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그저,,,그렇게

은희경 - 타인에게 말걸기

monomomo 2008. 12. 7. 04:18

은희경 특유의 농담이 가장 잘 살아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이 역시 잠 안오는 밤에 읽어 보라고 올린다.

Mendelssohn - Piano Concertos No. 1 & 2 - Violin Concerto, Op. 64를 들으며.

 

 

 

 

 

 

 

 

 

타인에게 말걸기 - 은희경


등뒤에서 남에게 말을 걸 때 우리는 이름을 사용한다. 이름은 그래서 필요하다. 이름이라는 공용어가 없다면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타인 가운데 그 자신이 불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할 것이며, 더욱이 어떻게 그의 눈길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길 수 있을 것인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첫번째 단계로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상대방에게 자기의 이름을 대는 일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그녀는 좀 이상하다. 남을 부를 때 모든 사람이 하듯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하다 못해 자기가 부르고자 하는 사람이 알아들을 만한 그 사람 방식의 언어로 부르지 않고 제멋대로 제가 지어낸 별명이라든지 저만 아는 언어로 부르는 것이다. 등을 보인 자에게 아예 말 걸기를 포기하는 나처럼 게으론 사람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에 그녀에게 늘 불운이 따라 다니는 것은 바로 타인을 대하는 그녀의 그 이상한 소통방식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시월 그믐날 술시에 태어났고 별자리는 전갈좌이다. 하지만 그런 것에 내 운명을 결정지어버리는 각별한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주나 점성술에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어떤 공교로운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이 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가려 그날의 운수를 점쳐보는 버릇은 있다. 이를테면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내 집에서 나오는 전화벨 소리가 복도까지 울려퍼지고 있는 경우 말이다. 서둘러 주머니에서 현관 열쇠를 찾아 끼워맞추고 돌리고 문을 열고 나서 신발을 벗고 전화기가 놓인 탁자 앞으로 급히 걸어갈 때까지도 끈질기게 울려대는 전화 누구에게나 그런 일은 있다. 전화벨 소리가 끈질기면 끈질길수록 점점 상대가 궁금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가까스로 송화기를 드는 순간 끊어져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 때는 그처럼 애타게 찾았으나 끝내 나와의 교신을 이루지 못한 상대가 누구일까 하고 그와의 어긋난 인연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된다. 반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전화를 아슬아슬하게 받아서 "여보세요"하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는, 이토록이나 나와 모진 인연을 가진 상대가 누구인지 괜히 의미를 두고 싶어진다. 내가 점을 치는 것은 바로 그런 때이다. 이런 심상치 않은 인연으로 나와 소통이 된 사람이니만큼 그가 반가운 사람이라면 오늘 운이 모조리 좋은 것이다, 하지만 내 수고를 보상해주지 않는 쓸데없는 전화였다면 오늘은 무조건 일진이 나쁘다 하는 식으로.

그 일요일에도 그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현관문을 그대로 젖혀놓은 채 숨차게 송화기를 들면서 나와 모진 인연을 가진 상대가 행운 쪽인지 불운 쪽일지 벌써부터 점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라는 말을 듣자 무심코, 정말 무심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하늘이 파랬다.

한동안 소식을 알 수 없던 그녀가 병원에 있다는 것도 난데없긴 했지만 내가 멍해졌던 것은 그보다는 그녀가 왜 하필 내게 연락을 부탁했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나로 말하자면 그녀와 전혀 가까운 사이가 아니며 위급한 상황에서 찾아야 할 각별한 관계는 더욱 아니었다. 각별한 관계라면 그녀가 어디가 아픈지 그리고 상태는 얼마나 위중한지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을 전화를 끊은 후에야 깨달을 만큼 무신경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로서는 금색의 말과 왕관이 있는 붉은 담뱃갑에서 마일드세븐 한 대를 꺼내 물며 내 마음속의 동요가 망설임인지 귀찮음인지를 가늠해보는 정도가 그녀에 대한 관심의 전부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몇 년 전 일요일, 우이동 8번 버스종점에서였다. 사내 등산 동호회가 만들어지고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의 모임이었다. 등산 동호회를 만든다는 안내문이 엘리베이터 옆 게시판에 나붙은 지 사나흘 후 홍보실 박대리가 찾아와서 동호회장을 맡으라고 할 때 나는 노골적으로 그가 "우리 회사에서 너만큼 산을 아는 사람도 드물 거다"는 뻔한 소리를 해가며 산행 때 종종 참석이라도 해달라고 청해오는 데는 여러 번 거절하기가 번거로워 하는 수 없이 참석한 자리였다. 평소에도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특히 산행에는 동행을 싫어하는 내가 모임에서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빨리 파하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그날 내 일진은 좋지 않은 듯했다. 한 여자가 시간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열대여섯 명이 버스 정류장에서 모두 담배를 피우거나 껌을 씹으며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었다. 물론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을 남기기 싫어서이다. 나는 돌출된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리부터 그 여자를 경원할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뒤늦게 나타난 여자는 미안한 기색이 전혀 아니었다. 담벼락에 기대거나 폐타이어 위에 쭈그려앉아 있다가 자기를 발견하고는 담배꽁초를 다소 멀리까지 거칠게 던지며 일어서는 사람들 몸짓이 분명 화난 모습인데도 오히려 그녀는 그녀가 입은 흰 후드점퍼만큼이나 환하고 눈부시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잰 걸음으로 박대리 앞에 다가가서 산타클로스나 된 듯이 무슨 보따리 같은 것을 눈앞으로 쳐들며 자못 당당하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자아, 제가 여기 맛있는 김밥을 만들어왔습니다.

