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자끄.

monomomo 2007. 6. 7. 17:25

 *어느 해,

  삶이 죽음보다 더 힘들다고 느껴지던 시간을 죽이기 위해 필사를 한 책이다.

 

 

 

 

 

쟈끄

 

Jean Grener

 

 

 

 

 

함유선 옮김

 

 

 

 

 

 

 

 

.하

 

 

 

 

옮긴이의 글.

 

삶의 의미를 찾아서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새삼스럽게 그리니에식의 물음을 던져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되풀이해서 묻는다. 아니 적어도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비좁은 현재의 모습을 돌이켜본다.

 

<인간은 자신이 낙관론자라야 할지, 비관론자라 할지 질문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그는 죽는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서양 삼나무는 들판의 꽃보다, 코끼리는 곤충보다 더 오래 산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이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세기를 살도록 운명 지워진 자에게는 한 세기가 단 하루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루살이에게는 가장 오랜 삶에 버금가는 완벽하게 채워진 하루가 있을 것이다.>

그리니에는 <불행한 존재>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태어난 이상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 이전에, 이처럼 <완벽하게 채울> 필요가 있는 우리의 삶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삶을 완벽하게 채우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차피 죽는 것이다.

 

<하루 해가 저물어 갈 무렵에,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두 눈은 나무들을 응시한 채, 나는 갑자기 꽃들이 시들어 버리고 지탱하는 힘이 없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늘이 퇴색해 버리고 땅도 흔들거리다니! 완만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이 썩은 세계가 슬며시 미끄러져 가고 이윽고 심연 속으로 무너져 버린다. 구토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 얼마나 씁쓸한 쾌락인가.  그 이후로 이 현기증 나는 허무감은 나에게서 더 이상 떠나지 않았다.>

 

그의 첫 작품인 <쟈끄>에서, 그르니에가 말하는 현기증 나는 이 허무감이 곧 그르니에에게서 일생 동안 떠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이 허무감은 인간은 죽는다라는, 생명이 있는 것들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깨닫게 되는 그르니에에의,  허무에 대한, <공의 매혹>인 것이다. 그것은 <숨이 막히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허위>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을, 그러므로, 그르니에는 <많은 사물들에 대한 이 집착,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 집착, 이 힘이 무한한 것처럼 여겨지는 이 사랑, 이 사랑조차도 하나의 허울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하나의 허울에 지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허울뿐인 사랑 그것임을 강조한다.>

 

<쟈끄>는 루이 기유가 말한 대로, 그르니에의 모든 작품의 모태가 되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부르따뉴 지방의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그의 앞에 광막하게 펼쳐져 있는 바다와, 그 바다가 만들어 놓은 섬세한 물결 무늬들을 보면서, 누군가가 죽음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그의 지붕 밑 다락방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이 작품에는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 가지로, 그의 특유의 섬세한 문체와 명상적인 언어, 그리고 공의 매혹과 침묵의 소리가 담겨 있다. 그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아름답고 섬세한 문체로, 물이 흘러 가듯이, 장미꽃이 어느 날 그 꽃잎을 열어 보이듯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를 우리의 존재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나의 몸과, 그 옆에 누워 있는 너의 몸까지도, 지상의 모든 몸들이 사라져 없어질 그 어느 순간을 이야기한다.

 그르니에가 아주 일찌감치 작가가 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는 끝까지 작가로 남을 것을 원했다.

 글쓰기는 그에게 커다란 위안을 안겨 주었다. 곧 그에게 삶을 허락해 주는 행위이다. 물론 그는 그의 작품이 읽혀진다는 사실 때문에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글을 쓴다는 즐거움 때문에 글을 쓴 것이다. 그래서 <속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꿈인 것 같기도 한, 그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는 듯한, 무엇보다도 명상적이고 흔히는 노트에 가깝게 여겨지는 그의 작품의 문체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쟝 그르니에와 함께 그 의 영혼의 노래를 듣는다.

 

 

 

 

                                                    1992년 6월

 

                                                                함 유선

 

 

 

 

 

서문

 

쟝 그르니에와의 첫 만남.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철학의 위상을 마련 해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공간적인 거리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라고 그는 어느 글에선가 말했다.

 

ㅡ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그에게 물었다.

 

ㅡ그 어디에도 없다.하고 그는 대답했다.

 

나는 예전에도 친구가 많이 있는 편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친구가 많이 있다. 하지만 쟝 그르니에만큼은 내 일생을 통하여 아주 만나기 힘든 예외적인 친구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1917년 여름이었다. 그는 그때 열 아홉 살이었고, 이미 철학사 학위를 받은 직후였다. 나는 열 여덟 살이었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긴 했지만 우리가 서로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의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없다. 분명 우리는 같은 계급 사회에 속해 있지 않았었다. 그 당시에는 사회적인 차별이란 것이 아마 오늘날보다도 훨씬 더 절대적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니에는 쌩-쌰를르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명문으로 정평이 나 있는 종교 학교였다. 나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만일 그 도시에 시립 도서관이라는 것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우리가 서로를 만날 수 있는 기회란 결코 없었으리라. 그 도서관은 일주일에 두 번, 목요일과 일요일 오후에만 문을 열었다. 도서관에는 언제나 결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느 목요일 오후에 나는 일주일 전에 빌려 갔던 책들을 반납하려고 그 도서관에 갔다. 그 때 오로지 한 사람만이 도서관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도서관 사서가 있는 유리 칸막이로 된 작은 사무실에서 두어 걸음 떨어져 있는 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도서관 사서는 늙은 역사학 교수였는데 그 자료 카드에 고개를 수그리고 얼굴 한 번 들지 않고 열심히 뒤적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지만 둘 다 전쟁에 나가서 전사했다. 그가 두 아들을 잃고 난 이후 그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우 가까이 앉아 있던 젊은 남자는 내가 책들을 건네 주면서 사서와 어쩔 수 없이 주고 받게 되는 몇 마디 말을 듣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올 때 나는 그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내게로 다가와서 도서관 사서와 내가 주고 받는 말을 본의 아니게 엿들었노라고 변명하듯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곧바로 도서관 사서가 그의 새장과도 같은 작은 사무실에서 뛰쳐나와서는 우리 두 사람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도서관은 휴게실이 아니예욧>하면서 그는 우리에게 소리를 쳤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쏜 살같이 그 곳을 빠져 나왔다.

 

! 얼마나 행복하고 다행스러운 질책인가!

 

우리는 곧장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바다를 향해서 떠났다.

 

그때는 오후 두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자리에서 우리는 중요하고 심각되는 모든 문제들, 예컨데 신의 문제, 전쟁의 문제, 혁명의 문제, 사랑의 문제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나며 지내던 어느 날, 우리는 플레르몽에 있는 철학자 쥘 르끼에 <Jules Lequerㅡ(1814~1862)프랑스 철학자. 프랑스 네오크리티시즘의 선구자로, 그에게 인간의 자유의 문제는 기독교적인 선입관과 관련되어 있다. 그의 사후 1865년에 출판된 저서<최초의 진리 탐구<Recherche D’une Premi’re Ve’rite>가 있다>  말년에 그의 삶의 마지막 몇 해를 보냈다는 집을 보러 갔었던 것 같다. 그 곳에서 지내던 어느 날 신이 그를 살리고 싶으면 구제해 주리라고 생각하면서 르끼에는 바다에 몸을 던지고 대양을 향해서 헤엄쳐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다음날인 해안 경비원들은 해안가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는 악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의 최초의 진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산책을 하고 돌아 오는 길에, 우리는 쌩-미셸광장에 있는 어떤 집 앞에 멈추었는데, 그 집 문 앞에는 28번지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가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이었다. 그는 나에게 들어 오라고 했고, 그리고 간단히 먹을 것을 대접했다. 우리는 헤어지면서 다음날 오후 두 시에 프로느나드의 큰길 위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쌩 브리왹에서 우리가 프로므나드를 우리의 공원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바로 이렇게 만나게 되면서였다.

 

 며칠이 지난 후에 그는 나를 만나러, 떼아트르 광장에 있는, 내가 아버지와 살고 있던 집의 지붕 밑 다락방으로 왔었다. 바로 그때부터,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서로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붙어 다녔다. 그도 또한 쌩-미셸 광장에 있는 그의 집의 지붕 밑 다락방에서 살고 있었다. 바로 그 다락방에서 그는 유년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의 방에서는 아주 가까이 있는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데, 그는 이따금 그 소리에 투덜거리곤 했다. 그 방의 창을 통해서 높은 돌담으로 둘러 싸인 아주 작은 정원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 정원 한가운데에는 부재 종려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창문 바로 아래에 놓여 있는 그의 책상 위에는 언제나 꽃들이 있었다. 대개는 장미꽃이었는데, 그는 창가에 그 꽃잎들이 흩어지도록 내버려두곤 했다. 바로 그 책상 위에서 그가 처음으로 글을 쓰게 되었고,<신의 존재와 도덕의 원리-Existence de Dieuet le fondement de la morale>에 대한 소 논문을 시작 하게 된 곳이다. 그 논문에는 1917년 10월 4일이라고 날짜가 적혀 있었고, 철학사 쟝 샤를르 그르니에라고 싸인이 되어있었다.

 

그르니에의 부모님은 빠리의 가샹디30번지 3호에 아파트 한 채를 세내어서, 그가 대학에 진학해서 학업을 계속하며 지낼 수 있게 하셨다. 1919년에 나도 또한 빠리에서 지내게 되어서 나는 바로 그 집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빠리의 근교의 빠씨에 있는 제르쏭학교의 자습 감독으로 있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우리는 서로 서둘러서 쌩-브리윅에 다시 가곤 했다. 우리는 언제나 그곳에서 예전에 누렸던 꼭 같은 환희와 더불어 더욱더 커다란 자유를 만끽하는 우리를 발견하곤 했다. 대처에 나가 살게 되면서 우리의 작은 도시를 얕잡아보게 되었으면서도 그랬다.

