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Blues, Blues, Blues-이상의 시대 반항의 음악 (4)

monomomo 2003. 9. 19. 01:42







4) 신들린 운지.. 락의 3대 기타리스트

블루스 리바이벌이 록 음악에 미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영향은 일렉트릭 기타의 부상이다.
일렉트릭 기타는 물론 록큰롤 이래 대중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였다.그러나 블루스 리바이벌 이전까지는 전체 음악 속에서 다른 악기들과 함께 보컬을 받쳐주는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했다..
몇몇 뛰어난 기타리스트들이 있긴 했지만 다른 모든 요소를 압도할만한 비중을 지니지는못했다.
적어도 대중들에게까지 일렉트릭 기타의 엄청난 마력과 힘이 분명히 각인되고 기타리스트가 스타 대접을 받게 된 것은 블루스 리바이벌 부터이다.
블루스에 담긴 인간의 내적인 갈등과..현실에 대한 불만과 절규를 표현하는데 있어 일렉트릭 기타만한 악기가 없었기 때문이다.한번 그 중요성이 인식되고나자..어느 누구도 기타가 중심이 되지 않는 록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일렉트릭 기타의 주법과 사운드 기술도 대부분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시도되기 시작한 것들이다..
사이키델릭에서 블루스로 넘어가는 시기에 등장한 일렉트릭 기타의 제왕 지미 핸드릭스로부터 시작된 이 흐름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리듬 앤 블루스에서 갈라져나와..블루스 붐을 전후해 저마다의 기타 사운드를 일궈낸 3인의 기타리스트 Eric Clapton, Jeff Beck, Jimmy Page에 의해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은 후일 록의 3대 기타리스트로 불렸다



에릭 클랩튼은 3인 중 가장 블루스적이었다.
그는 인간 내면에 깃들인 고귀한 그 무엇에 대한 탄원을 연주의 첫번째 동기로 삼았고 백인으로서는 드물게 블루스에 내재된 고독과 분노,두려움,유머까지도 이해했다..
때문에 그를 빼놓고 블루스와 일릭트릭 기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클랩튼 개인의 음악 경력만 봐도 백인 블루스의 역사를 반 이상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개의 블루스 뮤지션들이 그렇듯 클랩튼의 어린 시절도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열여섯살난 소녀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외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가 또래 소년들과는 달리 어둡고 진한 블루스에 그토록 심취했던 것도 열네살 되던 생일 처음으로 선물 받은 기타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것도 마음붙일 곳을 찾고 있던 소년 시절의 심리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아마추어 밴드에서 실력을 닦은 클랩튼은 63년 리듬 앤 블루스 밴드 야드버즈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기타 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이때부터 이미 다른 악기를 압도하는 깊이와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대번에 야드버즈의 핵으로 떠올랐고.. 특유의 블루스 주법으로 인해 '슬로우 핸드'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야드버즈가 인기 절정이던 65년 18개월 만에 그룹을 떠났다..뼛속까지 블루스맨인 그로서는 리듬 앤 블루스로도 성이 차지않았기에.. 대중들의 기호를 쫓아가려는 다른 멤버들과는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클랩튼은 바로 영국 최고의 블루스 밴드 존 메이욜스 블루스 브레이커스를 거쳐 66년 진저 베이커(드럼), 잭 브루스(베이스) 와 함께 크림을 결성했다.
블루스 브레이커스에서 델타 블루스와 시카고 블루스로 단련된 그는 그제서야 비로소 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클랩튼은 음악적으로나 외적으로 강하고 거칠어져..무대에서는 늘 20여분 이상의 즉흥 연주를 즐겼고 벨벳과 가죽옷으로 악마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곤 했다.
과거와는 달리 격렬한 속주를 내세운 파격적인 음악을 펼쳤던 그는..이때 '기타의 신'이라는 두번째 별명을 얻었다.
크림은 클랩튼의 기타에 힘입어 68년 파워 넘치는 블루스록 "Sunshine Of Your Love"로 빅히트를 기록했으며 뒤이은 블루스 붐을 타고 가장 뛰어난 블루스 밴드 중의 하나로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크림은 그 해 걸작 < Wheels Of Fire >를 끝으로 해산했다..너무나 개성이 강했던 크림의 3인은 결코 쉽사리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사이였다.
이들은 음악적 견해 차이로 사사건건 충돌했고 마지막에 가서는 무대에서의 즉흥 연주조차 밴드의 음악이라기보다는..뛰어난 솔로의 각축 같은 인상마저 줄 정도였다.

크림 이후 클랩튼은 다시 예전의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밴드로서의 의미에 보다 충실한 Blind Faith를 결성했다..블라인드 페이스는 록사상 최초의 수퍼 그룹으로 클랩튼 외에..크림의 베이커, 트래픽 출신의 보컬리스트 스티브 윈우드, 페밀리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 등 하나같이 당대를 대표하는 실력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와일드 하면서도 어느정도의 상호 통제가 가능했고 데뷔 앨범 < Bline Faith > ('69)가 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릴만큼 대중적인 영향력도 엄청났다.
그러나 누구 못지않게 개성이 강했던 블라인드 페이스의 멤버들 역시.. 클랩튼의 의도와는 달리 1년도 채 못돼 크림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클랩튼은 이 짧은 기간 블라인드 페이스를 통해 블루스와 록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인도 라가와 재즈등 보다 다양한 음악들을 받아들였다.
멜로디는 한결 명료해졌고 노랫말의 의미도 이전에 비해 한층 중요하게 다뤄졌다.이 모든 경험들은 블라인드 페이스 해체 석달만에 듀언올맨 등과 결성한 Derek & Dominos의 명반 < Layla And Other Assorted Love Songs > ('70)에 이르러 나무랄데 없는 조화를 이루어냈다