박대 리는 기가 막혔지만 모임을 순조롭게 진행시키는 것이 회장의 할 일이었으므로 "어쨌든 왔으니 됐어요, 빨리빨리 출발하자고요"라고 그녀의 등을 떠밀며 짐짓 한시름 놓은 척해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짜증을 정돈했다. 그러나 정회원도 아닌 내게만은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내 곁에 바짝 붙어 걸으며 이런저런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다.

"저렇게 누가 바라지도 않은 일을 해준답시고 오히려 남을 곤란하게 만드는 게 저 여자 특기야. 사무실에서도 그래. 시키지도 않은 책상 정리를 해준다고 기안서류 몇 개를 쓰레기통에 처넣었는지 몰라."

별로 관심 없다는 나의 표정을 박대 리는 화가 풀리지 않은 거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지난달에 우리 부서로 옮겨왔거든. 처음에는 다들 입이 벌어졌지. 싹싹하고 또 얼굴도 예쁜 편이잖아."

나는 눈을 들어 두어 사람 건너에서 걷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기로 인해 일행 전체가 늦어진 사실 같은 데는 아랑곳없이,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유난히 짜증을 내던 한 여직원의 자주색 점퍼 소매를 다정하게 붙잡고 약간 과장되게 깔깔대고 있었다. 얼굴 빛이 창백하고 입술선이 뚜렷하여 고집 세어 보이는 점은 있었지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목소리 큰 사람이 강력하게 예쁘다고 주장하면 그런대로 예쁜 듯싶게도 보일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모든 일을 앞질러 생각할 만큼 영리하고 발상이 창의적이어서 곧잘 신선한 제안을 내놓아 기획회의를 즐겁게 만들곤 한다는 박대리의 말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고개를 젓히고 웃다가 자주색 점퍼의 어깨사이로 해서 얼핏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짧은 순간 어디선가 본 듯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뜨고 있다기보다는 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크고 깊숙한 눈이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인기가 별로야."

"왜?"

"글세, 모르겠어. 딱 뭐라고 꼬집어 말을 할 수는 없는데 어쩐지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여자야."

한번은 사소한 실수를 지적했다가 그녀가 뜻밖에 발끈하는 바람에 덩달아 언성을 높여버린 일이 있다고 한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별일 아니다 싶어서 언제 기회 있을 때 사과해야겠다고 했는데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그녀 쪽에서 먼저 자기 자리로 찾아와 정도 이상으로 간곡히 사과를 하더라는 것이다. 하루 종일 마주칠 때마다 용서를 비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다음날 아침에 눈이 마주치자 또 "저, 그때 말예요" 하고 말을 붙여오는 그녀를 보고 지겹다 못해 갑자기 묘한 적의까지 생기더라면서 박대리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오늘만 해도 그래. 우린 산 중턱에 있는 밥집에서 점심 사먹을 계획인데 말야. 참 내, 시간 맞춰 오는 게 도와주는 거지. 김밥이 뭐야. 김밥이. 제깐에는 분명 잘 한다고 한 일일 거라구.