 어느 해에 그가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처음부터 브르따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이해하기 힘든 그런 사랑이었다. 그는 <켈트 족의 고통-mal celtique>에 대해서 말했었는데, 그는 빌리에 <Villierers de L’Isle –Adam=프랑스의 작가(1838-1899).쌩-브리윅 출생.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 말라르메에게 영향을 끼침. 대표작으로는 <악셀=Axel>이 있다.> 의 운명과 트리스땅 꼬르비에르<Tristan Corbier-아두아르 죠아심 꼬르비에르=Edouard Joachim Corbie’re를 말함. 프랑스의 시인(1845-1875). 대표 시집으로 <노란 사랑=Les Amoours jaunes>이 있다.> 의 운명, 특히 그가 그 작품들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있던 쥘 르끼에의 운명에서 그 고통의 실체를 보았던 것이다.

 

 <쟈끄>는 그의 작품 중에서 소위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다. 내가 보기에 이 작품에서는 그가 계속해서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작품들의 모태가 되는 점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끄>에는 우리가 그의 아름다운 산문인 <섬>에서 깨달을 수 있었던 것과 똑 같은 울림이 있고, 똑 같은 목소리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태양을, 찬란히 빛나는 태양을 숭배한다>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모든 사물들이 이처럼 특별한 그리고 보편적인 섬광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다. <공-vide>이 그토록 빛날 수 있다는 것이 어찌된 일인가?>

 

 <쟈끄>는 분명 1927년과 1923년 사이에, 쌩 미셸 광장에 있던 그의 작은 다락방에서 쓰여졌다. 그 작품은 이미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작품은 그 의식 밑 바탕을 이루고 있는 명백한 사실들에 맞서고 있는 어떤 투쟁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고, 그 책의 모든 가치를 문화에 부여하고 있다. 찬란히 빛나는 이 세상의 신비는 다만 하나의 외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아! 내가 죽음에 눈을 뜨면서 내지르는 그 외침! 빨리 달아나자, 피하자, 나는 두렵다……네 나라에서, 네 고향에 있으면서, 네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도, 네 자신에게서도, 아무리 해도 없어지지 않을 이 얼마나 엄청난 고독감인가! 죽음과 영원히 화해 할 수 없는, 유일한 단 하나의 죄악, 이 죄악 앞에서 이 얼마나 끔찍한 공포인가!> 1933년에 출판된 <섬>을 다시 읽으면서, <쟈끄>와 비교해 볼 때, 우리는 <공의 매혹=L’attrait du vide>이라고 이름 붙인 <섬>의 첫 페이지부터 <쟈끄>와 똑 같은 테마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보리수 나무 그늘 아래 길게 누워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하늘이 갑자기 기우뚱 하더니 그대로 허공 속으로 삼켜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무<無>에 대해서 처음 느낀 인상이었다. 그 인상은 어떤 풍요롭고 충만한 실존의 인상에 바로 뒤이어 느껴진 만큼 더욱더 생생한 것이었다. 그 이후 나는 왜 한 가지가 또 다른 한 가지에 뒤이어 나타나는가 그 이유를 알려고 했다. 자신들의 마음과 몸으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능으로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하여, 나는 이것이 소위 철학자들이 <악의 문제>라고 하는 것과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 하였다>

 그 페이지는 이렇게 글을 마치고 있다. <나는 그저 살아간다는 사실보다는 차라리 왜 우리가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그런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어쨌든 나는 그 “주변”에서 살아야 했다.>

 

 알베르 까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제리의 알제 고등학교에서 그르니에의 철학 수업을 들은 그의 제자였다. 스승과 제자는 친구가 되었고, 그렇게 오랫동안 그 관계는 유지했다. 까뮈는 스승인 그르니에에 대해서 아주 커다란 애정을 지니고 말하곤 했다. 까뮈는 그르니에를 <선각자> 또는 <훌륭한 스승>이라고 지칭했다. <훌륭한 스승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묻곤 했다. <쟈끄>를 읽는 독자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알베르 까뮈가 <섬>에 부친 서문을 읽는 것이 아닐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섬>은. 까뮈가 그 서문에서 이야기 하듯이 <섬>을 처음 읽었을 때 그 책으로부터 받은 아찔함과 <훌륭한 스승>의 사상이 갖고 있는 중요성을 결정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까뮈는 <지상의 양식>이 한 세대에 걸쳐 끼친 그 충격에 비교한 것보다도 더 잘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아찔함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아찔함은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한 세대에 걸쳐 끼친 그 충격과 견주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섬>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계시는 그와는 다른 종류였다……<지상의 양식>이 행복의 초대장을 들고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우리에게는 좀더 세심한 스승이 필요했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을 사랑하는 한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 흉내 낼 수 없는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다. 겉으로 보기에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기는 하나 곧 스러질 수밖에 없으며 그리고 또한 절망적으로 그 모습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지상의 양식>은 이십 년이 걸려서야 감동시킬 대중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독자들이 이 책에 다가 올 시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 새로운 독자들 중의 한 사람이고 싶다. 나는 다시 그날 저녁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거리에서 이 작은 책을 펼치고 나서 겨우 처음 몇 줄을 읽어 보고 다시 덮고는 가슴에 꼭 끌어 안고 아무도 보지 않은 곳에서 정신 없이 읽기 위해 내 방까지 달려 왔던 그날 저녁으로. 그리고 나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책을 열어 보게 되는 저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을 너무나도 열렬히 부러워한다.>

 

                                              루이 기유-Louis Guilloux

 

루이 기유-Louis Guilloux 프랑스의 작가(1899-1980) 쌩-브리왹 출생. 사회주의 투사인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쌩-브리왹 고등학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열 일곱살에 쟝 그르니에를 만나 친구가 된다. <꿈속의 빵- le Pain des reves>으로 1942년 민중주의상을 받았다.

 

 

 

 

머리말

 

 

지나가 버린 시간에의 탐구

 

 

 

<자끄>의 초고는 1921년과 1923년 사이에 쓰여졌는데, 젊은날의 자서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이 소설은 약간은 신비스러운 흔적이 남아 있는 어떤 고백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을 펼치면 처음부터 독자는 어떤 복잡한 거울 놀이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쟝 그르니에는 자신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데, 우선 이 책이 영국에서 < 길 잃은 아이들-The Lost Childern> 이라는 제목으로 출판 된 것이고 그 작가는 잉게 이고, 이 책의 프랑스어 번역자는 지, 쎄, 제. 라고 하는 최초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자신이 쓴 원고의 번역자로 자신을 내세우다니, 한참 젊은 작가의 이 얼마나 놀라운 간격 효과인가!

 이러한 이중성의 놀이는 <자끄>에서도 계속된다. 왜냐하면 이 브르띠뉴의 청년과 <나je> 라고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쟝 그르니에 자신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래톱에 나오는 젊은이들, <에띠엔느-Etienne>와 <자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인물들의 성격과 가족 상황은 그르니에 자신의 전기와 아주 비슷한 어떤 유사성을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죽음 또는 사라짐이 그렇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점잖게 아저씨의 죽음 또는 사라짐이다.

 

 출판되지 않은 채로 있던 <자끄>는 사실상 <모래톱>을 아주 요약해서 쓴 듯한, 밑그림이 되는 작품이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그린 자전적인 이야기, 일종의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찾으려는, 곧 <지나가버린 시간에의 탐구exploration du temps passe’>, 그러니까 추억과 픽션이 혼합되어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쟝 그르니에는 아주 일찌감치 작가가 될 것을 포기해 버린 것처럼 보인다. <모든 형태는 다 훌륭하다. 시, 희곡, 철학, 소설, 그 어느 것이든지-모래톱에서> 라고 말하면서, 이처럼 어떤 문학 장르ㅡ모든 다른 것들을 배제해 버릴 수도 있을ㅡ 도 거부하고 나서, 그의 책들에서 드러나는 그 자신의 독특한 문체가 생겨난 것이다. 속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꿈인 것 같기도 한, 그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는 듯한, 무엇보다도 명상적이고 흔히는 노트에 가깝게 여겨지는 그의 작품의 독특한 문체가 생겨난 것이다. 오로지 본질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것일 뿐 아무 일도 없는 그런 책들만을 쓰기를 원하는 것,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도박인 것이다.

 

 그르니에가 앞으로 쓸 속내 이야기의 싹인 <자끄>는 글 쓰기가 그르니에 자신에게 얼마나 일찌감치 어려운 하나의 시도인 것처럼 나타났는지를 이미 증명하고 있다. 결국 그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 어려운 시도에 자신을 내 맡길 수 가 없었다는 것도 또한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때때로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곤 했는데ㅡ그 게으름은 그의 전기를 검토해 보면 놀랍게도 눈에 자주 띠는 것이다ㅡ 그 게으름이란 다만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정말로 그 어떤 사람보다 더 느리거나 둔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나는 그 언저리에 있었던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 순간마다 언제나 정신이 얽매이지 않은 어떤 상태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문학적인 작업이 무엇인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한가로움이라고 말할 그런 상태를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순수한 공기를,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바다를 갈망한다. 그러한 정신의 휴식이야말로 나에게 있어서 곧 삶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삶인 것은 결국 나에게는 불안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진정한 삶이란 또한 삶의 부재에 결코 이르지 못하면서도 삶의 부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삶이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 쓰기 작업을 통해서 절대를 찾아가는 탐색의 행위가 진리에 사로잡힌, 감수성이 예민한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친구였던 조르쥬 뻬로스는 그르니에를 미모사 꽃과 비교를 한 적이 있다. <누군가 그 꽃에게 다가가면 제 모습과 제 빛깔을 되찾는 미모사.> 언제나 상처를 입는 사람에게 삶의 사회적인 측면은 흔히 하나의 시련으로 여겨질 수 있다.

 

 <자끄>는 쟝 그르니에에의 꿈꾸고 있는 영혼의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첫 페이지에서부터 브르따뉴의 자연과 기후의 영향력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그가 지중해의 여행 속으로 도피할 그런 자연과 기후를.

 <결코 끝이 없을 것 같은,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그 바다에서 정신은 어떤 한계도 만들어 놓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서 나는 쟈끄의 내밀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정의 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고통을 본다. 밀물과 썰물이 쉬지도 않고 밀려왔다가 가고 하는 그 흔들림, 가장 어리석은 모험에의 그 호소도 상관하지 않는 그 흔들림은 매 순간마다 던져지고 매 순간마다 죽음에 바쳐지면서 그의 영혼 속에서 오로지 나 혼자만이 들었던 탄식에 대한 어떤 향수를 짙게 했다.>

 우리는 나중에 그의 작품 속에서, 그의 마음 속에서와 같이 인간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고독의 요구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또한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절대 시간의 섬광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을 확인 하게 될 것이다.

