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블루스 그룹
그룹으로는 Canned Heat, MC5, CCR이 최고였다.로스엔젤레스의 캔드 히트는 블루스 리바이벌이 시작된 68년 무렵 최고의 인기 그룹이었다..
알란 윌슨과 봅 하이트가 주축이 된 5인조 캔드 히트는..Tommy Johnson의 28년도 곡에서 그룹 이름을 땄고 20년대 저그 밴드 스타일의 블루스를 그룹의 기초로 삼았다.
67년 데뷔작 < Canned Heat >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이들은 그 해 몬터레이 페스티발에서 가장 주목받는 그룹으로 떠올랐고, 이듬해인 68년 새 드러머 알프레도 피토를 영입한 뒤 두번째 앨범 < Boogie With Canned Heat >을 발표, 성공의 궤도에 올랐다.이 앨범 중 특히 Jim Olden의 곡을 리메이크한on The Road Again"은 윌슨의 여린 음성과 시타를 연상시키는 기타,가슴을 저미는 하모니카의 애잔함이 어우러져..많은 사랑을 받았다..
곧바로 발표한 이들의 2장짜리 앨범 < Living The Blues > ('68)는 이보다 더 훌륭했다.Charlie Patton의 리바이벌 곡 "Pony Boy"나 19분짜리 대곡 "Partheno genesis" 등은 사람들에게 블루스가 무엇인가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Henry Thomas의 "Bulldoze Blues"를 가사만 바꿔 부른 "Going Up The Country"도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시대 분위기를 타고..빌보드 11위까지 올랐다.
이들은 69년 두장의 앨범을 더 내놓았고.. 70년 윌슨이 약물과용 끝에 자살한 뒤에도 블루스의 한길을 고집하며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MC5는 블루스 밴드 가운데 가장 정치적이었다..이들은 첨예한 문제 의식과 기성 세대에 대한 맹공을 특징으로 했다..
모두 디트로이트 출신인 다섯명의 멤버들은 고교 동창 사이로 67년 존 싱클레어가 주축이 되어 그룹을 결성했다..하나같이 디트로이트의 빈민가 링컨 파크에서 살고있던 이들은 그해 여름의 디트로이트 흑인폭동이 만들어낸 그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룹 이름을 디트로이트의 별명인 자동차 도시 'Motor City'의 약자로 지은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블루스에 담긴 흑인들의 절규를 디트로이트의 유혈 사태로 구체화 시켰다...
이들의 음악에서는 시커먼 연기를 토해 내는 디트로이트의 굴뚝과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의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시끄러운 사운드와 사나운 전자음은 어딘지 모르게 기름때에 절은 듯 했고 공장의 그늘처럼 어둡고 음산했다.그리고 그 속에는 대규모 유혈 사태로 폭발했던 흑인들의 분노와 저항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자연 이들의 음악은 선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블루스에 강력한 록 사운드를 도입해 울부짖는 듯한 분노와 대중들을 휘어잡는 엄청난 힘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 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공연을 의식적인 선동의 장으로 삼았다.
증오와 폭력으로 가득 찬 이들의 무대는 마치 혁명 전야의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MC5는 끊임없이 젊은이들에게세상으로 뛰쳐나와..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관중들을 '동물 친구들'이라 불렀고 기타를 총처럼 부여잡고 노래를 했다.때로는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음란한 동작도 서슴지 않았다..마치 기존의 모든 가치를 철저히 파괴하려는 것 같았다
블랙 팬더에 맞먹는 백인 급진 단체 White Panther Party의 창당 발기인 이기도 했던 싱클레어는 스스로를 일컬어 '음악 게릴라'라 불렀고 "록이나 마약, 음란 행위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 기성문화를 파괴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공공연히 선언했다..
MC5는 이피의 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68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의 거리 투쟁에 참여해 "여러분, 저기 혁명의 소리가 들리십니까.혁명은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라며 정열적인 선동을 벌였다.
이들은 69년 첫 앨범 < Kick Out The James >를 발표했고 여기에서 블루스의 거장 존 리 후커의 "Motor City Is Burning"을 빌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을 한 줄로 표현했다.
"모든 도시가 불타고 있어.저 먼지 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사람은 바로 여러분!" 이것이 이들의 가장 명백한 외침이었다.
이에 대해 그들의 음반을 구입한 10만이 넘는 대중들이 가장 확실
한 지지를 보내 주었다..
MC5는 개인의 문제로 국한되어 있던 블루스의 분노를 정치적인 문제로 끌어 올렸고 여기에 록의 공격적인 사운드를 덧칠해 후
일 펑크와 헤비메탈의 기초를 닦았다
샌프란시스코의 CCR은 가장 60년대적인 감각으로 블루스를 복원해 냈다..
존(보컬)과 톰(베이스) 포거티 형제, 이들과 한동네 친구인 더그 클리포드(드럼), 스튜 쿡 (피아노) 4인으로 이루어진 CCR은..60년대 블루스 리바이벌의 가장 성공적인 밴드였다..
67년 데뷔한 이들은 첫 싱글 "Susie Q"가 골드 싱글을 기록한데 이어 69년 한 해 동안만 "Proud Mary", "Bad Moon Rising",
"Green River", "Down on The Corner" 등이.. 모두 백만장 이상의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으며 72년 6월 해산할 때까지 "Who Will Stop The Rain"('70)등 모두 14곡의 히트를 기록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순수한 결정체(블루스)를 부활시켜 내겠다는 신념(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을 뜻하는 그부 이름처럼..블루스 본래의 의미를 어느 정도 살리면서도 컨트리 색채가 강한 초기 록큰롤의 요소들을 적절히 배치해..경쾌한 리듬과 특유의 정서를 만들어 냈다.
부모의 불화와 가난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경험했던 존 포거티의 목소리에는 블루스의 끈끈함과 컨트리의 투박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으며..진한 여운을 남기는 일렉트릭 기타와 담백한 어쿠스틱 기타도 나무랄데 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단순한 블루스와 리드미컬한 쭉 뻗은 사운드는 CCR만의 독특한 매력이었다.뿐만 아니라 이들은 여기에 당시 젊은이들의 의식과 반전 메세지를 모나지 않게 담아냈다.
멤버들 중.. 존 포거티는 스스로 "나는 하층 계급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바라본다"고 공언할 만큼..첨예한 계급 의식의 소유자이기도 했다..우리나라에서는 흥겨운 댄스곡으로만 알려져 있는 "Proud Mary"도 실은 숨막히는 도시를 떠나 무념무상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당시 젊은이들의 생각을 반영한 곡이며..비오는 날 라디오의 단골 메뉴인 "Who Will Stop The Rain" 역시..미국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비의 이미지로 상징해 누가 이 비를 멈춰 줄지를 알 수 없다는 냉소를 표현한 곡이다..
또 "난 아냐,난 아냐,난 군대의 자식이 아냐" 라는 "Fortunate Son"에서는 반전의 메세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블루스와 컨트리의 조화, 거기에 적당한 정치 의식까지 겸비한 이들의 음악이야말로 블루스에 열광하던 당시 젊은이들의 구미에 가장 잘 맞는 음악이었다.CCR이 3년 반이라는 길지 않은 활동기간 동안 그처럼 폭넓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오묘한 절충 덕이었다.
그러나 이는 바꿔 말하면..이들의 음악은 백인들의 블루스 리바이벌이 블루스 본래의 순수함에서 벗어나..점차 록으로 탈바꿈해 가는 과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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