너무 늦게 출발하다보니 김이 다 새버린 산행이었는데도 새로 조직된 동호회의 회원답게 일행이 모두 적극적이었던 덕분에 그런대로 분위기는 활기를 띠어갔다. 산행을 마치고 평창동 원조 할머니 두부집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는 모두들 기분이 좋았고 모처럼 시키는 일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원하던 일을 마쳤다는 만족감에 술잔 돌리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남자들은 동동주룰 마시고 여자들의 잔에는 맥주가 부어졌다. 그녀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인 듯했다. 다른 다섯 명의 여직원들은 맥주 한 잔을 대여섯 번에 나누어서 홀짝이는 데 반해 그녀는 잔을 제법 깊은 각도로 기울였다. 술자리가 점점 거나해졌다. 윗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불려나와 인물평을 당하고 있었다. 또 어느 술자리에서나 있기 마련인 서로의 눈물과 콧물을 묻힌 감정의 찌끼를 교환해가며 의기투합하는가 싶더니 돌연 칼을 뽑아들고서 하다 못해 무라도 벨 듯이 기세등등하다가 다음 순간 어이없이 허물어지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한통속임을 확인하며 그 비애스러운 결속을 위해서 눈물은 흘리는 짓이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내가 이따금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던 것은 그녀를 어디에서 봤는지 생각해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술자리의 지루함을 덜고 또 그 두부집의 비닐장판 위에 붙인 엉덩이의 차가운 감촉을 조금이나마 잊어보기 위해서였다. 취기가 오른 그녀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녀를 관찰해볼 셈으로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상에서 물러나와 신발을 꿰어신었다. 끈이 복잡하게 얽힌 등산화의 뚜껑을 젖히고 제대로 뒤꿈치를 집어넣기 귀찮았던지 그녀는 신발을 불안하게 질질 끌고 주방 쪽으로 가서는 기세 좋게 맥주 네 병을 주문했다. 참, 술은 홀수로 시키는 거지, 라고 중얼거린 뒤 다시 다섯 병으로 정정하기까지 했다. 아줌마가 주방안에서 곧바로 맥주병이 가득 올려진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와 탁자에 내려놓았다. 쟁반이 무거워서 아줌마의 걸음도 그녀처럼 약간 비틀거렸다.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 그녀가 말했다. 아이고 기운 센 남자분도 많은데 왜 아가씨가 들라고 그래요. 그러자 취한 그녀는 최대한 목소리를 작게 낸답시고 아줌마에게 이렇게 속삭였는데 그 소리는 헤드폰을 낀 채 이야기를 하는 경우처럼 자기에게나 작게 들릴 뿐이지 우리 자리까지 똑똑히 들린 만큼 컸다.

"저기 기등 옆에 앉은 체크 모자 쓴 남자 있죠? 그 사람을 제가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그 앞으로 들고 가서 술 한 잔 따라보려고 그러는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좋아한다는 체크 모자 박대리 앞에 가서 술을 따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몇 거음 옮기자마자 오른발이 왼쪽 등산화 끈을 밟아서 휘청한다 싶더니 기어코 쟁반이 기울어지면서 맥주병이 와장창 바닥 위로 떨어져내렸던 것이다.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진 양은쟁반의 요란한 굉음이 떨림음으로 바뀌어 사라질 때까지 큰 원을 그리며 수선을 피웠다. 우리 일행은 물론 다른 자리의 손님들까지 일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박대리와 자주색 점퍼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괜찮아요, 전 괜찮아요, 하면서 깊이 숙인 머리 위로 손을 휘휘 내젓기만 했다. 신경쓰지 말고 어서 술이나 드세요, 라고 애써 쾌할하게 말하며 스스로 병조각을 치우려고 쭈그리는 그녀를 보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미끄러지는 맥주병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쟁반 위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깨진 병 주둥이가 그녀의 얼굴 쪽을 향한 것을 나만은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쟁반을 놓친 것은 쟁반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바로 깨진 유리조각이 살을 찢는 통증 때문임은 너무나 명백했다.

군이 괜찮다고 우기면서 그녀는 혼자 화장실 쪽으로 사라졌다. 우연히 모든 것을 다 보아버린 탓에 나라도 뒤따라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세면대 거울 속에서 나를 발견한 그녀는 숙였던 머리를 쳐들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그 순간 도대체가 당치 않은 다소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아이, 괜찮다니까요"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의 벌어진 틈 사이로 벌써 피가 서너 줄기 새어나오고 있는 손으로 한쪽 뺨을 가린 채 말이다.

그때 갑자기 나는 그녀를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이 떠올랐다.

얼굴을 가린 손을 밀치고 보니 그녀의 빰은 눈밑에서 입술 옆까지 세로로 찢어져 있었다. 벌어진 살갗 속에서 피에 젖은 작은 유리조각이 마치 음험한 장소에 숨어 있는 도망자처럼 몸을 웅크린 채 희미하고 수상한 섬광을 내쏘았다. 피가 작은 파장을 이루며 계속 솟아났다.

내가 그녀를 부축하여 데리고 돌아오자 자리가 술렁였다. 박대리는 회장으로서의 책임감에 놀라기도 했지만 내게 기대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뭔지 자극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도 조금 전 그녀가 아줌마에게 속삭인답시고 말한 공개 고백을 들은 게 틀림없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내가 알리로 어쨌든 그는 여자한테 친절한 편이었다.