 

 

 

 

 

 

                                            미레이유 기유모 Mireille Guillemot

 

 

 

  

 

옮긴이의 글

 

 

 

 

<쟈끄>는 1918년 영국에서 <길 잃은 아이들>이란 제목으로 출판 되었다. 작가인 잉게 W.D.Inge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이었다. 작가는 1900년에서 1904년까지 브르따뉴에서 젊은 시절의 한 때를 보냈었다.

 

 

 

<길 잃은 아이들>은 영국에서 대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이 책의 초판으로 번역을 하기 시작한 후에, 우리는 우리에게 더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제 6판<1923 Methuen>과 비교하면서 이 텍스트를 다시 보았다.

 

 

 

 

 

 

         J . C . G .          쟝 샤를르 그르니에

 

 

 

 

*이 글은 작가인 쟝 그르니에가 자신의 작품을 영국 작가 잉게가 쓰고 마치 자신은 번역자인 것처럼 가장하고 쓴 <옮긴이의 글>이다.

 

 

 

쟈끄

 

*****

 

 네가 어디론가 사라진 지 8년이 되었다. 너는 죽은 것이 아니다. 너는 사라진 것이다. 그 전쟁으로 인해서 너의 영웅적 허영심은 끝까지 부추겨질 것이다. 나는 그러한 보잘 것 없는, 작은 성공에 대해 침묵을 지킬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네가 완성한 성공을 인정할 때, 나는 다만 신념도 없고, 절망도 없고, 열정도 없어 보이는 네 말없는 웃음의 의도만을 볼 뿐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어를 보았던 그때, 네 얼굴은 너무나도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지난 여름에 나는 여러 해 동안 우리가 함께 청춘기를 보냈던 그 쌩 쎄르방 학교에 다시 한번 찾아갔다. 마로니에 나무의 퇴색해 버린 듯한 향기는 너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로 네 자신을 되살려 내는 듯 했다. 그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 너는 언제나 나에게 부재해 있으면서 동시에 존재해 있다니. 내가 너를 생각하거나 또는 너에게 말을 걸 때, 어떤 황홀함 분위기가 끊임 없이 만들어졌다가 다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리고 얼마나 짙은 암흑이 찾아오는지 알 수가 없다. 결코 그 자체로는 표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는 모든 사람들도 결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향한 그리움으로 목이 마를 정도였고, 너는 내 꿈의 휘장을 만들었다가 다시 흐트려 놓았다. 그 어떤 음악으로도 너는 나의 가장 공허한 권태를 잠재우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그 꿈은 너의 생각을 바꿔 놓지 못했다. 어느 한 순간에, 너의 지성은 눈부신 이미지 속에서 모든 것을 밝게 비추었고, 그리고 나서 그 베일은 다시 땅에 떨어졌다. 너는 다만 네 신비로움의 자리를 바꾸게 했을 뿐이었다. 그 신비로움은 너의 지성의 이쪽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떤 솟구침, 기원의 노래 소리……마치 어여쁜 아가씨들처럼, 마음은 샘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내가 네게서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샘물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순수한 거울이 아닌 마음 속에서, 자연을 아주 생생하게 되찾는 것이다. 수액을 마시려고 그 광경을 내버려두는 것이다. 존재의 투영된 모습보다 존재의 단순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의 탄생 속에서 그 존재를 끓어 안지 않는다면 존재의 흐름 속에서 그를 설명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가 갖고 있는 노예 근성의 상징인 이러한 비겁한 인식보다는 우리의 해방을 예고해 주는 이 무모한 무지를 네가 더욱 선호했으리라는 것을 지금 나는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평지를 향해서 내려 올 때, 그때부터 나는 너 스스로를 향한 내향성 속에 빠져 있는 너의 모습에 만족할 것이다. 언제까지나 경멸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세계와 언제까지나 닫혀져 있는 또 하나의 세계, 그 두 세계를 가르고 있는 무너질 듯한 산마루 위에서 네가 너의 영원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나는 고통스럽게 보고 있다.

 

*****

 

 <그것은 하나의 놀이가 아니던가, 어쩌면 불가능한 하나의 도박이 아니던가? 내가 보고, 만지고, 사랑하는 이 세계, 나를 절망에 빠뜨리는 이 세계, 내가 살았고 이윽고 어느 날엔가 죽어 없어지고 말 이 세계는? 내가 어렸을 적에 나는 누군가 내 잠을 깨우려고 어깨를 툭 쳐 주기를 기대하곤 했었다. 나는 이미 웃음을 터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놀이였는지 모른다.

 

 새벽 다섯 시에 나는 수탉들이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사물이 빛에 낱낱이 드러나 있어서 완전한 행복 속에 잠겨 있는 하나의 정원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재가 영원토록 사랑과 짝을 이루는 어떤 정원을 상상하고 있었다.

 

 하루 해가 저물어 갈 무렵에,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두 눈을 나무들을 똑바로 응시한 채, 나는 갑자기 꽃들이 시들어 버리고 지탱하는 힘이 없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늘이 퇴색해 버리고 땅도 흔들거리다니! 완만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이 썩은 세계가 슬며시 미끄러져 가고 이윽고 심연 속으로 무너져 버린다. 구토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 얼마나 씁쓸한 쾌락인가. 그 이후로 이 현기증 나는 허무감을 나에게서 더 이상 떠나지 않았다.

 

*****

 

 <나는 태양을 숭배한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였던 내가 먼지가 뽀얗게 쌓인 언덕길을 걸어 갔을 때, 하얗게 빛나는 길, 먼지의 회오리 바람, 내 살갗의 끈적끈적함, 사물들의 보편적인 광채, 이 모든 것이 나를 불안으로 꽉 찬 어떤 마비 상태로 빠트렸다. 나는 숨이 막히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허위 밑에서 몸부림쳤다. 공<空> 이라는 것이 그토록 빛날 수 있다니 어찌된 일인가? 나는 두려웠고 그래서 그러한 움푹 패인 단일성이라는 화덕 속에서 내가 녹아 버리듯 없어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장마철에는, 다 해진 검은 장막 사이로, 오래된 살롱의 말없는 유리창 사이로, 꼬박 몇 주일 동안을 여전히 처마에서는 물을 흘러내릴 것이고 그러면 나의 할머니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나는 백 번도 더 읽은 어떤 책에 이마를 대고 있고, 그리고 나는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내 밑으로 나 자신이 미끄러지는 것을 느꼈다. 저녁의 어둠이 점점 뚜렷하게 유령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 할 때까지 나는 그렇게 나르는 이 양탄자를 가르는 것을 원했었는지 모른다. 쥐 한 마리, 쥐 한 마리라고? 나는 당신에게 쥐 한 마리가 있다고 이야기 한다. 아니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

 

 <하늘이 낮게 내려 온 듯한 어느 날 나의 할머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묘지로 데리고 가셨다. 나는 그 때의 황량했던 깊은 슬픔을 기억하고 있다. 내 발 밑에서 자갈들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고 있고, 꽃들에게 물을 뿌리려고 물을 퍼 올리는 펌프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무덤 앞의 묘석들은 가랑비를 맞아 반짝거리고 있다. <저기 있는 네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렴.> 하지만 바로 그날 내 마음 속에서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그것, 그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남겨 두고 가버린다는 것인가? 어머니는 나를 남겨 놓고 가버리셨다, 어머니가 사랑하셨던 나를, 나는 나의 쾌락과 나의 비통을 이루는 허울뿐인 이 세계에서 나를 떼어 놓아야 할 것이다. 나도 또한 하나의 허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많은 사물들에 대한 이 집착,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집착, 그 힘이 무한할 것처럼 여겨지는 이 사랑, 이 사랑조차도 하나의 허울인 것이다.

 유령인 나는 유령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아, 죽음에 눈을 뜨면서 내가 내지르는 그 외침! 빨리 달려가자, 달아나버리자, 나는 두렵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나는 나의 유죄 판결을 읽었다. 나는 반항하고 싶었다. 나의 손은 마치 영원의 한 점을 부여잡듯이 나의 다른 한 손을 곡 움켜 잡았다. 그리고 나는 곧 피로해졌고, 정신을 잃었다. 내가 눈을 떠 보니 나의 조부모께서 나를 지켜 보고 계셨다.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하고 나는 두 분에게 여쭈어 보았다.<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것은 너무 끔찍해요.>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두 분께서는 내가 휴식이 필요하고 약을 먹어야 된다고만 말씀 하셨다. 그때 이후로 나는 그분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마치 낯선 사람들과 지내는 듯이 살았다.

 

*****

 

 아마도 틀림없이 너의 그러한 고백을 하면서 어린 시절의 모호했던 권태스러움과 젊은 시절의 반항을 뒤섞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네 감정들은 거의 그 시기를 알 수 없었지만, 네 삶은 얼마나 그 시간 위에 매달려 있었던가! 어떤 원한도 품지 않고 야심도 갖지 않고 너는 영원한 부재와 더불어 영원한 대화를 계속해 나갔다. 네 고향에 있으면서, 네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네 자신에게서도, 아무리 해도 없어지지 않을 이 얼마나 엄청난 고독감을 느꼈던가! 죽음과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유일한 죄악, 이 죄악 앞에서 얼마나 끔찍한 공포인가!

 나는 너의 모습을, 브르따뉴의, 비극적인, 그 모습과 따로 떼어 놓을 수가 없다. 오로지 그곳, 브르따뉴에서만이 나는 온갖 사물들과 사람들이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죽음이 영원히 현존해 있는 그곳에서 말이다. 일상의 신비 앞에서 모둔 것은 사라지고 만다. 브르따뉴에서는 사람들은 프로방스 지방에서 그렇듯이 환대를 받는 것도 아니고, 로렌 지방에서처럼 따돌림 받는 것도 아니다. 브르따뉴라는 곳에서는 사람을 그의 절대에의 꿈과 허무에 대한 확실성 속에서 바로 그 지방 자체와 더불어 뒤섞어 버리고 만다. 네가 네 도취와 네 절망을 끌어내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브르따뉴에서이다. 운명의 신이여! 트리스땅에게 팔을 건네는 이졸테를 어떻게 잊어 버릴 수가 있겠는가? *트리스땅과 이졸테=코른발의 마르크 왕의 조카인 기사 크리스땅과 마르크의 완의 왕비 이졸데의 숙명적인 비련을 주제로 한 켈트 전설에 유래한 이야기. 동명의 바그너의 가극으로 더욱 유명해진 대표적인 연애 가극이다.

