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Blues, Blues, Blues.(Rock의 뿌리 Blues)

monomomo 2003. 9. 15. 00:12







최근에 날 살아있는 느낌을 들게 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블루스다. 그 선율에 이끌려 밤낮으로 정신없이 블루스를 들었다. 간만에 뭔가에 빠져 들었다. 연애를 한다해도 이 정도로 충만한 느낌을 받기는 어려우리만큼 차오르는 벅찬 감정이 완벽 바로 그 자체다. 누군가 말했다. 내가 모르는 좋은 음악이 있는데 못 들을까봐 늘 듣는 다고. 첨엔 그 말을 이해를 못했는데. 이젠 이해가 간다. 정말이지 내가 모르는 아름다운 음악이 존재하는데 못 듣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만큼 블루스에 흠벅 젖어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밤새는 줄 모른다더니 깨어 있는 모든 시간과 잠을 자면서도 블루스를 듣는다. 하여, 여기 블루스에 관한 정보를 옮겨 놓는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이 미국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블루스다.
블루스는 록의 뿌리이며 록은 미국 대중 음악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남부 미시시피 델타의 흑인 노예들에 의해 처음 생겨난 블루스는 머나먼 낯선 땅으로 끌려와 장시간 노동과 굶주림, 백인들의 멸시 등을 감내 해야만 했던 흑인들의 고통과 아픔이 만들어낸 음악이다.
블루스는 흑인음악의 여러 뿌리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미국역사가 빚어낸 진정한 미국의 음악이기도 하다

조상 대대로 노래와 춤에 젖어 살았던 흑인들은 블루스를 통해 자신들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았다.때로는 울분을 토하거나 분노에 절규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저 긴 한숨만 뱉어 내기도 했으며 더러는 작은 삶의 기쁨에 흠뻑 젖을 때도 있었다..블루스는 그들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나 다름 없었다..흑인들은 일상의 모든 시름을 덜어주는 블루스의 선율에서 큰 위안을 얻었고, 그저 자신들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블루스를 사랑했다.

맨처음 블루스는 단순한 음악이었다.
대개 열두마디에 가사는 세줄 정도였고 빠르기는 4분의 4박자가 일반적이었다..코드는 일정한 페턴대로 진행되었다
이는 아프리카의 단조로운 음악이 자연스레 어어진 것이기도 했지만 복잡한 형식을 발전시키기에는.. 너무나 열악했던 그들의 삶의 조건 탓이기도 했다
형식이 단순한 만큼 그 내용은 매우 직설적이었다

델타 블루스는 흑인들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다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Louis Amstrong, Benny Goodman, Duke Ellington 등이..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이 시기의 어번 블루스를 대표하는 거장들이며 이들은 후일 백인들의 블루스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이어 30년대에는.. 보다 쉽고 빠르며 경쾌한 리듬을 강조한 리듬 앤 블루스가 나타났다.
머디 워터스와 하울링 울프,존 리 후커,엘모어 제임스,비비 킹 등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의 전설적 스타들이 활약했던 것도 이 무렵이다. 그리고 50년대, 블루스는 록큰롤을 낳았다. 2차 대전을 전후해 블루스에서 떨어져 나온 리듬 앤 블루스가 백인들의 컨트리와 결합해 록큰롤 이라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다.흑과 백 두가지 요소 중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것은 물론 흑인 음악 쪽이었다..그러나 50년대 말 록큰롤의 열기가 식자 사람들은 블루스를 잊어버렸다.한층 대중적이었던 리듬 앤 블루스는 그럭저럭명맥을 유지했지만 본래의 블루스는 흑인들에게서조차 외면 당했다..블루스는 영국 그룹들이 몰려올 때까지 저만치 뒤편으로 밀려나 있어야 했다

록큰롤은 블루스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 받았다..그중에서도 펄펄 살아 움직이는 감정은 컨트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블루스가 록큰롤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이다.록큰롤이 등장하자마자 수많은 젊은이들을 대번에 사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블루스로부터 내려온 열정이 뭔가 시끄럽고 강렬한것을 원하고 있던 이들의 욕구를 그대로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한편 목화밭 노예들에서 비롯된 블루스는 기본적으로 소수의 가진 자들보다는 다수의 가난한 자들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음악이었고..그 시작은 함께 일하며 부르는 노동요였다..
록큰롤 역시 비록 컨트리의 여유로움에 가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분명 다수의 현실 불만에 근거한 음악이었고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충동이 담겨있었다.억압받는 자들의 음악 블루스로부터 물려 받은 이 전통은 이내 고정된 것에 대한 반항으로 바뀌어 갔다

때문에 모든 록 가수들에게 블루스는 자기 음악의 뿌리이다..거기에는 현재의 록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의 그 무엇.. 원초적인 질감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에릭 클랩튼은 블루스를 가리켜 '록의 충전용 배터리'라고 표현했
다.사실 그랬다.록은 언제나 그 기운이 떨어질 때는 블루스를 찾았다..60년대 후반은 록이 기억 속에서 블루스를 끄집어낸 첫번째 시점이었다.