응급실에서 박대리는 그녀 옆에 꼭 붙어 지성스러운 보호자를 자처했다. 산에 오르며 나한테 그녀를 시답잖게 말하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당직 의사가, 보호자 한 분만 들어오세요, 라고 말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그녀를 따라 들어가면서 나에게 아주 미안하다는, 그런 한편 경쟁에서 이기기라도 한 듯한 의기양양한 표정을 얼마간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나의 관심 밖이었다. 내가 말보로를 세 대째 피워문 것은 그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응급실에 와서까지도 그녀는 한쪽 얼굴을 싸쥔 채로 오히려 제 쪽에서 나와 박대리를 안심시키려고 애쓰면 쉴새없이 지껄여댔다. 방금 술병 조각에 뾵어진 살을 꿰매려고 두부집에서 병원으로 실려온 등산객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호위를 자처하는 두 청혼자가 앞다투어 발하는 사랑의 고백을 이쪽저쪽 고개를 돌려가며 듣고 있다는 듯한, 밤이 찢어진 것은 마술에 걸렸기 때문인데 이제 막 왕자의 키스를 받아서 그 마술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공주처럼 행복하게까지 보이는 그녀가 무엇에 도취됐든 나와는 상관없었다.

나는 타인이 내 삶에 개입되는 것 못지않게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일 터인데 나로서는 내게 편견을 품고 있는 사람의 기대에 따른다는 것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란 그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되도록 빨리 알고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떠밀렸다고는 하지만 그런 내가 박대리와 함께 병원에까지 그녀를 따라왔다는 점은 도무지 어이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깨에 힘을 주어 담뱃불을 비벼 껐다. 내키지 않은 자리에 가게 되면 반드시 내키지 않은 일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을 전에도 몇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열세 바늘을 꿰맨 뒤에 반창고를 붙이고 약을 받았다. 박대리가 나를 구석으로 부르더니 병원비가 많이 나왔는데 그녀는 버스 토큰 몇 개와 천원짜리 서너 장밖에 없다면, 어떡하지 나도 집에 갈 택시비뿐인데,라고 말했다. 지갑을 꺼내며 나는 생각했다. 나쁜 일이란 한번 생기면 끝장을 보게 마련이다. 박대리는 나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저 여자한테는 말 안 하는 게 좋겠지?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면서 고맙다고 하면 귀찮기만 할 테니까 말야.

택시 정류장에서 박대리는 마치 희대의 재판에 판결을 내리는 판관처럼 엄정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어떡할래요. 몸이 그러니 혼자는 못 갈 테고 어차피 우리 중 누구랑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택시를 먼저 잡는 사람하고 같이 타고 가는 게 어떻겠어요."

"그럼 두 분 중에 누가 먼저 택시를 잡느냐에 따라서 제 운면이 결정되는 거네요."

술냄새를 풍기면 그녀는 필요 이상으로 재미있어했다.

