별 것도 아닌 ‘치약, 바지, 비누” 뭐 이런 것들을 찾느라,,,

엄마들은 변함없이 엄마 자리를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고

남정네들은 때로는 아빠, 때로는 남편이기도 했지만 상황과 여건에 맞는 기회만 주어지면 바로 개구쟁이 소년으로 돌아가는 모습도 신기했다.

거의 3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남의 아이, 내 아이 구별 없이 모두의 어미와 아비로서 아이들을 챙기는 모습과

어느 것 하나 이견이 있다거나 다툼도 없이 모든 것의 끝은 환하게 입 벌리고 소리 나게 웃는 모습들을 보며

참, 좋은 사람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설핏한 틈을 타 파라솔에 잠깐 앉아 ‘인연’의 의미를 생각하며 담배를 피다가도

7월 장마는 꿔서라도 한다는데 지가 피해 갈 인연이었다면 엮이지도 않았겠지 싶고

해거름에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피다가도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로또를 사서 당첨이 되면 프랜드 타운을 만들어

함께 사는 모습을 그려 보는 망상 또한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더키님 시아버님이 싸 주신 감자와 고추장,

희망여행님 시어머님이 미리 쪄서 냉동실에 보관해 놓은 옥수수

알아서 준비 해 온 밑반찬들도 다 맛이 있었지만

특별히hope0021님이 그토록 자랑하며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신 닭발 구이는

충분히 자랑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그 맛이 일품이었다.

계획엔 없었지만 처음과 끝을 장식한 콩국수 맛도 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짧지만 잊을 수 없는 시간이 있었다면 바로 요가 시간이었다.

그 동안 어느 근육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요가를 하던 당시는 물론이요 그 다음날 아침에 확실히 증명해 줬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월이 깡패라지만 한 때는 마라톤 풀 코스도 뛰었고

무쇠 강철인 줄 알 만큼 남아 도는 게 체력이었고

가랑이를 180도로 벌리고 좌우로 흔들어도 끄덕 없던 시절도 있었는데

세상에나 선생님은 아무 것도 아닌 동작이라 하지만

따라 하는 우리로서는 엄살을 가장한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이다지도 힘이 들다니,,,를 연발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세월은 확실한 깡패였다.

-으흐흐흐,,, 지금도 온데 근육이 다 뻑쩍지끈하다-

세상에서 노는 것이 젤로 힘들다고 말하지만

난 그냥 빈둥대면서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사는 것이 가장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다.

그런 나조차도 쇠꼬챙이 같은 햇볕의 열기와 가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더위 탓도 있었지만

노는 것이 힘들었는지 애 밴년 짐짝 들 듯 중간 중간에 축축 늘어지면 잠깐씩 꿀 잠을 자곤 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돌아다니는 내내 너무 잘 생기고 수묵화 속에 있는 농담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우리나라의 산야를 보며 반하고 반하고 또 반했다.

돌아 오는 길에 동 서울 톨게이트를 보자 왠지 모를 답답함과 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돌아 오기 위해 떠난다고 하고

돌아 올 곳이 있어 행복하다라고 하지만

돌아 오고 싶지 않은 곳에 와서 보고 느낀 이 이중적인 감정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힘껏 던지면 던질 수록 돌아 오는 속도가 빠른 슬픈 부메랑 같은 이 느낌.

문명의 편리함에 익숙해 지면 익숙해 질수록 불편함은 견디기 어려워지리라.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에잇 몰라몰라, 어차피 나서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몇 백 년을 살겠다고,,,그냥 저냥 사는 거지 뭐”

죽는 날까지 이런 생각에 시달리며 나도 모르는 사이 전원을 꿈꾸는 도시형 인간이 되어 가겠지,,,

사라져버린 꿈들과 지나가버린 청춘에게 미안해 하며,,,

그래도,,,

그래도라는 것이 있는데,,,

 

음홧화하하하하

고백컨데 내가 천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아주 훌륭한 여행이었다.

‘엄마’ ‘마누라’ 이런 거 안 하기로 결정 내린 내 판단이 얼마나 탁월하고 훌륭한 선택이었나에 대해.

천재가 아니고서야 쩝, 이 머리에 어찌 이렇게 훌륭한 생각을

할 수 있었겠나 싶어서.

우헤헤헤.

 

은평 시민 넷,

아자아자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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