 

*****

 

 일 학년이 끝나갈 무렵 쟈끄는 나에게 그레브에 있는 쌩 –미셸 근처에 친척 아저씨가 갖고 있는 어느 낡은 저택에서 9월을 보내자면서 초대했다. 우리는 두 사람 모두 집에서 어떤 야릇한 고독 속에서 지냈다. 베그-앙-푸름의 그 저택은 농부들이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고 말하는 집이었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마을에서 4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벌판의 끝에 우뚝 서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발견한 수평선에 경탄을 하고 말았다. 그 벌판의 광막한 공간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우뚝 세워진 베그-앙-푸름 저택으로 인해서 바다의 광막한 공간과 나뉘어져 있었다. 바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공원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고, 집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답과 똑 같은 높이까지 자란 전나무조차도 이제 더 이상 자라기를 멈추었고, 납작해진 기괴한 모양의 화강암 덩어리는, 바위가 깎여 만들어진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이는 바다 위로 그 거대한 입을 내밀고 있었다.

 

 쟈끄와 나는 울타리 위를 뛰어넘고 강아지가 놀고 있는 금작화가 우거진 수풀 위로 몸을 굴리면서 그 너른 벌판을 가로질러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나는 언제나 기억 할 것이다. 농익어 가는 사과 냄새와 시들어 가는 사과 냄새와 시들어 가는 히드꽃 향기를, 날카로운 말소리에 뒤섞인 어떤 노래가 깨뜨리는 탈곡기의 부르렁거리는 소리를, 넓은 바다 위를 부는 바람과 태양의 공평하지 못한 싸움을. 가축 떼들이 휩쓸고 간 메마른 땅바닥 위에 길게 엎드려 누운 채, 쟈끄는 피로에 지친 대지의 피가 고동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난 후에는 우리는 보통 쇠창살이 달린 조그만 창문에 달라 붙어서 꼬박 저녁 내내 몇 시간을 그댈 있곤 했다. 귀뚜라미들의 짧은, 한탄스러운 소리와 등대 불빛의 신비스러운 신호에 지치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너른 들판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것은 바다였다. 그 바다는 우리가 보기에 즙과 액으로 부풀어진 쓰디쓴 하나의 과일과 같은 것이었다. 그 어느 곳에서 보아도 우리는 그 바다가 나누어질 수 없으며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음을 알아 보았고, 그 바다는 고뇌하는 어느 하늘과 만나면서 단단한 덩어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한 충만함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의 꿈 속에까지 우리를 쫓아왔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상상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우리는 개펄을 따라 달리기도 했으며, 바다가 연출하는 드라마에 참여하기도 했다. 때로 우리는 바다를 따라갔다, 마치 바다가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는 거대한 바다 거품 속에서 수평선과 맞닿으려고 해초와 바다말들을 실어다 버리면서 바다 그 속으로 다시 소멸해 가는 것처럼. 그리고 나서 곧 바다가 조금도 참지 못하고 부글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다는 단 한번에 펼쳐지면서, 촘촘한 그물 하나로 해변 전체를 담아 그 철사 줄로 감싸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밀려오며 넓게 펼쳐지는 보자기 하나로 해변을 다 잠기게 할 것 같았다. 우리의 마음은 그때 기쁨에 젖어 있었다. 바위에 부딪치고 출렁거리며 부서지는 파도 바로 앞에까지 돌진해 나아갔다. 우리는 그 움직이는 우주에 의해서 마침내 우리가 그 우주의 신비스러운 단일성과 일체가 될 때까지 그대로 스며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느 날인가, 해변 위에 길게 누운 채, 우리는 어렴풋이 웅얼거리는 바다 소리를 들으며 거의 잠이 든 적이 있다. 그렇지만 곧바로 어떤 불안한 생각이 우리를 사로 잡았고, 우리의 행복한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결코 그 끝을 알 수 없는,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그 바다에서 우리의 마음은 하계를 그어놓았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쟈끄의 마음 속에 있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근원을 보았다.

 불규칙하게 밀려왔다 밀려가는 썰물과 밀물 사이에서 잠시도 멈추지 않는 그 흔들림, 가장 엄정한 한계에서의 그 불확실성, 죽음에 던져진 매 순간마다, 죽음에 바쳐진 매 순간마다, 가장 어리석은 모험에의 충동, 이 모든 것들이 쟈끄의 영혼 속에서 어떤 향수를 새겨 놓았고, 오로지 나 혼자만이 그의 한탄 소리를 들었다.

 숱한 나날을 낮이면 우리는 태양이 떠 올랐다가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 개펄을 따라가면서 이리저리 거닐었고 바위를 올라 가고 절벽을 기어 오르고, 포구에서 멱을 감기도 했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한가로이 거닐기도 했다. 숱한 밤을 우리는 한없이 넓은 바다 위를 떠도는 바람의 숨결 소리와 야생의 새떼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수천 번 수만 번 우리는 태양빛에 이글거리는 모래밭이 수없이 틈을 벌리고 파도의 물기 젖은 어루만짐에 자신의 몸을 열어 놓는 것을 보았다. 내버려진 모래밭이 욕망으로 다시 불타기 시작하게 되면 파도는 곧바로 물러서곤 했다ㅡ영원히. 파괴의 시간이여, 몽상의 나날들이여! 그때부터 무든 것이 우리를 가로막았으며,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의 심연이 깊게 패였고, 그 어떤 사랑으로도 그 심연은 메워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

 

 그 해 여름부터, 쟈끄의 아저씨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신해서 쟈끄를 돌보아 주게 되었다. 그 아저씨는 쌩-쎄르방에 전착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다시 그 도시로 돌아 왔고, 학교에 서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해에 우리는 우리의 첫 번째 성채배령을 해야만 했다. 나는 별로 거리낄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어떤 대단한 열정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성체배령을 하는 것에 대충 준비를 하였다. 그렇지만 그 아이 쟈끄에게는 그러한 뜨뜻미지근한 태도는 통하지 않았다. 우선 그 아이는 사람이 오로지 하나의 신에 의해서만이 초대를 받는 다는 생각에 거의 분개할 정도였다. 말하자면 아무리 그 사람이 더없이 순수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에게는 어떤 죄악을 행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그가 체념하고 말았을 때, 그는 거의 광란에 아까운 열정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는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그것은 물론 그의 마음이 신에 대한 사랑과 특별한 우전 사이에서 나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바라지도 못할 어떤 천국을 소망하고 있음을 알았다.

 마침내 성체배령의 날이 다가왔다. 한 달 동안 설교와 고백 성사와 훈련과 금욕과 불면의 기간을 거친 후였다. 나의 경우를 감히 이야기 하자면, 내가 난 자신 조차도 감히 인정 할 수 없는 사실로, 그것은 엄청난 실망을 안겨 주었다. 나는 나 자신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환상적인 변모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체배령 이후에도 나는 그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이기주의적인 한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쟈끄도 또한 그 전보다 더욱더 심한 실망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아주 나중에 나에게 그 사실을 고백했는데, 이처럼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고백 성사를 할 때 신부에게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하나 감추었던 탓으로 돌렸다. 성체배령 이 후에도 이렇듯 변화가 없다는 것은 반드시 자격이 없다는 징조이고 신의 판결을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저지른 잘못이라는 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었든, 그가 번의 아니게 그 사실을 잊고 있었든,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또한 그가 자신이 어떤 잘못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도 세세히 말하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고백 했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어쨌든 죄인이었던 것이다. 죄인이었다! 쟈끄는 그때부터 죄의식 속에서 살았다. 쟈끄는 우리의 놀이에 끼는 것도 거부했고, 그나마 그가 천성적으로 갖고 있던 명랑한 성격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성격은 날이 갈수록 점점 침울해져 갔다.

나는 그를 위로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자신의 정적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의 신앙심은 오히려 점점 더 커져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신앙심은 독단적이고 비타협적이 되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불행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이상한 정신병에 걸렸고 그래서 열세 살부터 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수 없는 망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너무나도 순수한 그는 순수하지 못한 어떤 환영들과 더러운 유혹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한 환영들과 유혹을 물리치려고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고, 오히려 그것들은 그를 되풀이해서 공격해 왔다. 심지어 그가 그것들을 쫓아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만큼 더 집요하게 그것들은 다시 나타났다.