물론 택시를 먼저 잡은 것은 박대리였다. 내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내가 질투의 소품으로 소용된 덕분에 불현듯 결속력이 강해진 그들은, 적극적인 사람이 택시를 먼저 잡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마치 자기들에게 주어진 축복된 운명이라도 되는 듯이 제멋대로 해석하며 다정하게 사라졌다. 박대리의 주머니에 그날 밤 그녀와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는 데에 쓸 돈이 충분하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시간에 기꺼이 동참할 그녀는 반창고 끝을 요령껏 일그러뜨려가며 여전히 깔깔거릴 것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한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통유리를 통해서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카페에서였다. 여자는 얼굴이 도툼하고 귀여웠다. 크게 쌍꺼풀진 눈에는 감정이 풍부한 처녀다운 약간 들뜬 표정이 있었는데 그 눈을 들어서 자주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자는 핸드백에서 콤팩트를 꺼내 열고는 거울을 수도 없이 들여다보았다. 분첩으로 고쳐 그리기도 했다. 턱을 이쪽저쪽으로 돌려 거울 속의 자기의 모습을 확인한 다음 다 됐다는 듯이 탁, 소리를 내며 콤팩트를 닫고 다시 창밖을 보는가 싶더니 얼마 안 가서 안심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다시 콤팩트를 꺼내는 것이었다. 아무튼 내가 영화 상영시각을 기다리느라고 혼자 그 카페에 들어가서 두 종류의 신문을 샅샅이 읽는 동안 그녀는 쉴새없이 거울과 창밖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거울을 보든 창밖을 쳐다보든 어쨌든 그녀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일이었다. 읽고 있던 신문에서 간간이 고개를 쳐들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그녀의 기다림이 하도 지루하고 간절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칠 줄 모르는 달콤한 기대가 깃들어 있기에 문이 열릴 때마다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데 있어 어느새 나도 여자와 거의 속도가 일치하게 되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온 것은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그 사람이 내가 앉아 있는 자리를 지나쳐 여자의 앞자리에 가서 앉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어쩐지 그는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나 반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는데도 그는 시선조차 마주쳐주지 않은 채 묵직해 보이는 엉덩이를 소파 깊숙이 묻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무척 중요한 일을 깜빡 잊을 뻔했다는 듯이 한쪽 팔을 소파 팔결이에 그대로 짚은 채 엉덩이 한쪽만을 약간 쳐들고 양복 저고리에서 돌들 말린 잡지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서 여자의 재잘거리는 말을 머리카락이 성기게 둘러쳐진 정수리 위로 흘러가게 자세를 취한 다음, 돌돌 말린 잡지의 표지를 느릿느릿 문질러 폈다. 두터운 입술을 짜증스럽게 다물고 있는 폼이 한 시간도 넘게 기다린 여자에게 변명이라도 한마디 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잡지에만 시선을 둔 채 여자의 말에 성의 없이 고개만 몇 번 끄덕이던 남자는 웨이터가 주문받은 음식을 가지고 오자 그제서야 딱 한 번 고개를 쳐들었다.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느라고 늦은 점심을 먹는데 남자는 커피만 한 잔 마신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남자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그의 주머니에서 나올 법한 이쑤시개 하나를 꺼내서 이 사이에 끼우고 여전히 잡지만 보았다. 드디어 화를 참지 못하게 된 여자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오므라이스 접시 위로 소리나게 포크를 놓아버렸다. 그래도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여자의 빠른 목소리가 놓아지다가 갑자기 멈추는가 싶더니 식탁 위의 포크와 접시들이 짤그랑 소리를 냈다. 엎드려 있는 모양을 보니 여자는 울고 있었다. 남자는 한번 힐끗 볼 따름으로 자기의 독서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눈물로도 남자의 시선을 끌어 내지 못한 여자는 약 5분쯤 더 작게 흐느끼더니 주섬주섬 핸드백과 겉옷을 챙겨들었다. 그 손길이 느리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남자의 독서속도가 훨씬 더 느렸다. 시선이 잡지의 아랫줄께에 가 있느라 더욱 깊이 숙여진 남자의 머리털 성긴 머리통은 위로 젖혀질 줄을 몰랐다. 앞으로 내려뜨렸던 스카프를 풀어서 뒤로 돌려 다시 매고 난 뒤 떠날 준비를 하는 데에 더이상은 할 일이 없어진 여자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키지 않는 첫발을 아주 천천히 떼던 여자의 걸음은 그러나 문 쪽에 가까워지자 절망의 가속도가 실려 점점 보폭이 좁아졌다. 결국 여자가 문을 열고 나가는 동작은 그녀의 비통한 마음 그대로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독서 속도가 형편없이 느린 남자는 여자가 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지금까지 코를 처박고 읽었던 페이지에서 눈을 떼고 다음 장을 넘겼다. 책장을 넘기기 전에 잠시 막간을 이용한다는 듯이 앞자리로 시선을 돌렸던 남자는 여자가 없다는 것을 보고도 다시 새로운 페이지 위쪽에 그대로 시선을 내려놓았다. 남자가 아주 짧은 순간, 숙였던 얼굴을 쳐들려는 순간이 있기는 했다. 앞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볼 마음이 들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워낙 느린 남자의 독서 속도에 이번에는 중력까지 작용했던지 반쯤 들어올렸던 남자의 머리는 다시 잡지 위로 떨어졌다. 남자가 독서에 진정한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여전히 잡지에 고개를 박은 채 손을 뻗어 습관처럼 커피잔을 들어서 입에 가져가더니 잔이 싸늘히 식어버린 것을 깨닫고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그 눈이 이제 막 글씨를 읽은 사람의 눈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권태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남자의 이 모든 동작을 여자는 창밖에서 서섯 낱낱이 보고 있었다. 혹시 뒤늦게 라도 여자를 뒤따라가 달래서 데리고 들어올까 하는 기대오 그때까지 참을성 있게 남잘르 쳐다보도 있던 내가 인간의 선의에 대한 잠시의 믿음을 포기하고 담뱃갑에서 마지막 말보로를 께내 불을 붙이려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남자를 쳐다보고 서 있었지만 기실 그녀의 시선을 아무것도 감고 있지 않은 듯이 보였다. 왜냐하면 여자의 눈은 떴다기보다 검고 기픈 구멍처럼 벌어져 있었으며 구멍 안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 사건 이후로 나는 산악회의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회사 안에서 마주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엘리베이터 옆의 게시판을 통해 그녀가 몇 달 안 가서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얼마 후 부서의 회식자리에서 그녀가 박대리와 사내연애를 하다가 결국은 헤어졌다는 뒷소문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뿐, 얼마 안 가 나는 그녀를 잊었다. 만약 그녀가 몇 달 뒤에 스스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녀를 다시 떠올리는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찾아온 때는 막 점심시간이 지나고였다. 손님이 기다린다는 메모를 보고 로비로 내려간 나는 잠시 두리번거렸다. 긴 부츠를 신고 머리를 와인 컬러로 코팅한 여자가 서 있긴 했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비에는 그 여자 혼자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혹시 나를 찾아온 거냐고 말을 붙여보았다. 그녀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두리번거리는 동안 나를 쳐다보며 계속 참고 있었던 듯 여자의 웃음은 지나치게 높았단 웃음이 조금 진정되자, 저예요 저, 하면서 그녀가 진한 색 에나멜이 칠해진 손톱으로 가리키는 왼쪽 빰 밑에는 조그만 전갈 문신 같은 흉터가 있었다.