제프 백은 클랩튼과 전혀 달랐다.
클랩튼이 블루스 적이었던데 반해 그는 훨씬 록에 가까왔고 클랩튼이 내면의 느낌을 살리는데 주력했던 반면 그는 여러가지 기술적 장치를 사용한 사운드의 실험에 치중했다.
클랩튼이 정적이고감성적이라면 백은 동적이고 이성적이었다

클랩튼의 뒤를 이어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가 된 백은 소리의 합성에 의한도전적이고 파괴력 넘치는 연주로 이내 클랩튼 못지않은 명성을 얻었다..
그는 기타리스트로는 처음으로 퍼즈톤을 사용했고.. 인도 음악의 요소도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
악기 파괴로 유명했던 The Who에 앞서 기타를 부수는 파격을 연출했던 것도 바로 그였다.
야드버즈는 백의 공격적인 기타를 앞세워 그룹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

66년말 야드버즈를 떠난 백은 이듬해 백 밴드 성격의 제프백 그룹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솔로 활동에 나서 < Hi-Ho Silver Lining > ('68) 등 두어곡의 히트 싱글을 냈다.
그러나 그는 얼마지 않아 자신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깨달았다.그는 탁월한 기타리스트이긴 했지만..팝 스타가 될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노래와 반주 등 여느 밴드의 기타리스트들과 다를 바 없었던 이제까지의 활동 방식에서 벗어나..오직 기타 하나에만 매달렸다
제프백 그룹의 다른 멤버들에게 보다 많은 재량권을 주고 자신의 역할은 기타로 한정시켰다..
그가 3대 기타리스트 중 가장 혁신적이었으면서도 대중적인 지명도에서는 가장 처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백은 68년 후일 자신을 능가할 정도의 명성을 얻게 되는 로드 스튜어트(보컬)와 론 우드(베이스), 드러머인 미키 윌러, 건반주자 닉 홉킨스와 함께 미국 투어에 나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어 첫 앨범 < Truth >를 발매했다.
그의 음악은 야드버즈 시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실험적이었지만 그 사운드는 한층 세련되었고 특유의 파격적인 기타 연주 또한 완숙미를 물씬 풍겼다..
그는 오직 연주 실력하나만으로 대중을 사로 잡았던 거의 유일한 기타리스트였다..
백은 69년 스튜어트와 윈우드가 페이시스로 떠난 뒤에도.. 멤버를 교체해 제프백 그룹을 이끌었으며 73년 이후로는 비록 드문드문이긴 해도 자신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작품들로..세계에서 가장 실력있는 기타리스트로서의 입지를 더욱확고히 다졌다.



지미 페이지는 이들과 또 달랐다.
클랩튼 보다는 록의 느낌이 강했지만 백 보다는 블루스적이었다.그렇다고 둘 사이의 절충도 아니었다.
페이지에게는 클랩튼이나 백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정열과 균형이 있었다.
그는 안으로 잦아드는 클랩튼이나 공격적인 실험주의자 백과는 다른 뜨거운 감정으로 스테이지를 달구었으며 절제 속에서도 현란함을 잃지 않았다.
세사람 중 가장 뒤늦게 출발한 그가 일렉트릭 기타의 황금기인 70년대에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대접받게 된 데에는 이러한 그의 특성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일찌감치 세션 기타리스트가 된 그는 야드버즈 가입 이전부터 영국내에서는 실력파로 이름이 높았다..
일설에 의하면 63년부터 65년 사이에 영국에서 발매된 음반의 절반 이상이 그의 연주였다고도 하는데 알려진 것만도 The Who의 < I Can't Explain > ('65), Them의 < Gloria > ('65) 등이 있고 이밖에 킹크스, 롤링 스톤즈, 허먼스 허미츠 등의 음반에도 참여했다.

페이지는 66년 야드버즈에 베이스 주자로 가입했고 얼마뒤 백과 함께 록 그룹 사상 최초의 더블 리드기타를 맡게 되었다.
백과 페이지 두사람의 연주는물과 불 같았다..
양쪽 다 파괴적이고 힘이 넘쳤으나 백의 연주가 차갑고 이지적이었던 반면 페이지의 연주는 타는 듯이 뜨겁고 감정적이었다.
두사람의 묘한 대조와 배가된 힘은 이후 모든 록 그룹들에게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애초부터 스타일이 달랐던 두사람은 자주 부딪쳤고 6개월 뒤 미국 투어중 백이 그룹을 탈퇴하면서 짧았던 관계도 끝나 버렸다 (페이지는 후일 제프백 그룹의 곡 "Beck's Bolero"에 세션맨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페이지는 이후 야드버즈의 리드 기타로..68년 7월 밴드가 해산될 때까지 활동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석달 뒤 그는 로버트 플랜트와 존 폴 존스,존 본헴과 함께 70년대 최고의 록 그룹 Led Zeppelin을 결성했다.
페이지의 신들린듯한 현란함은 "Whole Lotta Love" ('69)에서처럼 보다 강하고 고도로 증폭된 사운드를 지향했던 레드 제플린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이후 헤비메탈이라는 용어가 생겨나면서 그의 연주는 헤비메탈의 상징처럼 되었다...
페이지는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마지막 스타였던 동시에..70년대 헤비메탈 기타리스트의 원조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