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Blues, Blues, Blues-이상의 시대 반항의 음악 (3)

monomomo 2003. 9. 18. 01:32







3) 오선지 밖의 목소리.....제니스 조플린



그러나 블루스 리바이벌 최고의 스타는 누가 뭐래도 제니스 조플린이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여장부로 이 시기뿐 아니라 미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여가수였다..
또 스물아홉이라는 길지 않은 생을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간 예술가이자 반역자이기도 했다.
조플린은 68년 타임 인터뷰에서 "나는 노래할 땐 마치 아주 강한 약을 먹은 듯한 기분이 된다"고 털어 놓았다.
이 말은 그가 이미 강한 약의 느낌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에게 노래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그는 무척이나 힘든 삶을 살았다.
미국에서도 유난히 보수적인 텍사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조플린은 어려서부터 별난 아이였다..
그림 그리기와 시를 좋아했으며 오데타와 레드벨리 같은 흑인 음악을 즐겨 들었다.그 자신의 말대로 "주말이면 남자애들과 어울려 영화 보러가고 콜라나 좋아하는 텍사스 여자 아이들" 속에서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는 또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 당했고 그럴수록 점점 더 자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조플린은 이때부터 이 세상에 기댈 곳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평생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그리고 점차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는 열여덟살이 되던 61년 고향을 떠나 휴스턴에서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5년간 여기저기 떠돌며 일하고 노래하는 그된 시절을 경험했다.
그는 이 기간동안 세상살이의 힘겨움과 더러움을 절감했고 세상이 점차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아예 저버리게 되었다..
희망을 버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더러운 세상을 저주하거나 술과 약물에 젖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 뿐이었다..
그의 말투는 점점 거칠어졌고 행동은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오직 노래만이 그가 완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66년 그는 블루스 밴드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에 가입하고 활동무대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그리고 이듬해 몬터레이 페스티발을 통해 조플린 신화의 막을 올렸다.그는 이제까지 미국인들이 익숙해 있던 백인 여가수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
존 바에즈나 주디 콜린스 등의 맑고 고운 소프라노, 아무리 달려봐야 그레이스 슬릭 같은 도발적인 음색이 여가수의 전부인 줄 여겼던 당시 사람들에게..조플린의 목소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갈라진 목소리에 절규와 비명, 다이나마이트 같은 엄청난 에너지는 도무지 여자 가수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몸 안의 모든 힘을 소진시켜 버리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헝클어진 긴 금발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대는 무대 위의 모습 역시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주 가끔 느린 블루스를 부를 때 보이는 육감적인 목소리와 몸놀림에서만..그가 여자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껍데기를 벗고 느껴보라"고 외쳤다.
그가 말하는 껍데기란 위선과 가식 뿐 아니라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도덕 관념이나 상식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갔다.
누구도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하고 싶은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자가 섹스를 언급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그의 노골적인 섹스 얘기는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여자가 말한다는 것 자체로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조플린은 이내 자유와 금지되지 않은 것,거침 없음의 상징이 되었다

조플린은 빅브라더에서 두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67년 데뷔작 <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 >와 이듬해 발표된 두 번째 앨범 < Cheap Thrills >모두 남의 곡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는 그의 능력이 단연 돋보인 작품들이었다..
특히 < Cheap Thrills >는 조플린의 마력이 가장 잘 드러난 걸작으로 그해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Piece Of My Heart"를 비롯하여.. George Gershwin 원작의 "Summer Time", 블루스의 거장 Big Mama Thornton의 리바이벌곡 "Ball And Chain" 등..나름함에서 대폭발에 이르는 조플린의 역량이 아무 거리낌 없이 드러나 있다.
그는 블루스를 통해 열정과 절망, 저항을 한꺼번에 표현했고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강력한 힘과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쾌락에 대한 갈망을 노골적으로 담아냈다..
이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가수였다

그러나 조플린은 대중 속에서 더욱 진한 고독을 느꼈다..
그는 "나는 무대에서 2만5천명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눈다.하지만 집으로 돌아갈땐 늘 혼자다"라는 말로 자신의 고독을 드러내곤 했다.
조플린은 그것이 자기 몰두가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임을 알지 못했다.그는 68년 빅 브라더를 탈퇴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사실 조플린은 다른 밴드의 여성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그 중요도에 걸맞는 위치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남성 위주의 록계에서 몇 안되는 여성 록 가수들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구조적인 문제였다.
그는 이에 대한 반발로 새로 조직한 Kozmic Blues Band를 자신의 백밴드로 한정했다.
그러나 빅브라더의 탈퇴는 그의 오판이었다.
빅브라더는 조플린의 중요한 특성인..설익은 아마추어리즘을 유지하도록 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극단을 누그러 뜨리고 악기와 선명한 대비를 이뤄 보컬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가 내놓은 솔로 앨범과 사후 발표된< Pearl > ('71)에 수록된 "Me And My Bobby McGee" 등에 나타난 그의 음악은 혼자서 현실에 맞서다 지친 나머지 이제는 타협을 생각하기 시작한 그의 변화를 느끼게 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극단적이었다.
조플린은 핸드릭스가 세상을 떠난지 며칠 후인 70년 10월 4일 할리우드의 한 호텔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해로인 과용 이었지만 실제 그의 죽음은 자살이나 다름 없었다.그가 벌였던 불안하고 즉흥적이며 이기적인 동시에 자기파괴적이었던 인생 게임의 종말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조플린은 음악과 인물이 같은 비중으로 중시되는 몇 안되는 록 스타다.
그는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갖은 반항과 대담한 실험을 통해 개인적인 자유와 문화 혁명을 꿈꿨던 당시 젊은이들의 역사와 신화를 상징했다.
또한 그는 남성 위주의 록계에서..성 해방까지 포괄하는 여성의 자유를 공개적으로 가시화 시켰으며 제한된 틀 안에서나마 기성사회의 성을 맹공한 페미니스트였다.
조플린은 남성과는 별도의 여성 록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어냈고 이후 모든 여성 록 가수들은 크게든 작게든 조플린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가 5년이라는 길지않은 기간동안 불꽃처럼 확 타올랐다 한 순간 사라지고서도 사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십년간 활동한 다른 가수들보다 더 많은 의의를 인정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