그녀는 십 년 전 못 이루었던 첫사랑의 남자라도 만난 듯이 반가워하며 저혼자서 연달아 질문을 퍼부었다.

"그전 회사에 전화했더니 여기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데. 언제 옮겼어?"

"집은 그대로고? 전에 서초동 어디 오피스텔이라고 했잖아."

"지금도 혼자 살지?"

"산에 잘 가는 건 여전하구?"

그녀는 내게 반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더욱 언짢은 것은 그녀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韁. 사적인 얘기를 잘 하지 않느 나로서는 그때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 타인에게 제공하는 나에 대한 정보의 모든 것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귀찮았다. 더구나 그날은 부서 내에 자리 이동까지 있기 때문에 상당히 바쁜 날이었다. 어떻게 그녀를 따돌릴까 궁리하면서 나는 그녀의 출현이 나쁜 일진으 전조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 벌써부터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바쁘다고 잘라 말하는 내게 그녀는 이왕 왔으니 기다리겠다고 우렸으면, 부서 전체가 책상을 옮겨야 하기 때문에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내 말에 갑자기 기뻐하며 그런 일이라면 자기도 돕겠다고 나서는 것이었다. 그녀가 곧잘 기발한 제안을 내놓는다는 박대리의 말은 옳았다. 기어코 그녀는 내가 탄 엘리베이터에 따라탔다. 거절 이상의 거친 의사표현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나는 이제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모르는 척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풀에 지쳐서 돌아가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치지 않았다. 마치 끈기의 요정 같았다. 사무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온갖 인쇄물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충분히 외우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그 일에 흥미를 잃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때로 소파 옆에 놓인 커다란 관엽식물의 잎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복도에 낙 한번씩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는 식으로 변화를 주면서 기다림의 요령을 완전히 터득한 사람만의 경지를 과시했다. 책상 배치를 바꿔본다, 의자며 책 서류상자 파일박스 따위를 옮긴다. 전화선과 컴퓨터 선을 끊고 잇는다, 온통 사무실 안이 부산하고 북적대는데도 끄떡없는 것은 물론이고, 한동안 일에 몰두하여 잊고 있다가 문득 '설마 이제는 갔겠지'하고 그녀 쪽을 쳐자보면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지 내 쪽을 향해 활짝 웃으며 한 손을 높이 쳐들고 손가락끝을 까딱까딱하면서 자기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기를 몇 번이아 되풀이했다.

결국 나는 그녀와 마주 앉게 되었다. 차분히 앉아서 보니 그녀는 얼굴이 무척 여위어 있었다. 커피가 다 식도록 한모금 마실 생각도 안 한 채 그녀는 이것저것 쓸데없는 말만을 늘어놓았다. 말을 많이 할수록 그녀는 왜 나를 찾아왔는지 오히려 점점 용건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용건을 먼저 묻는 쪽이 그 용건의 불리한 측면을 감당하기 일쑤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나는 왜 왔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뜻밖에 그녀의 대답은 명쾌했다.

"산부인과에 따라가달라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헤아릴 틈도 주지 않고 그녀가 빠르게 덧 붙였다.

"그리고 난 돈도 없어."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는 더욱 빨라진 말씨로 변명 비슷한 말을 주섬주섬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날은 미안했어. 그치만 할 수 없었잖아. 박대리가 먼저 택시를 잡았는데 어떡해. 사실은 나도 박대리보다……."

터무니없게도 그녀는 이 부분에서 얼굴까지 약간 붉혔다.

나는 찾잔을 들어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기다림의 묘기를 보여준 것만 해도 그녀가 돈을 얻기 위한 대가는 어느 정도 치른 것이 아닌가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다른 묘기, 이를테면 과거의 인연을 부각시키기 위해 교태를 연출한다든지 하는 묘기까지는 내게 필요없었다. 나는 결코 너그러운 편은 아니지만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할 때 그 절박함이 상당히 지저분한 포즈를 요구한다는 데 수치심을 느낄 만큼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싶어하는 축이었다. 내가 지갑을 꺼내며 그녀를 안심시키는 뜻으로 순순히 내게서 돈을 건네받으며 곧 수술을 받아야 하므로 아무것도 마실 수 없다고 얌전히 대답했다. 나는 찻잔에 남은 마지막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녀가 소리쳤다.

