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저희 회사 메인 화보에 쓸 그림 두점 그려 주셨습니다.
약 30호 정도인데 일년간 사용하고 지금의 회사 정신이 변질 되지 않는다면 그림은 계속 써도 된다고 허락 하셨습니다.
부탁하는 주제에 어찌나 까탈스럽게 주문을 했는지 선생님이 저으기 당황하시기도 했지요.
그러나 제 마음을 이해해 주셔서 며칠 밤을 새워 그려서 직접 우리 회사로 배달까지 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우리 회사에서 사도록 계획을 짰고 다행히 오너가 동의를 하셨습니다.
주제는 함께 하는 가족입니다.
부부가 늙도록 둘이 웃으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저는 출근 할 때마다 저기 가족 중 꼬맹이한테 같은 포즈를 취하며 인사를 건넵니다.
"하이~~!!"
다시 한 번 이 순구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그림이 온 세상 사람들을 웃게 해 줄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해바라기 -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이 앨범 나온 날 친구가 샀다.
앨피를 들고 성대 앞 3센티라는 카페에 가서 들었다.
라면 300원, 커피 500원 앨범 2300원 하던 시절이었다.
난 당시 아르바이트로 6만원을 벌었고 방세 5만원 내고 전기세 물세 5천원 주고 남은 돈 5천원으로
아침, 저녁은 물배를 채우며 하루 점심 라면 한끼만 먹고 살던 때라서 언감생심 앨범을 살 엄두도 못 내던 시절.
-그 때 든 버릇이 지금까지 점심만 챙겨 먹는 습관이 되었다.-
인생이 어떻고 예술이 어떻고 육갑을 떨며 희망을 꿈꿀 때 함께 하던 노래다.
해바라기 노래가 내게 힘이 되었듯이
이 순구 화백의 그림이 지치고 힘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기회가 오기를 바래 본다.
갑자기 떠 오른 생각 하나.
저 때 그룹 사운드를 이끌며 드럼을 치던 후배가 있었는데
당시 최귀정이 죽거나 말거나 음악만 좋아하며 대학 가요제도 나가고 요란하게 살았다.
그 후배가 종종 도시락을 싸다 줬다.
어느 날 내게 말 하길
"저기 제 용돈이 삼십 오만원인데요. 거기서 오만원씩 떼 줄테니 아르바이트 때려치고 글만 쓰고 살면 안될까요?"
고마웠지만 거절을 했고 지금도 잘 지낸다.
하루에 연탄 40장씩 땔만큼 잘 사는 집 아들이었다.
내 자췻방에서 친구들이랑 1밀리 간격으로 떼잠을 자도 아무일 없을 정도로 친했던,
전 인권 콘써트를 보러 떼로 몰려 다니고 이렇다 하는 앨범을 사 오면 뭉텡이로 들었던,
락과 재즈를 미친듯이 듣던 시절이었다.
지금 하는 일은?
연극 연출가이자 교수님이다.
다른 연출가와는 다르게 일본에서 가부끼와 중국에서 경극을 전공한 박사님이다.
해남에서 살아 보고 싶다고 색 하나랑 기타만 매고 와서 바닷가 마을에서 몇달 살고 갈 만큼 방랑자적 기질도 있었던 아이였다.
그 때 거기서 뭐 했냐고 물었더니 원래 계획은 소설도 쓰고 작곡도 할려고 했는데 그냥 놀았단다.
녀석 한 며칠 보이지 않더니 나타나서 하는 말.
"포장마차 가서 소주 한 잔 해요."
누구 알지 않냔다.
내가 이뻐하는 아이였다.
난 왠만해선 어떤 그룹에서고 사람들에게 무관심 하기 때문에 있는 듯 마는 듯 할 정도로 성격이 좋은 사람은 보고도 못 본 사람처럼 넘어간다.
하여 승질이 더럽거나 아니면 튀는 애들이 나 여기 있어요~~!하고 강하게 와 닿을 때만 눈길이 가기 때문에 주변에 성질 더러운 애들이 좀 많다.
내가 보기엔 똑 같은데 서로 승질 더럽다고 친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 친구니까 서로 봐 줄 뿐.
승질 드러운 사람의 특성은 따뜻함이 숨어 있어서 의리 하나는 죽여 준다.
사람들이 그걸 파악을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성질만 드럽다고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 아이 역시 한 승질 했다.