매 순간 마다 수시로 마구 공격해 왔다. 모든 것이 그 아이에게는 죄악을 저지르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그는 아침부터 저녁 때가지 벼랑의 끝을 걸어 다녔고, 그리고 그의 꿈들은 그로 인해 혼란스러워졌다. 지칠 줄 모르는 사냥꾼처럼 이렇게 그를 염탐하는 그 사람, 쉬지 않고 그를 따라다니는 그 사람, 쟈끄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사탄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아, 만일 밤이 갑작스럽게 그의 영혼의 내부에 자리를 잡는다면, 만일 사탄이 몰래 나타나 그를 데려간다면? 아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쟈끄는 유일한 구원자를 향해 기도하듯이 절대자인 신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 구원자는 분노했고, 그 구원자는 고행과 희생을 요구했다. 쟈끄는 구원자의 뜻을 거스르는 그런 순간까지 이르지는 않았던가? 그렇다면 예를 들어 한 시간 정도 그의 영혼 속에 깊숙하게 박혀 있는 그 못 된 생각에 그가 다만 일초라도 굴복한 적이 없었다는 것인가? 그 생각을 완전히 떨쳐 버렸다는 것이 확실한가. 그 생각을 완전히 떨쳐 버렸다는 것이 확실한가? 그 생각을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그 생각을 품고 있다는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았고, 퇴폐적 쾌락에 죄의식을 느낀 것이 확실한가? 그것을 알려면 과오를 범할 수 있는 그럼 상황에 다시 놓여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고, 타락 할 수 있었던 정확한 그 순간을 머리 속에서 다시 기억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되살아난 망상이 어떤 새로운 힘을 갖고서 다시 새로운 몇 시간 동안이나 그를 몹시 공격해 왔다. 그리고 쟈끄는 자신을 밀어내려고 똘똘 뭉친 지옥의 힘과 대항해서 거의 초인간적인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충고를 곧이곧대로 따르면서 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너무나 완벽하게 재 검토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 잘못들을 기억해 내는 데 여러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만일 한 밤중에 그가 잊고 있었던 어떤 잘못을 하나라도 깨달았다면 그는 가차 없이 그 날의 첫 시간에 자신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저질렀던 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범할지도 모르는, 범하고 싶은 죄악들을 미리 알았다. 그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의 사고들의 하나하나가 무엇을 토대로 하는지 염탐했다. 그것은 사고와 행동의 악의를 파악할 수 있고 미리 애초에 그 뿌리를 없애 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독과 같은 생각은 그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그의 삶의 방식까지도 수정해 놓았다. 그는 이상한 미신에 빠져들어갔다. 예를 들면, 오른 쪽에 있는 사람을 지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왼쪽을 지나가야 하는지, 그러한 색깔의 그러한 돌 위를 밟고 지나가야 하는 지 아니면 피해야 하는지, 그러한 글자로 숙제를 시작해야 하는지, 그런 것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하면서 이상한 미신에 빠져들어갔다. 그가 하는 이러한 행동 중에서 그 어떤 행동도 전혀 이제부터 그에게 퍼부어질 모든 비난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보호막이 되지 못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쟈끄는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사고에 대해 확신을 가지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지능의 질서보다 더 높은, 어쩌면 그의 신앙의 질서보다 더 높은 질서의 힘에 의거하여, 자신이 죄악에 빠졌다는 생각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물신숭배와 마술의 최후 단계에 이르기까지 후퇴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물신숭배와 마술의 최후 단계에까지 후퇴하고 말았다. 미리 결정된 정결 의식에 비추어서 되풀이 되어야 하는 그런 태도는 없다. 그 행동들은 저마다 모두 그 의미를 갖고, 모두 그 결과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어떤 행동에 마음이 기울어진다고 느낀다면, 그 행동은 선험적으로 잘못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행동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좋아서 선택한 그 행동이 그가 선택한 행동이므로 그 이유로 해서 배척을 당하거나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대 우주는 이렇게 선과 악, 신과 악마라고 하는 엄정한 두 개의 표시 아래서 나뉘어 있었다.

 

질겁한 그의 지도자는 그를 준엄하게 타일렀다.

 

<그대는 그대의 잘못을 이야기 하는 것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차라리 그대의 잘못에 하나를 더 보태려고 애 쓰는 것에 지나지 않네. 내가 그것을 오늘에 와서야 밝히는 것이지만, 나는 소위 그대의 마음 속에는 발본색원을 해야 할 고통에의 욕구가 있다네. 나는 소위 그대의 여린 양심에 속지 않으리. 그대가 내 앞에서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무분별한 불안함은 죄악이 그대를 현혹 시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대가 어느 곳에서나 그것을 보기 원하기 때문이리…….

(그러나 그의 속죄자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다시 더없이 부드러워졌다:)

내 가련한 친구여, 그대가 매우 순수한 양심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고 있노라. 그러나 조심하도록 하라. 그대는 옳지 않으니. 뒤얽힌 욕망, 특별한 사물에 대한 그 사랑, 마침내 고통에의 탐닉, 내가 생각 할 있는 모든 감정들이 나를 두렵게 한다. 오늘 그대에게 불 건강한 그 모든 것들이 내일이면 그대를 파멸 시키리, 그리고 그 후에는 누가 알리? 다른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들이 위험한 것들이 될지……>

 

<하지만 쟈끄에게 반박하고 싶어하리, 종교는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를 덜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모든 비참한 일들을 예수는 오히려 즐기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만일 진실로 이 세상이 다 할 때까지 인간이 비참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잠이 들 수가 있겠는가? 즐거움을 느끼는 매 순간 마다 그 즐거움은 나에게 하나의 죄에 대한 나의 의식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는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 보았던 알록달록한 그림 한 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그림은 천사가 지상의 낙원의 인간을 쫓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죄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던가? 그의 어린 시절은 침묵과 외로움과 추위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그 대가를 치르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브르따뉴의 언제나 한결 같은 그 단조로움은 통해서, 둔중하게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끊임없이 들려 오는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그 종소리, 이 소리들이 그를 몽상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했다. 실제로 그는 저주 받고 죄 많은 어떤 세계에 속해 있다는 몽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수의로 자신의 몸이 감싸이고, 마침내 누군가가 자신을 땅속에 묻을 수 있기를 바랬다.

 

그 해에 피정 묵상을 설교하기 위해 한 도미니끄 수도회의 신부가 왔다. 나는 그의 설교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무엇보다 먼저 그 교리에는 흥미를 느꼈지만 그 계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신보다는 학설에 이끌렸다. 기독교가 진리를 말했기 대문에 나는 기독교를 믿었다. 쟈끄는 다른 각도에서 종교를 믿었다. 죽음에 대한 예언은 그를 강렬하게 사로 잡았다.

 

<그대들 중에서,ㅡ겨울날 저녁 여섯 시였고, 검은 천으로 싸여 있는 해골이 그려진 영구대 주위에 있는 양초에는 모두 불이 환하게 켜있다.ㅡ적어도 그대들 중에서 내년이면 어쩌면 그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이렇게 신부는 소리쳐 말했다.

 

ㅡ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인간의 고통, 단 한 순간일지라도 이세상에서 사라지는 자신들의 영원한 난파를 늦춰 보려고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는 심정으로 이부 자락을 부여잡고 놓지 않는 죽어가는 사람들, 결국 죽어 가면서 무릎을 끓고 마는 견딜 수 없는 죄의식, 그들을 삼키려고 좌우로 갈라져 있는 대지 앞에서의 공포,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낱낱이 묘사했다. 일 분만이라도 불쌍히 여기소서! 아니다, 일 초도 더 기다릴 수 없노라!ㅡ

그리고 나서 누가 누구인지 얼굴도 잘 알아 볼 수 없고 설교 단도 깊게 묻혀 있는 그 암흑의 한 가운데를 향해 그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보쉬에가 있다>의 말을 던지듯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혼자 외로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그때 쟈끄의 심장이 갈갈이 찢어지는 듯한 것을 나는 느꼈다. 우리는 혼자 외로이 죽을 것이다! 무엇이라고, 우리를 죽음의 심연으로부터 이끌어 낼 친구의 손도 없고, 다정한 입맞춤으로 우리를 저 무덤으로부터 들어 올려 줄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도 없다는 말인가? 그것은 분명 저 너머 세상을 향해 가는 하나의 통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저 세상보다는 오히려 희생된 실존을 당당하게 떠나지 않았던 것은, 저 세상보다는 오히려 희생된 실존을 당당하게 마감하는 그 끔찍한 통로였다.

이제껏 한번도 그러한 생각에 마음껏 빠져 본 적이 없던 그는 마치 도취된 듯 고독하고 적나라한 죽음의 이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욥과 함께 이렇게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주여, 인간이란 무엇이나이까, 당신이 인간을 환란과 죽음의 고통에 빠지게 할 때 그 때마다 당신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란 무엇이었나이까?> 이러이러한 가치로 우리의 죄와 우리의 영혼을 평가하시는 신, 우리를 허무와 직면하게 하고 위험스럽게도 우리를 허무에 빠뜨리는 신, 어찌하여 그 고통과 인식의 그 끝에 이르러서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나이까? 나는 우리의 영혼을 다루는 인간적인 잣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영원을 위해 신을 구하면, 모든 것이 그와 함께 하며, 영원을 위해 신을 버려도 모든 것이 그와 함께 있으리. 바로 여기에 우리의 운명을 가르는 단 하나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잣대가 있노라.

 

*****

 

너는 그 때 너의 정신적 삶의 열 여섯 번째 생일로 나를 이끌어 가기 시작하는구나.

 

<나는 나의 내부에서나 나의 외부에서나 스스로 만족 할 수가 없구나. 결국 인간은 내부와 외부에 걸쳐 있는 한 존재일 뿐이다. 그 자신의 존재도, 그 자신의 존재가 아닌 다른 것도 인간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기를 원한다. 나의 모든 노력이 그 어떤 것에도 쓰일 수가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허무로부터 나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자루처럼 그만 주저앉고 만다. 아,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비참하게도 수포로 돌아가는 구나, 나의 신, 그대도 없이.>

 

그러나 신이 어떻게 우리에게까지 내려올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사실도 아니며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신이 우리의 인간성과 비슷하기를, 그가 우리의 노예가 되기를, 그가 고통을 받기를, 현재의 우리의 모습인 허무가 존재하기 시작할 수 있도록 그가 죽기를, 어떤 신이 우리의 문 앞에 와서 구걸 하기를,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 오도록 하기 위해 신이 우리에게 애원을 하도록, 이것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눈물 짓게 하는 것이다. 자, 얼마나 부조리하며, 얼마나 신성한가!

철학자들의 체계라는 것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나의 육체는 고통스러워하고 비명을 지른다. 어찌하여 나의 육체는 그 순수한 사상들보다도 더욱더 나를 배신하려고 하는가? 어찌하여 여러분의 지성보다도 나의 정념이 나를 저버리려고 하는가? 나의 영혼이여, 나는 그대가 나의 육체에 너무나 가까이 있음을 느끼노라……화신. 만일 신이 아쉬워하지 않을까? 진흙과도 같은 우리의 비참한 생활이 그로부터 아직 사라지지 않은 어쩐 빛을 끌어내지는 않을까?

 

종교 의식, 제식 행위, 신도교들이 우리로 하여금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고백 성사, 그러나 모든 종교 의식들은 우리의 육체 안에서 성령의 발출인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성스러운 것이라서 유물론 적으로 표현 될 수 있다고 그대는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여. 그대는 세번 죽은 것이다, 두 번이 아니다. 가래침은 네 뺨 위보다 네 이마 위에 더욱 많이 묻어 있구나. 감람 동산에서 그대가 흘린 땀 방울의 피였음을 나는 알고 있다.