"돈만 주는 거야? 병원에는 안 따라가고?"

거의 울 듯이 부르짓는 그 목소리를 듣고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계속해서 보호자가 같이 가서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만 한다는 둥, 게다가 자기는 수술이 처음이라 몹시 무섭다는 둥 떼를 쓰는 상대는 분명히 나였다. 카페 안의 손님들이 모두 우리, 즉 여자에게 임신을 시키고 수술비만 던져놓고 가버리려는 파렴치한 남자와 여자를 쳐다보다 있었다. 나는 그런 남자에게 꼭 어울릴 법한 비정한 냉소를 띤 채 카페를 나와버렸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또 몇 달 뒤였던 것 같다. 이번에도 나는 그녀라는 걸 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목소리도 낯설었거니와 무었보다도 내게 전화를 걸어올 여자로서 그녀의 존재가 머릿속에 입력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야. 그 동안 전화도 안 하고 미안해. 궁금했지?"

"……."

"수술은, 중절수술 말야. 생각보다 간단했어."

비로소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된 나는 이마를 찡그렸다.

"지난번에도 전화 한번 했었어. 은행에 보증 서줄 사람이 없어서 말야. 근데 자리에 없더라구."

"……."

"듣고 있는 거야?"

"……오늘은 왜 전화했지?"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는 겨울밤 얼음장 갈라지는 소리 같았다.

"저, 어제……."

그녀가 잠깐 말을 끊고 침 삼키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번에 또 어떤 묘기일지 모럴도 방어태세를 정비하겠다는 다짐에,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전화기를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어제 엄마가 돌아가셨어."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렸다.

"엄마하고 나뿐이었는데 이젠 정말로 나 혼자야. 막막하고 두렵고……아버지가 우릴 버렸을 때는 그래도 엄마가 곁에 있었는데……이제 마지막으로 엄마한테까지 버림받은 기분이야. 그래서, 그냥, 전화한 거야. 그야,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는 거기에서 갑자기 끊어졌다. 기껏 왼손으로 바꿔 쥔 전화기를 오른손으로 다시 옮기며 조금 가까이 귀를 대봤지만 전화기 속에서는 뚜뚜, 하는 기계음만 들려왔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는 그녀에게 내가 들려준 말은 '왜 전화했지'라는 단 한마디였던 셈이다. 나는 미궁에 빠진 사건의 단서를 찾으려는 수사관이 사건현장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는 것처럼 잠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려 해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카페 창밖에서 자기를 버린 남자를 쳐다보고 서 있던 한 여자의 검게 벌려진 눈뿐이었다. 그날 나는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에 실패하였다. 세 군데나 되는 회사 근처 은행의 현금지급기는 모두 다 고장이었고 저녁에 지하식당가에서 시켜 먹은 육개장 속의 숙주나물은 쉬어 있었다. 형편없는 날이었다.

그날 밤 밤늦게 빨간 말보로갑을 구기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카페에서 본 여자는 그녀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 다녔던 회사 근처의 카페였긴 하지만 이 세상에 눈이 큰 여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게 맞을 것이다. 내가 꽤 오래 관찰했기 때문에 여자의 얼굴은 기억에 생생하다. 그 여자라면 북한산에서 못 알아봤을 리가 없다. 사람에게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마지막 담배의 마지막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나는 또 생각했다. 대체 카페의 여자가 그녀가 맞다거나 아리라거나 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고. 나는 천천히 담배를 끄고 옷을 벗고 불을 끄고 잤다. 어떤 식으로든 타인의 틈입은 내가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다음해에 나는 또 한 번 직장을 옮겼다. 월급도 많아져쏘 직급도 올랐다. 앰프를 마란쯔로 바꾸었고 건강진단 때 간이 조금 나빠졌다 하여 말보로에서 마일드세븐으로 바꾼 것, 그리고 두 달 전부터 아침마다 실내 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을 하기 시작한 것이 또다른 변화라면 변화였다. 월플 빨래방에서 내 영국제 버버리 머플러와 보세 이미테이션 머플러가 바뀐 일과 갑작스러운 출장 때문에 레닌 필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 R석 티켓을 썩힌 것, 아래 층 집의 배수관이 막히는 바람에 내 집까지 목요탕 물이 넘쳐서 키스 해리의 화집이 다 젖어버린 것 등 몇가지를 빼고는 모든 것이 대체로 단조로웠다. 단조로움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최상의 생활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는 일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녀 역시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굳이 내 눈앞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 새로운 사랑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일러복을 연상시키는 깃 넓은 블라우스에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퇴폐적으로 보이던 머리모양을 어느새 생머리로 길게 길러서 어깨 위로 내려뜨린 것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문학소녀 티를 잔뜩 낸 모습이었다. 차림이 그래서인지 지난번에는 전갈 같아 보이던 왼쪽 뺨의 흉터오 갯지렁이 모양으로 약간 뭉개져 있었다. 과연 그녀가 사랑에 빠진 상대는 신문사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의 문학창작 강사였다. 신문사 건물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내가 친구의 기사 마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듯이 그녀 역시 애인의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새로운 애인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두 달 전 그녀는 뜻한 바 있어서 문화센터에 등록을 하러 왔는데 자기가 원하는 강좌에는 임 수강생이 꼭차 있었다. 마침 사무실에 나타난 한 친절한 남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 원하는 강좌를 들을 수 있도록 융통성을 발휘한 그 친절한 남자라 바로 앞으로 들을 문학강좌의 강사라는 걸 알고 그녀는 곧바로 사라에 빠졌다.