신발을 매일 갈아 신을 정도였고 아빠가 국회의원이라서 외국가면 원판을 사다 줘서 앨범을 일찍 접할 수 있었고
가장 쌈직한 티셔츠가 30만원대일 정도고 자가용도 로얄살롱이며 자기 차도 있었다.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어디 큰 교회서 반주를 하다 뭔 수가 틀렸는지 때려치고 재수해서 성대 사학과 장학생으로 들어 온 아이다.
카페에 가서 맥주를 마시면 무료로 주던 펑튀기나 손가락 과자를 마다하고 오징어 안주를 시켜 마시던 애.
한 번은 그 아이 집 앞에서 술을 마시다 돈을 가지러 가는데 따라갔다.
압구정동에 살던 아이었는데 족히 100미터는 되 보이는 어떤 기다란 담장 끝 대문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어마어마한 집이었다.
육백평이라고 했다.
밤 새워 술 마실 땐 일하는 아이에게 전화해서 자기가 새벽에 나간 것 처럼 침대를 좀 흐트려 놓으라고 했다.
아빠가 매일 아침 방에 들어 오는데 깨끗이 정돈 된 침대를 보면 외박한 것이 들통 나니까 그리 시킨단다.
나중엔 음악 작가가 되서 월천(방송 작가들 사이에 쓰는 용어, 월 천만원 받는-1990년대에) 작가 생활을 했다.
음악에 관한한 어느 정도로 해박하냐 하면 누구의 몇 번째 앨범 사이드 비에 몇번 째곡이 무엇인지 움직이는 백과 사전처럼 ?? 나왔다.
집에 가 봤더니 앨범이 6만장쯤 있었다.
지금도 왠만한 레코드 가게 보다 더 많다.
도도하고 교만하고 건방지고 지멋대로 사는 막무가네 스타일.
녀석은 그 아이를 경멸했었는데 갑자기 사랑하게 되었단다.
이유를 묻자 여차저차 한 일로 아이가 기절을 했는데 업고 병원으로 뛰다가 든 생각이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길레 그걸 해결 못하고 기절할 정도일까?에서 시작된 궁금증이 사랑으로 변했단다.
그 아이는 아무나 좋아할 타입의 아이가 아니다.
모르긴 해도 성대에서 가장 승질 드러운 애 뽑기하면 1등 정도는 따 논 당상일만큼 좀 거시기한 아이었다.
녀석도 늘 그 아이 흉을 봤다.
저런 미친 엑스엑스 같은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사랑이라니.
사랑하지 않으려고 학교를 나오지 않았단다. 안 보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안 되더란다.
결국 헤어졌지만 사귀긴 했다.
녀석이 웃겼던 건 당시 여자집을 다녔는데 꼭 한 여자만 찾아 갔다고 했다.
어느 날 그 여자가 자기 결혼한다고 말하는데 기분이 묘하더란다.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정이 든 것도 아니었는데 꼭 자기 것을 누가 가로채 간 느낌이라고.
왜 갑자기 이 아이가 생각 났을까?
나도 모른다.
이 음악을 듣다가 문득 떠 올랐다.
어제 은평 시민 넷 사람들 텃밭에서 나온 배추로 김장을 하는데 절이는 날이었다.
김장의 일부는 무의탁 노인들에게 기부를 한다.
난 거기서 밥 담당이었다.
갈치 조림과 시레기 국, 무나물, 호박 나물, 무채를 만들었다.
무를 좋아하는 나 때문에 무똥을 쌀 만큼 반찬을 무로만 만들었다.
갈치 조림에 무를 넣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시레기 국에도 무를 넣었다.
2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먹을 밥을 처음 해봐서 그런지 밥이 삼층밥이 되었다.
물 조시를 못 맞췄다.
덕분에 모두들 생각지도 않은 누룽지를 맛있게 먹었다.
실패 한 밥 때문에 칭찬 받았다.
푸헐헐헐.
설 익은 밥은 다시 물을 붓고 했다.
거기서도 누룽지가 나왔다.
오늘은 버무리는 날인데 가지 않을 것이다.
근 한 달만에 쉬는 날이다.
감기가 옴팡지게 걸려서 난리가 아니다.
잠이나 자야겠다.
*
웃는 얼굴도 이 노래도 내게 행복을 줬던 아이에게 선물한다.
내 생에 처음으로 술값 니가 내라고 말했던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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