68년이 되자 미국 사회는 점점 더 양극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60년대 초반부터 존재했던 사회의 모든 갈등이..이제는 한꺼번에 불거져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극단으로 미국을 몰아 가고 있었다.
그 중심축은 물론 세대 갈등이었다..젊은이와 기성 세대는 모든 문제에서 사사건건 첨예하게 맞붙었다.
나라 전체가 이들의 싸움으로 상처 투성이였다..젊은이들은 이제 기성 세대를 타도와 일소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피와 블랙 팬더는 이러한 극단을 가장 잘 상징했다.그러나 이제는 기성세대들도 만만치 않았다.기성 세대는 '사랑의 여름' 이후히피로 대표되는 체제 반항적인 청년 세력 전체를 잠재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보다 고도의 방식으로 젊은이들을 억누르려 하고 있었다...그러자 한때 완전 우위를 점할 듯 보였던 젊은이들은 조금씩 힘에서 밀리기 시작했다..기존의 벽은 생각만큼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들은 그 속에서 분노와 절망이라는 두개의 감정을 함께 느껴야 했다...이들은 상황을 타계할 강한 자극과 돌파구를 원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블루스 붐은 이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물론 그 이전에 브리티쉬 인베이젼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영국인의 침공' 이후 비로소 50년대 리듬 앤 블루스의 매력에 눈을 뜬 백인 젊은이들은..그 강렬한 에너지와 생생한 감정에 이끌려 점차 리듬 앤 블루스의 근원인 블루스까지 더듬어 올라갔다.
이들은 리듬 앤 블루스에 비해 훨씬 어두우면서도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좀더 순수하게 드러낸 블루스에 대번에 매료 되었다.
이제까지 어떤 음악도 이처럼 깊은 감정을 담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들은 블루스의 본고장인 남부와 시카고를 돌아다니며 흑인들의 블루스를 하나하나 배워 나갔고 점차 자신들의 감정을 블루스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록큰롤과 리듬 앤 블루스를 통해 흑인 음악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화 해냈던 백인들은 이제 흑인음악의 가장 오랜 전통인 블루스마저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할 줄 알게되었다


블루스는 이내 움직이는 세대 Moving Generation들의 음악이 되었다.
수많은 젊은이들, 특히 백인 청년들이 흑인음악인 블루스에 열광했고..이는 블루스의 부흥이라고까지 불렸다.
현실의 문제들에 짓눌려 있던 젊은이들은 블루스의 강렬한 사운드에 사로잡혔다.거기에는 폭발할 듯한 힘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절규가 있었다.
그것은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환각적인 무게와는 다른 것이었다..지극히 현실적이었고 강도는 더 높았다.
이들에게 블루스는 현실에 대한 모든 불만의 발상이자.. 기성 세대에 대한 강한 분노의 분출을 의미했다.
동시에 이들은 억압받는 이들의 음악 블루스에서 자신들이함께 하려는 다수의 절규를 느꼈다.
블루스에 실린 흑인 특유의 감성은 흑인민권운동을 지지하던 많은 백인 젊은이들에게도 자연스런 것이었다.
이제 블루스에 담긴 흑인 게토 청년의 절망은.. 바로 답답한 현실을 감내하고 있는 백인 청년의 그것과도 같았다..또 어떤 의미에서 블루스는 백인들에게 내재되어있는 흑인들에 대한 죄의식을 덜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블루스는 전쟁과 타락한 기성 세대들에게 찢기고 상처받은 젊은이들에게 가장 공감가는 음악이자 따뜻한 위안이었다


블루스 리바이벌 붐은 가히 폭발적이었다..수많은 백인 블루스 가수들이 등장해 인기를 얻었고 흑백이 혼합된 그룹들도 다수 생겨났다..
오랫동안 뒷전으로 밀려 있던 흑인 블루스의 거장들에게도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져..20여년간 흑인 상대의 값싼 무대만을 전전해 왔던 비비킹이나 존 리 후커, 머디워터스 등은 하루아침에 엄청난 출연료와 인기를 한 몸에 누리는 최고의 스타 대접을 받게 되었다..
68년 샌프란시스코 필모어 웨스트에서 백인 관중들이 객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렸던 킹의 공연은..5년전 그의 샌프란시스코 공연의 관객 95%가 흑인이었던 것과 비교해 그간의 세태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오히려 이 무렵 흑인들은 지난날 고통에서 뿌리내린 블루스 보다는 흑인의 정체성을 강조한 소울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이 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70년대가 시작되자마자 사이키델릭 블루스로 불린 지미 핸드릭스와 가장 뛰어난 백인 여성 블루스 싱어 제니스조플린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고.. 흑인 블루스를 지속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많은 가수들이 록으로 방향을 전환했다..때문에 백인 블루스에 비관적인 시각에서는 이 시기의 블루스 리바이벌이 주류 팝의 기교를 넘지 못했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68년 무렵의 블루스 리바이벌이 갖는 음악적,사회적의의에 대해서 만큼은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는 사람들에게 블루스를 록의 뿌리로서 처음으로 인식시켜 준 것이었으며 거기에는 60년대의 마지막 흐름으로서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한 60년대의 상황이 가장 압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첫번째 블루스 리바이벌 이후 모든 록 가수들은 한계에 부딪힐 적마다 뿌리찾기로서 블루스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ㅡ계속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