 

어쨌든 간에 그대와 어울리기 위해 나로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지금 나는 열 여섯 살이다, 나는 아직 그 어떤 것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희망을 앗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상심인지 모른다. 그러나 희망을 없앤다는 것이 오히려 쉬운 일일 것이다. 만일 버려야 할 오만함이 나에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일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에 대해서 전혀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나 자신도 그것을 무시해야만 한다. 내가 무<無>로 환원이 된다면, 나는 어쩌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할 것이다. 만일 내가 나의 본성을 완전히 벗어 던지지 않는다면 또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외부 세계의 인상이나 느낌 등에는 모두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암흑 속에서 몇 날이건, 몇 주일이건 하루 종일 꼬박 나아가야 한다. 자기가 지나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은 모두 없애 버리고 난 후에 자신의 몸을 움츠려야 한다. 이 얼마나 커다란 마음의 고통이란 말인가! 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어둠이란 말인가!

 

갑자기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 저녁 열 한시에, 어떤 열기가, 어떤 빛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나에게 던져지고 나를 불태우고 나의 몸을 살아 있는 횃불로 만들려고 하는 구나. 그리고 그때 나는 나의 바로 나의 곁에 있는 그를 그렇게 느끼고 있다. 넘칠 것 같은 그의 존재로 나는 정신을 잃는 것 조차 잊어버리고 있구나. 그러나 그는 나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내 이마를 만져 본다. 그러면 나는 거의 영원이라고 느껴지는 몇 시간 동안 황홀한 기쁨에 겨워 그의 어깨 위에 기대어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아, 나의 신이여,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 결코 죽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면 차라리 그러한 죽음이 완전한 고통이기를!

 

하지만 그 이후로, 매 순간 마다, 나는 충만함 속에 살고 있다. 그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내가 본 사물 하나하나 모두, 내가 들은 말 한마디가 모두 나에게 기도의 근원인 것이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의 성가를 노래하고 모든 빛은 영광으로 빛난다. 만일 내가 들판을 이리저리 헤맨다면 그 모든 것들은 이기 속에서 몸을 일으켜서 꽃으로 피어나리라, 너는 동물들을 본적이 있느냐? 그 동물들은 단순하므로 위대한 것이다. 그처럼, 그들은 그들의 열정 속에서 얼마나 위대한가? 내가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은 나와 같은 감정을 갖는다. 만일 그들이 나를 비웃는다면, 나는 그들을 열렬한 사랑으로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성한 지혜의 무게로 나의 광기를 짓밟아 버린다는 것을 나는 잘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아, 만일 네가 알고 있다면, 만일 네가 비밀스런 사랑을, 모든 존재의 숭고한 열정을 알아채고 있다면, 너는 열렬한 사랑으로 너 스스로를 불태울 것이다!

 

*****

 

 바로 그 시기에 나는 내 종교의 진리에 대해 회의로 몹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내가 믿는 종교의 교리를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교리들이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공간적인 어떤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어떤 이유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기독교는 역사에 근거하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그 주장을 살펴 보면 너무나 기고만장하고, 소재로 보자면 너무나 빈약해서 기독교를 심층적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나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의 계시록 자체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게다가 내가 그 계시록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해서 더욱더 커다란 불확실성 속으로 나를 침몰 시키는 것이었다. 어떤 연대기도 확실하지 않았고, 어떤 추정도 명백한 것이 없었고, 어쩐 주장도 단 하나의 의미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비판자들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관하여 서로 다투었고, 과거 몇 세기 동안에 정통성의 주해를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상정하면서 그 주해는 중복되어 사용되었고, 오히려 증명해야 할 사실로 나타났다. 나의 믿음에 이제부터는 어떤 수학적인 확실성이나 어떤 실험적인 증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그 문제를 연구하는데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점점 더 그 어둠은 내 주변에서 점점 두터워져 갔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빠져서 방황하면서도, 나는 아직도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상상했으며, 아니면 믿음을 다시 내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믿음은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그 다음해 쟈끄는 아저씨의 건강은 갑작스럽게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성격도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화를 내는 일이 없어졌다. 그가 예전에 지니고 있던 과묵한 분위기도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오랜 동안 함께 산책을 하곤 했다.  겨울 어느 날 저녁에, 우리가 아주 늦게 산책에서 돌아 올 때였다. 한 사람이 쟈끄의 가방 하나를 둘러메고 곧 가버리는 것을 보았다. 쟈끄는 아저씨는 내가 그를 향해서 뛰어 나가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는 내 몸을 벽으로 밀어 붙이면서 속삭였다. <조용히 하자구. 내가 알라, 일전에 건축을 부탁했던 작은 별장에서 일하는 미장이 또마라는 사람이라구. 참 불쌍한 친구라구. 아마 자기 석고 자루를 찾으려고 그렇게 멀리서 힘들게 왔을 거라구. 그는 그것을 찾은 것이네. 내 말을 믿게.>

 

그리고 나서 느닷없이 그는 나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죽고 나면 무엇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것이 끝난다고 자네는 믿고 있는가? 그것은 말도 안되네. 내가 자네에게 말한 것은 말도 안돼, 그렇지?>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왔다.

 

나는 감히 나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안겨 누었던 청소년기의 나의 열병에 대해서 그에게 말할 수 없었다. 모호하면서도 끊임없이 계속 되었던 그 열병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기 이해 여러 번의 생을 살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너무나 짧은 나의 낮 시간 동안과 너무나 길고 긴 잠 없는 나의 밤시간 동안 나는 세계가 줄 수 있는 것을 단번에 마셔 버렸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가슴을 지니고 있다고 우쭐거렸고 또한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 더 이상 가슴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경멸했었다.

쟈끄의 아저씨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 맞추었다. 왜냐하면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얼마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젊은 사람에 관해 나에게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그 말을 할 때의 어조를 잊을 수가 없다. <스무 살이야. 그는 사랑 한다고 생각했고, 솟구쳐 오르는 순수한 정열만을 깨달았던 게야.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것은 너무 늦은 때야. 훨씬 나중에 깨닫게 되는 거야.ㅡ(그리고 그는 나에게 너무 익어서 새들이 쪼아먹는 농익은 과일 하나를 보여 주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을 결코 말하지도 못하고 그 사랑을 고백해 보지도 못하고 사랑으로 바래져 갔다는 것을 자네가 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씨앗으로, 향기로, 자손으로, 작품으로 흩어지기 위해 대지 위에 쓰러지게 되고 서로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자네가 알지 모르겠네.>

예전의 나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어떤 아름다운 여자를 껴 안는 것이었다. 또한 나는 이따금 그 여자를 겁탈하고 죽이고 싶었었다. 아, 그대의 청춘 시절에 그대의 사랑, 그것은 살륙의 의지, 그것은 그 자체로 취해 버린 힘이다. 지금 ㅡ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이해시킬 것인가?ㅡ나는 존재하는 그 모든 것에 그러한 연민을, 그러한 존경심을 ……느끼고 있다.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신성의 표시가 각인된 것으로 나를 공격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

쟈끄는 심정적으로 극심하게 고갈된 듯한 시기를 통과했다. 신이 그토록 사로잡았던 것처럼, 재빨리, 신은 어느 날 돌보지 않는 적도의 바다처럼 그를 내버리고 말았다. 그는 거기 그 자리에 멍청하게 그리고 헐벗은 채 아무런 몸짓도 하지 않고, 아무런 말 한마디도 없이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세상은 그에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늘, 그 세상이 그에게 마치 텅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죽음과도 같은 늪 속에 빠져들어갔다.

 

그는 말했다.<나는 이와 같은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하얀 종이, 이 무미건조한 시간들, 이 아무 소리 없는 나날들, 이모든 것들을 뛰어넘기 위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무엇인가를 주고 싶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일상적인 삶의 무미건조함을 그대로 참고 견딜 수가 있단 말인가? 신이 없이도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마지못해 기어 가듯이 살아가다가, 어느 영웅적인 순간에 주검의 사슬로 다시 연결되어 죽어 가는 것. 그런데 동물만이 이 일상적 삶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들과 비슷한 사람만이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매달 단 일 분간만 살고 싶다. 그 나머지, 나는 그 나머지 시간을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싶다.

 

옛날에는 나에게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하면서 나를 구원해 주었던 그 많은 책들이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글로 쓰여진 모든 것이 거짓의 냄새를 피우고 있다. 글로 쓰여진 모든 것이 거짓의 냄새를 피우고 있다. 세상은 하나의 팔랭프세스트 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위에 써 있는 것을 긁어 지워 버려야 한다.

 

이따금 아직도 나는 우연히 도망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것은 가장 평범한 상황 가운데서 일어난다. 계단을 올라가고, 거리를 걷는다. 나는 문을 연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는 다른 곳에. 거기에는 시작도 없고 어떤 진전도 없다. 사고는 사고 자체를 염두에 두지도 않고 돌아간다, 끝없는 자기 만족 속에서. 모든 것이 유예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영원에 대한 어떤 예감과도 같은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는 그의 부재로부터 깨어난다.

 

하지만 그리고 나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오, 얼마나 가련한 사람들인가! 사사로운 이익에 가득 차 있을 때만이 그들을 부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원칙에 따라서만이 그들은 현명해질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직업은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관념의 불행한 한계를 끌어 모았고 그리고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가련한 사람들이 있다. 밤이면 밤마다 여자와 함께 있으면서 행복을 움켜 쥐고 있다고 믿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 인간이 신을 먹어 치웠을 때, 치아 사이에서 영원의 맛을 느낄 때, 어떻게 이와 비슷한 비참한 광경에 대해 또한 상세하게 늘어놓을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일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그들에게서 그 일을 빼앗아간다면, 그들은 그 공허감으로 죽는다. 무관심 때문에 뤼시페르처럼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나도 또한 비천한 인간이다. 만일 어떤 신이 우리의 뜻대로 해주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신을 통해서만이 인간들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그 자신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

 

너는 기억하고 있니? 우리가 공부를 끝내고 나서, 창문은 바다를 향해 활짝 열어 놓고 너의 방에서 우리가 보냈던 달 밝은 어느 여름날 밤을. 나는 너에게 시를 암송해서 들려 주었지. 하지만 너는 곧바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막았지. 내가 외우는 시의 리듬이 너의 리듬과 다르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나는 너에게 내가 갖고 있는 지식에의 욕구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단 한번의 영웅적인 포옹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기를 바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너는 고개를 흔들었다. 세심한 탐색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신을 편협하게 만드는데, 또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째서 그토록 많은 노력을 소비해야 하는가? 지능은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는 열거를 추구해야 하는가? 지능은 결코 일정에 따를 의무가 없는 구좌를 열어 놓는다. 그 무한한 탐색을 하는 과정에서, 지능은 그 어떤 것도 덧붙이는 일이 없이 모든 것을 쏟아 놓는다. 그 본질적인 공백은 오로지 죽음에 의해서만이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에게 여행에 대한 나의 가시지 않는 갈증을, 이 세상 전체를 두루 돌아 다니고 싶다는 것을 이야기했었다. 타히티를 가 보지 않고도, 미 적분을 배우지 않고도,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과연 일을 수 있는 일일까? 너는 내가 그렇게 열중하는 것에 반대 했었지. <그것은 여기서와 마찬 가지로 어느 곳에서도 마찬 가지야.> 만일 우리의 유일한 한가지 도피 방법, 그러한 방법이 하나 있다면, 그 방법은 옆에 비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우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전체가 아니라, 그것은 절대이다.

