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내색을 하지 않아 잘 몰랐었는데 딸과의 이별에 이토록 힘들어 했다니.
어떻게든 토해냈으니 이젠, 편히 쉬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당선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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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서연
죽음을 앞둔 딸과 보낸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받는 무균병동의 이야기
방송국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던 저자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전화가 걸려온다. 감기인 줄 알고 진찰을 받은 딸의 혈액검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급성 백혈병! 진명여고 2학년인 딸 서연이 2년 6개월 만에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저자는 병상 일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수차례에 걸친 항암 치료, 두 번의 골수 이식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재발. 이 책은 그 기록이다.
“내가 알고 있던 단어의 80프로가 사라지고 글을 읽는 일도, 쓰는 일도 가능하지 않은 공황 상태에서 온몸의 모든 세포는 오로지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뒤덮였다. 어디를 가도, 무엇을 먹어도 서연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눈이 닿는 모든 것에 서연이가 어려 있어 어느 곳에든 차마 눈길이 머물 수가 없었다.”
또한 “사는 의미를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받는 무균병동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저자는 딸의 몸을 뒤흔드는 독한 항암 치료 앞에서 ‘의식의 공황 상태’를 겪었던 경험을 찬찬히 써 내려갔다. 그리고 딸이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을 발췌해 자신과 딸의 시점을 두루 담았다.
병실에서 딸 서연이는 엄마에게 “이제껏 한 건 공부밖에 없고, 내 인생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이에 대한 응답의 일환으로 저자는 “딸의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글을 썼다”고 말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_죽음을 기억하라
백혈병이 발병하고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면서 어머니와 딸, 두 사람은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살았다면 좀처럼 배울 수 없었을 아픈 진실을 깨달았다. 서연도 평화로운 인생을 산 이가 얻을 수 없는 성숙을 안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앞둔 자의 고통과 회한은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메멘토 모리, 이 말의 참뜻은 인간 실존에 내재된 죽음에 대한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대한 배려에 더 가까웠다. 죽음의 병상에서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몸부림치는 동료 환우들의 분투와 노력은 거룩하기까지 했다. 치명적인 병에 걸린 이들의 고통을 나와 관계없는 불행으로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독자들은 암세포에 스러져가는 젊디젊은 서연의 육체에 그 언제가 될 줄 모를 자신의 그날을 겹쳐보게 될 것이다.
천주교 대구 대교구청 본당 뒤편엔 성직자 묘역이 있는데, 그 입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한 달 후 또는 두 달 후의 일을 계획한다는 것. 그것은 한 달 또는 두 달이란 시간이 자신에게 주어짐을 전제로 한 행위다. 하지만 만약, 그토록 당연하다고 여긴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죽음을 직면하는 과정 그리고 그 시간을 기록하는 일의 지난함
딸의 곁에서 24시간 함께 지내면서 지난날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종일 식단을 짜고 치우고 닦는 허드렛일이 무엇보다 가슴 뭉클하게 귀중한 순간으로 다가왔다. 예전에는 소모적이며 아무 표시도 나지 않는 집안일에 에너지를 쏟는 것이 아까웠지만, 매 순간 치열하게 살면서 작은 일에 매진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다가오는 죽음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해야 했다. 타인의 삶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판단해서는 안 되었다.
“내가 경험한 이 고통을 뼛속까지 기억하리라. 극한의 절망이 주는 느낌 또한 영원히 잊...지 않으리. 이것이 고통의 느낌마저도 기억해두려는 진절머리 나는 작가적 본능 때문이라 해도. 눈물과 회한과 소망과 절망이 뒤섞인 이곳. 이곳을 관통한 자는 다른 어떤 세계도 통과할 수 있으리.”
코끝에 다가오는 청명한 겨울 날씨, 바람에 실려오는 어디선가 낙엽을 태우는 냄새. 이러한 일상의 작은 흔적들이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살균된 병실의 공기 속에 살아야 하는 서연에게는 축복처럼 비쳤다. 사람들이 지겨워 달아나고 싶어하는 비루한 일상이 서연에게는 돌아가고픈 약속의 땅이었다. 가끔 병문안 오는 지인이 돌아가고 나면, 세상과 단절된 자가 혼자 덩그러니 남아 맛보게 되는 우울이 온몸에 배어들었다. 같은 병실에서 외로움을 달랬던 환우들도 하나둘씩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앞으로 고통만이 남은 시간. 백혈병 환자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마지막을 맞는지 서연은 이미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 어떤 일말의 희망도 없이 앞으로 죽는 일만 남았다면, 그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이미 알고 있다면, 차라리 고통이 몰려오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나라도 수십 번, 수백 번을 그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두려운 시간을 서연은 오롯이 혼자 견뎌내고 있다. 이 못난 엄마를 위해, 자기가 떠난 뒤에도 남게 될 가족을 위해.”
세상의 봄이 두 모녀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을 때, 아픈 서연의 몸만이 유일한 현실일 때, 죽음을 직면할 용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살아있음의 고통을 그대로 노트에 적었다. 그저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에게 기도하는 심정으로 적었다. 서연은 말수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줄곧 몇 시간씩 잠만 잤다. 그런 딸을 보는 것 자체가 형벌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딸 자신이 될 수는 없다는 극명한 사실 앞에서 저자는 절망했다.
“뼛속까지 외롭고 고독했을 그 좁은 길을 내 어린 딸이 혼자 걸어가며 감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몸서리쳐지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열두 달 태 속에 잉태하여 딸이란 존재를 세상에 내어놓고, 영혼마저도 교감했다고 자신해온 어미조차 한 치도 대신해줄 수 없는 죽음으로 가는 긴 통로.
내가 아무리 딸을 보며 고통스러웠다 한들 그 길고도 긴, 측량조차 하지 못할 극한의 고독을 견뎌내야 했을 당사자와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호스피스 병실은 적막했다. 평화롭고 무심했다. 어느 날 저자는 집에 잠깐 돌아왔다가 서연의 사진첩을 뒤진다. 어깨까지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해맑게 웃고 있는 행복한 딸의 스냅사진이 눈에 띄었다. 무심코 그 사진을 꺼내 수첩 속에 끼웠다. 가장 예뻤던 딸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은 엄마의 심정대로 나중에 그 사진은 서연의 장례식장에서 영정으로 쓰인다.
“사랑하는 딸을 살아생전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도 뼛속까지 슬프다. 때때로 가녀린 몸에 맞지 않게 푸하하 호탕한 소리로 웃어젖히며, 포기해야 할 것은 과감히 포기할 줄 알았던 그리고 안 되는 것은 절대로 욕심내지 않던 그 강직한 포부가 너무도 그립다. 시종일관 진지한 중에도 명랑함과 위트가 넘치던 그 모습 또한 너무나 보고 싶다. 몸무게가 35킬로까지 내려갔던 마지막 시간, 어린아이처럼 내 무릎에 앉아 엄마가 불러주던 찬송가를 듣던 그 모습 또한 너무도 가슴에 사무친다. 하지만 이제는 그 짧은 생애가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남긴 선물을 생각하면 한편 가슴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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