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은 많이 변해 있었다.
자주 가던 서점, 레코드 가게, 라면집도 사라지고 주인을 찾기위해 사고라도 나기를 기다리며 오 가는 차를 째려보던 의수족 가게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따 보기 흉한 망치를 든 조형물이 서 있는 건물 지하 영화관 계단을 내려가다 가는 빗줄기 사이로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책을 읽고 있는 그를 봤다.
다리 옆엔 무릎에 조금 못 미치는 크기의 우산이 그처럼 비스듬히 서 있었다.
저 번 만남 때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래서인지 멋진 컷이었지만 사진을 찍지 못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아팠어요...아주 많이...오랫동안... 아프더라구요."
낮고,,,느렸고,,,긴 호흡을 내 쉬면서 말했다.
그랬었구나아,,,어쩐지 시가 많이 아프더라니.
그의 맘 한 켠에 둥지를 틀고 살다 간, 보낸, 아니 보내야만 했었을, 어쩌면 지금도 살고 있을,
아프게 스민 정체에 대해 주어도 없이 우리는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지금도...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지...아직...힘 들어요."
그는 얇은 눈커플을 빠르게 깜박거리다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더니 눈섭 끄트머리 어딘가에 시선을 멈췄다.
그는 지금 그 시절로 가 있다.
눈동자가 멈춰진 저 끝 어딘가에 지난 시절 함께했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아물어 가던 상채기를 아프게 뜯어내고 있었다.
콧망울이 가늘게 떨리며 관자놀이에 퍼런 핏줄이 섰다.
눈물 한 방울 쯤 흘려 내려놓아도 상관 없을텐데 억지로 참느라 흰자위에 빨갛게 핏발을 세우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오십만년 전부터 먹고 싶어했다던 동태 찌게를 끓일 때 환하게 굴리던 눈동자에서 비쳤던 해맑음과 달랐다.
소년의 티를 벗고 청년을 훌쩍지나 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담긴 고독한 중년 사내의 눈빛을 그윽하게 풍기고 있었다.
"차차 나아지겠죠"
"알아요...그건 아는데...알고 있는데...그런데 그게 언제일지... 다 이러고 사는 거죠 뭐...그래도...잘 안되네요. "
이런 말을 하기 전,
그녀를 만나고 온 후면 가슴 밖으로 설레는 맘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해맑게 웃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해 떠들던 때가 생각난다.
"선배가 자기를 미워 할 거라고 말하던 걸요?"
"미워하진 않았지만 사이는 안 좋았지"
"그래요. 그게 맘에 걸리나 봐요. 자기를 싫어할 거라고 하더라구요"
"일이었는데 뭐. 일 때문에 벌어진 일은 일로 끝내야지 감정까지 연결하진 않아. 걔랑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라 과잉보호하는 그 주변인이랑 안 좋았어. 더 달라는 사람과 덜 주겠다는 사람이 줄다리기를 하는데 사이가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게 나의 임무였고 그 주변인들 또한 그들의 임무였을테니까."
"어떻하죠? 안 되는 거잖아요. 잘못한 건 없어도 그러면 안 되는 거라서. 그 리 고......내가 어찌해도 안 되는 것은.......우선 순위에서......밀린다는 거예요......아이들 보다는......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나안......그것도 아파요"
속으로 슬며시 웃었다.
그 때, 이미 지금과 같은 아픔이 올 줄 알면서도 다가갈 수밖에 없었던 그 감정을 이해한다.
직접 당한 상황이 아니면 아무리 미루어 짐작을 명확하게 한다손 치더라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일 뿐이다.
냉철했던 사고도 매사에 객관적이던 현명함도 한 순간에 사그리 무너지고야 마는.
다행인 것은 그 아픔이 그의 시 도처에 녹아 들어 시를 더욱 빛나게 했다는 것.
해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어 위로가 되었다는 것.
'그러면 된 거지. 뭐'
"여기 저기서 전화 와서 응대하기 피곤하고 복잡하고 귀찮아요. 선배한테 일임할테니 알아서 다 해 주세요."
"얼마 받고 싶은데?"
"1억이요"
"헉, 정말? 그걸 다 받을 생각이야?"
"아뇨. 하하하."
"그럼 얼마?"
"9천이요"
"하하하. 알았어. 최고 대우란 말로 알아 듣겠어. 업계 최고 대우. 그러니까 7천이라 생각하면 되겠네?"
"아뇨. 8천이요"
"남들이 그런 말 들으면 뭐라 그러는지 아나?"
"미친놈"
"아네"
"하하하"
"301,302가 시였다는 거 알고 있죠?"
"예, 장정일씨요"
"그 시 있지? 자기가 쓴 거, 울진 어쩌고 하는, 그거 짧은 시높 같던데 시나리오로 한 번 써 보지 그래?"
"아,,,스미다. 그래요?"
"응. 한 번 써 봐요."
"예"
"여기서 말이야 나중에 그냥 쓰라고 하니까 예의상 대답한 거라고 말하지마. 난 약속으로 알아 듣겠어"
"예에?"
"미리 말 했어요. 써 봐요. 알았죠?"
"예, 후우~~정신없어라. 헛갈려 죽겠어요"
"내가 정신 사납게 했나?"
"아니요. 그렇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없어요. 어지럽네요. 하여튼 선배님이 다 알아서 해 주세요."
두 시간 정도 여기다 일일이 다 쓸 수없는 이야기들을 마치는 자리에서 그가 한 말이었다.
담배를 필 수 있는 곳을 찾아 야외 카페에 앉아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사약처럼 진한 커피를 마셨다.
바로 앞에 있는 낡은 외정식 적산가옥 담벼락에 걸린 현수막엔 빨간 글씨로 -임대- 그리고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저 집에서 살고 싶어요. 저 집 앞에 이 카페가 있고 이 카페 앞에 있는 저 집에서"
커피 내리는 냄새에 잠에서 깨어 머리를 부시시한 채 눈 비비고 이 카페로 와서 커피를 마시고 싶겠지.
마흔이 넘은 노총각 냄새가 진하게 벤 추레한 츄리닝을 걸치고 쓰레빠를 질질 끌고 앞 마당에 있는 듯이 가까운 곳에서 갓 내린 커피를 진하게 마실 수 있는 이 카페가 보이는 저 집에서 살고 싶겠지.
그가 하는 일이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마음에 스며든 느낌을 마음으로 스며들게 꺼내놓는 일 일 것이므로.
헌데, 그가 그러기엔 너무 댄디하다.
야외 카페에서 갈아 온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바램 하나 중얼거렸다.
다가 올 이 계절엔 아무 것도 맘 속에 스며들 일 없기를,,,
하지만 그간에 한 번도 비켜가 주지 않았듯 역시나 환절기 앓이를 톡톡히 할 것 같으다.
이철수 화백님의 판화에 있는 근사한 말을 빌어 다짐해 본다.
타고 남은 것 없게 마음 맡기지 말 것.
야마다 에이미가 읽고 싶은 날이다.
-120%CO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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