 

절대. 절대에 매달리는 미치광이들을 비웃지 맙시다. 아이러니. 그것은 심약한 사람들의 유일한 힘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우월한 점은 위대한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를 찾았으나 절망적이었다. 절대를 벗어나면 모든 것은 쉬운 것이다. 독단에 의해서만이 가치를 가질 뿐 그 어던 것도 가치가 없다. 나는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그 가자 화폐가 갖는 모든 가치를 거부한다. 돈이 던져 주는 사육제의 환락에 휩쓸리지 맙시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돈이 보여 준 역사의 정점을 필요하다면 지적합시다. 겉모습에 불과한 가면 아래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웃음을 터드리고 허무 속에서 균형을 이루어 흔들리게 되는 정점에 표시를 합시다.

때때로 바닷바람이 불어와 갑자기 램프를 꺼버리곤 했던 그 때를 너는 기억하고 있니? 우리는 그러면 어슴프레한 빛 속에 그대로 있곤 했었지,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끊임 없이 수런거리는 바닷소리는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두 마음을 가두어 두곤 했다. 우리의 의지는 마치 두 개의 횃불처럼 그렇게 밤이 다 새도록 하얗게 타버리곤 했다. 성스럽기까지 했던 젊은 시절의 그 소중한 시간들을 우리는 다 써버리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기를 바랬었다. 잠도 안자고 꼬박 하얗게 지새웠던 그 밤 내내 우리는 얼마나 숱하게 많은 존재의 모습들로 우리를 소모시키지 않았던가! 우리는 모든 사물의 덧없음과 비열한 행위를 열망했다.

우리는 결코 시간도 되기 전에 그러한 행동이 지긋지긋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는 목적이 지긋지긋해진 것이었다. 우리는 행동의 강요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그것의 허망함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가 그 행동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 순수함속으로 ㅡ사람들과 마주하거나 사물들과 맞닥뜨릴 때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으려는 그 절대 순수 속으로 도망친 것이었다. 우리의 최초의, 그리고 마지막인, 단 하나뿐인 우아함이었다.

 

*****

 

쟈끄의 아저씨는 하루가 다르게 허약해졌다. 쟈끄와 나는 그 해 여름 내내 들판을 쏘다녔다. 끝도 없는 거리를 쏘다니다가 끝내는 피곤에 지쳐서 우리는 어느 나무 아래에서 풀잎에 입을 대고 길게 몸을 뻗고는 했다. 그러면 나뭇잎을 통해서 푸른 하늘의 끝자락이 떨려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면, 먼저 저녁 노을이 스러져 가고 나면, 너는 별빛에 촉촉히 물든 겨우살이 덤불을 기억하고 있니? 우리는 아침이면 언제나 그 경주를 다시 시작했다. 쟈끄는 집안에 드리워져 있던 죽음의 그림자 때문에 오히려 거의 맹목적인 이 한가로움에 열광적으로 매달리고 싶어했다. 이 얼마나 커다란 자유였던가, 이 얼마나 황홀한 도취였던가! 그는 마치 한 마리 짐승처럼 대자연의 품에 안겨 대 자연을 누리고 싶어했다.

 

 환자는 이제 더 이상 불평하는 일이 없어졌다. 날이 갈수록 그만큼 더 그를 푹 기어들어 가게 하는 침대 위를 길게 누운 채, 망연해져서 당신 앞에 아무것도 나타나는 것 같지 않은데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계셨다. 아저씨는 자주 쟈끄를 불러서, 쟈끄는 마지못해 그의 다락방에서 내려오곤 했다. 그리고 아저씨는 자끄에게 아무 의미 없는 일들을 나직하게 말씀하셨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쟈끄가 거의 얼이 빠진 듯이 놀란 얼굴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우연찮게 아저씨의 방안에 들어 갔다가 그의 뺨에 말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았다. 그러나 내 친구인 쟈끄의 행동으로 나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는 자기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 머리맡에서 밤을 새다시피 해가면서 헌신적으로 그를 돌보았다. 온 몸을 다 바쳐서 환자를 돌보는 것만큼이나 그의 감정은 환자에 관해서 아주 차갑게 얼어붙은 듯했다. 그는 거의 나를 격분시킬 정도로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나타냈다. 언젠가 신부가 고백 성사를 주관하기 위해 그 집에 왔을 때, 처음에는 그를 향해 뛰어가는 듯했다. 그러더니 갑작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그의 감성이 서로 상반되는 움직임으로 갈등을 겪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았다. 때로 그는 비탄에 빠져서 자기 옆에 있는 나에게 호소하기도 했고, 때로 냉정하게 나를 보고도 모른 척하면서, 아예 아무도 만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아무 에고도 없이 그의 집에 들어 갔을 때, 나는 계단에서 평소 그의 아저씨의 목소리라고 알고 있었던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들려 오는 듯한 그런 목소리로 착각하게 만드는, 아무 억양도 없으나 명확하게 말하는 쟈끄의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마치 죽어가는 사람에게서나 들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죽음을 앞에 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복잡한 일들은 사라지고 그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쩐 본질적인 증거와 자리를 바꾸려는 것 같았다.

 

<쟈끄야, 이제 너에게 한 가지 비밀을 말할 때가 왔구나. 네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믿던 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단다. 네 어머니와 이혼을 했단다. 그리고 나서 네 어머니는 그만 죽고 말았다.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하지도 않고서 말이다. 내가 굳이 이 사실을 너에게 감춘 이유는 너를 가슴 아프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지……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에게 편지를 써 보냈단다. 이제 곧 매우 위험한 수술을 받게 되는 모양인데 그 전에 너를 마나 보고 네가 얼마나 자랐는지 알고 싶어한단다. 너도 네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니?>

 

어떤 커다란 침묵이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나서 날카로운 한마디 말이 들렸다. <결코 만나지 않겠어요.>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쟈끄가 나타났다. 나는 달아나고 말았다.

 

*****

 

그 다음날 저녁 여덟 시경에, 임종의 고통은 시작 되었다. 가장 절망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그런 지경에 이르렀는데,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잠깐 제정신이 들면 또렷하게 환자는 아주 여러 번 이런 말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했다. <나는 혼수 상태에 빠졌어, 혼수 상태, 혼수 상태……> 그 다음에는 아주 커다란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의 두 손은 침대보를 꽉 움켜쥐고 있어 마치 거기에 매달려 있는 듯했다. 피가 섞인 침이 그의 입술에서 흐르기 시작했다. 자정에 사람들이 다시 의사를 불렀다. 환자는 갑작스럽게 안간힘을 다하여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그러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바다 저 깊은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사람처럼 온몸의 힘이 빠지는 듯 길어졌다. <길을 잃었어, 잃어버렸어, 잃어 버리고 말았어>라고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그의 시선은 한 군데로 고정되었고, 그는 매끄럽게 기름이 잘 칠해진 밧줄을 타고 자신이 미끄러져 간다고 느꼈다. 언제나 더욱 빠르게, 언제나 더욱 낮은 곳으로, 그를 질식 정도로 끊임없이 차츰차츰 죄어들어 오는 절벽과 절벽 사이로 미끄러져 간다고 느꼈다. 신부님이 오셨다. 그리고 내 친구가 얼마나 창백해졌는지 바라보시고서 아주 직업적인 태도로 그의 두 손을 잡으려고 했다. <내 불쌍한 쟈끄……>라고 하면서. 하지만 쟈끄는 사람을 죽게 하는 신의 이름으로 죽어 가는 사람을 위로하는 그 신부를 놀랍고도 너무나 공포스러운 시선으로 쳐다 보았고, 말을 더듬거리면서 뒷걸음질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녘에 다시 왔을 때 나는 쟈끄가 창문 옆에서 면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의 아저씨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해야 할 몇 가지 절차가 있을 거야. 그러나 장례는 내일 모레 이전에는 안 치르게 될 거야> 라고.

 

*****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전염병이 있었는데, 나도 그만 위험스럽게도 그 병에 걸리고 말았다. 어느 날 침대에서 소스라쳐 놀라 일어나고 말았는데 뇌에 피가 몰리는 듯하고, 모든 것이 곧 끝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순간에 죽음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만일 내가 계속해서 살아 갈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생명이란 나에게 버팀목처럼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었다. 회복되는 데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병으로 인해서 나는 모든 일에 시들해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무엇에 동요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 병을 앓는 이래로 나는 나보다 한 수 위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커다란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무언가 명령하기 위해 앞으로 내미는 긴장된 그들의 팔을 통해서 나는 앙상한 해골이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는 것을 겁에 질려서 보았다. 대자연은 일찍이 나에게 신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하긴 했지만, 나를 어머니처럼 품에 안나 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분수와 숲과 하늘의, 떨리는 대자연의 장막이 나의 피곤해진 감각을 감싸고 있었다. 파도가 흔들리는 것과도 같았다. 다시 살아난 나의 젊음에 이 얼마나 신선한 과육인지! 게걸스럽게 그 과육을 깨물어먹고 싶은 그런 시간이 왔다.

*****

 

쟈끄는 나를 다시 만나 보지도 않고 스페인으로 떠나 버렸다. 그는 나에게 블랑쉬 쎄 양라는 여자에게 보내야 할 편지 한 통을 맡겨 놓고서 말없이 떠나 버린 것이다. 꼭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 것은 아니면서도 내가 이행할 수밖에 없는 이 얼마나 기이한 임무인가! 쎄양은 그 편지를 받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무관심한 태도로 그 편지를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에 나는 그녀의 얼굴에 담긴 어떤 선과 그녀의 태도에 나타난 움직임의 조화에 갑자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녀 앞에 선 채로 가만히 있었다. 다만 나는 내가 왜 그곳에 갔었는지 그 이유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잠시 후에 그녀는 단지 안녕히 가시라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나는 어던 모임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쟈끄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교외에 있는 그녀의 집까지 그녀를 바래다 주었다. 말을 하다가 한참 뜸을 뜸을 들였다가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그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길에서 발을 헛지뎌 비틀거렸다. 나는 내 두 팔로 그녀를 잡아 주었다. 우리는 둘 다 너무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었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그녀의 두 눈은 내 눈을 바라보면서 정신을 잃은 듯했다. 그녀의 눈에서 어떤 공포와 어떤 간청을 읽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떤 호소와 어떤 포기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껴안았다. 나의 메마른 입술 위에서 그녀의 촉촉한 입술과의 입맞춤을 느꼈다.

 

그 다음날 나는 똑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은 시각에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포옹으로 떨리는 듯한 그녀의 허리 주위에 내 팔을 둘렀다. 아! 나는 예술과 리듬에 대해 얼마나 뜻밖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인가! 그 도드라진 엉덩이, 가슴의 부푼 곡선,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간 듯한 그 무기력이란! 실현되는 그 약속, 하나의 완성인 그 도피, 내가 가차없이 그녀를 해방시켜 주는 어떤 부드러움이 그녀의 내부 속으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녀의 두 무릎이 꺾이고 그녀의 눈썹은 마치 비둘기처럼 팔딱거렸다. 그녀의 두 팔은 부드럽게 나의 목을 감싸 안았다. 우리는 눈을 감은 채로 사랑의 깊은 심연 속으로 함께 빠져들어갔다.

 

블랑쉬! 그대의 이름과 그대의 얼굴은 나로 하여금 관능적으로 밀어 내는 바람에 따라 바다를 향해 기울어진 베일을, 높은 산정에 있는 호수에서 피어나는 어떤 꽃들을, 황혼이 짙어가는 하늘에서 황새의 순수한 비상을 생각나게 했다.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이미지들은 때늦게 오로지 추억에 의해서만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대의 모습에서 나의 가슴을 떨려 오게 했던 것은, 그것은 마돈나의 미소 같던 그대의 웃음의 순수함이었고 그대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과일처럼 향기롭던 그 맛이었고, 나의 심장이 튀어 올랐다가 이내 멎어 버릴 것처럼 느껴졌던 것은 그대의 몹시 떨리던 육체가 순수하지 못함 그것이었다.

 

 가을. 시월이 다가왔다. 나는 나의 부모님의 단호하신 의지에 따라 이웃 마을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떤 학문이든지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창백해 보이는, 안개가 끼어 있는 듯한 한 줄기 빛이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 뜨거웠던 여름날의 열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는 나뭇잎 냄새로 가득한 수풀 속에서 마구 흩어져 있는 낙엽 위를 걷고 있었다. 내가 곧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너는 나에게 네가 정숙하지 못했음을 이야기했다. <아, 나는 날이면 날마다 당신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모릅니다. 밤이면 나는 늘 당신이 내 곁에 있었으면 했습니다. 나도 모를 어떤 힘이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 까닭을 모르는 채로 나는 당신에게서 나를 떼어 놓을 수 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 하셨나요? 당신의 눈에, 아마도 내 것일 수 없는 당신의 눈에 입맞추도록 해 주세요.>

 

 나는 내가 영원히 인간의 노래가 되어 버린 그런 노래를 듣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마도 너보다도 훨씬 내가 그것을 알지도 못한 채 내가 사랑한 것은 바로 사랑 그것이었다.

 

*****

 

쟈끄의 전보 한 통이 마치 벼락이 내려치듯이 날라왔다. 그가 그 다음날 쌩-쎄르방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의 곧바로 그는 다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역에서 만나자고 했다.

 

순식간에, 나는 올바르지 못했던 나의 행동을 깨달았다, 그어나 그날 저녁 블랑쉬를 만났을 때 나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 놓는 운명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꼈고, 그리고 침묵했다. 그녀는 나를 마주하고서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아챘다. 우리는 언덕을 향해 올라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그녀는 울타리를 따라 걷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그때 지나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가슴에 두 손을 얹더니 온몸의 힘이 빠지듯이 주저 앉아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서 나는 도시가 어둠에 짓눌리는 것을, 계곡이 어둠 속에 잠기고 환상적인 빛깔로 물든 마른 풀들의 불꽃으로 불타오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그리고 아주 멀리서 두 개의 구릉 사이에서 바다가 무한으로 열려 있는 것을 바라 보았다. 블랑쉬는 나의 가슴에 몸을 바씩 붙이고 있었다. 나는 모험으로 가득 찬 바다를 바라다 보았다……그녀는 눈을 들어 마치 내게서 위안을 되찾으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어떤 몸짓, 어떤 말 한마디, 어떤 시선을 구하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피와도 같은, 피에서 솟구쳐 나오는 듯한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눈물이 내 두 뺨 위에서 흘러내렸다. 나는 어떤 외침을, 어떤 추락의 소리를 들었다. 배 한 척이 출발 하는지 뱃고동 소리가 세 번 울렸다. 그리고 나서 멀리 사라져 버렸다. 나는 내 두 팔을 펼쳤다. 나의 두 팔은 텅 비어 있었다.

 

*****

 

< 나는 네게 블랑쉬의 소식을 묻지는 않겠어. 나는 전선으로 떠날 거야. 군대에 지원 했거든 .> 쟈끄는 이렇게 말했다. 나가 놀라서 뒷걸음쳤을 때 쟈끄는 말했다. < 그런 태도로 소설 읽듯이 나를 쳐다 보지마. 제발 그렇지 않아. 나는 나의 행복을 발견한 것이야. 주여, 어째서 당신은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예수가 하나님께 물었을 때, ㅡ 나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ㅡ 그러나 그는 덧붙여 말했다. 당신의 의지가 이루어지기를, 나의 의지가 아니라 > 질서의 고마움, 복종의 미덕, 제도의 틀에 얽매이는 것, 어떤 변명을 지껄이는 것. 네가 그것을 이해할까?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그의 마음 속에 있던 그 모든 것을 이미 없애 버렸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의 이러한 절망을 알아채었고 그리고 그는 일그러진, 그러나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그런 웃음을 지었다. 기차가 떠나기 시작했다.

 

 

 

 

ㅡ끝ㅡ

 

  

 

필사를 마치고.

 

촬영이 잠정적으로 중단 되고

엇갈리는 이성과 감정 사이를 오가며

맘을 다스리지 못하고 시달렸다.

가난을 두려워하면 영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안정을 버리고 영화에 바친 청춘이 아까워서 술을 마시고

어디론가 도망 가고 싶은 맘을 다스리느라

나는 미친 듯이

정말이지 거의 미친 듯이 음악을 들었다.

거의 매일 잠을 못 이루고

24시간 꼬박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핸드폰도 없애 버리고

전화도 발신자 추적이 되는 걸로 바꾼 뒤 선별해서 받아가며

불광 암이라 불려질 만큼 두문불출 하기를 석 달째.

중학교 3년 동안 짝꿍으로 지내며 학교에서 모르는 애들이 없을 만큼

유별나게 친했던 친구의 죽음이 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칠 것 같았다.

울다 지쳐 허기가 지자

친구의 죽음 앞에서

배가 고프다는 사실 또한 인정 하기 쉽지 않았다.

미칠 것 같았지 미쳐지진 않았다.

 

그랬다.

적어도 미치고 싶지는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어디론가 날 미친 듯이 빠져 있게 만들어야 했는데

미칠 것 같던 어느 해처럼 마라톤을 뛸 수도 없고

날마다 다람쥐 챗바퀴 돌듯이 방송국에서 일 할 때

그나마 날 살게 해 줬던 장 그르니에를 읽으며

영화에의 열망을 돈과 바꿔 살던 그 때를 회상하며  

필사를 하기로 했다.

살아 있어야 하려면 어디든 미쳐 있어야 했으니까.

 

내 허망함의 근원은 상실에서부터 오는 것 같다.

엄마와의 이별이 그랬고

엄마의 죽음이 그랬고

산사로 떠나버린 친구도 그랬고

지금은 내 곁에서 자꾸만 도망가려 하는 영화가 그렇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가 그렇고

하여 강아지에게 조차 정을 주는 것을 겁내 하는 내게

사이버 공간에서 오직 느낌만으로도

맘이 동할 수 있는 친구를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은 생경하긴 하지만

지난 3일 동안 필사를 하면서 

지금은 절판 된 이 책을 누군가에게 읽게 해 주고 싶은 맘이

적잖은 행복으로 다가왔다.

 

필사를 하며 은근히 맘이 정리 되길 고대하고 고대 했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사라지지 않을 거면 잠시나마 <정지> 이고 싶다.

장마가 끝날 무렵

어지러운 이 맘도 함께 끝나기를 바라며.

 

 

* 굵은 고딕체로 변환 해 놓은 것은 맘에 와 닿아 밑줄을 그어 놓은 곳임

 

 

l       < 내 침대 머리맡에 놓인 책. >

l        < 롤랑 바트르의 -사랑의 단상- >

l        < 무라카미 하루끼 -상실의 시대- >

l        < 야마다 에이미-120% Coool< Cool 아님 >- >

l        < -식물 도감- >

l        < 쟝 그르니에 -쟈끄-> 

l        < 기형도 -시 전집- >

l        < -성경책- >

 

 

 

2003년 7월 22일 화요일. 0시 09분. momo.

 

 

 

 

 

 

옮긴이 소개

 

함유선은 1954년 서울 출생으로 이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 했으며 동교에 출강하고 있다. 역서로는 < 붉은 말 > <지중해의 영감 > < 섬 > < 그림자와 빛 >등이 있고, < 발레리 작품에 나타난 식물적 상상력 >  < 도피를 통한 자아 회복의 가능성-장정일 론 >등의 논문이 있다.

 

 

쟈끄

 

지은이 / 쟝 그르니에

 

옮긴이 / 함유선

 

펴낸이 / 장석주

 

펴낸곳 / 청.하

 

1쇄 발행일/ 1992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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