"그 사람은 나한테 책을 자주 빌려줘. 자기가 읽고 좋았던 책이라면 꼭 나도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하나봐. 서로 사랑하면 그렇게 모든 걸 다 공유하고 싶어지는 거잖아."

그녀는 남자라 빌려주는 책을 읽는 것보다는 그 책 속에서 남자의 흔적을 찾는 일에 더 열심인 것 같았다. 책갈피에 떨어져 있는 그 남자의 머리카락이나 침 묻힌 자국은 물론이고 남자가 밑줄을 그은 곳, 읽다가 접었던 곳을 유심히 살피는가 하면 특히 여러 번 읽은 부분이 어디인가 하고 책 밑바닥의 짙게 더럽혀진 부분까지 샅샅이 탐색한다고 하였다. 그녀는 그 분석의 결과를 내게 알려주기도 했다.

"그 사람은 주로 소설을 많이 읽어. 섹스 장면에서 한번도 책장이 접힌 적이 없는 걸 보면 그런 데서는 절대 책장을 덮지 않는거야. 강의 때도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그 사람은 허위의식 같은 걸 싫어하고 성을 억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남자는 리버럴할 뿐 아니라 지적이고 감수성이 뛰어난 남자였다. 양복을 자주 입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양복에 붙어 있는 그 많은 주머니들을 마다하고 와이셔츠의 가슴주머니에 담배를 넣는 데 반해 그는 양복 저고리 안쪽의 작은 주머니에 담배를 넣는 습관이 있었다. 평범한 것과 정형적인 것을 거부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주 쓰는 펜은 검은 플러스펜인데 문장이 잘 이어지지 않을 때마다 펜 꽁지를 잘근잘근 깨무는 버릇이 있으면 그녀에 따르면 그것은 사랑에 결핍돼 있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일 거라고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결혼한 남자야?"

내가 묻자 그녀는 그렇게 중요치 않은 질문에는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듯이 곧바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바로 남자의 아내에 대한 험구였다.

"그 사람 와이셔츠 소매 같은 데를 보면 거무죽죽한 것이 손빨래한 옷은 아니야. 무식하게도 세탁기에 세제를 듬뿍 풀어서 대충 때를 벗겨낸 거라고. 그래도 다림질이 잘 돼 있는 걸 보면 게으른 건 아닌가봐. 하긴 못생겼을 텐데 게으르기까지 해봐. 아무리 그 사람처럼 인격적이고 참을성 많은 성격이라도 10년 넘게 데리고 살았겠어?"

10년 넘게? 그럼 남자 나이가…… 물론 나는 그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남자를 위해서 하는 일도 많았다. 남자의 강의가 있는 날이면 언제난 이곳에서 남자를 기다렸으면 지난주에 강의를 마친 남자가 시장해하는 것을 보고 깊이 반성하여 오늘은 이렇게 샌드위치를 싸왔노라고 옆자리에 놓인 커다란 가방을 툭툭 쳐 보이기도 했다. 남자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일을 앞질러서 하고 다니는 셈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여자에 대한 취향도 다 조사해놓았노라고 말했다. 오전에 멀쩡했다가 오후 늦게 갑자기 비가 오는 날까지도 남자가 미리 우산을 챙겨온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날부터 텔레비전에서 일기예보를 하는 여자 아나운서들을 모조리 체크하기 시작했는데 과연 다음 주일에 그 중 한 아나운서가 말했던 날씨에 대한 농담을 남자가 강의시간에 그대로 인용하더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그 여자 아나운서의 말투나 화장법을 집중연구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득의만면했다. 혼자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바람에 나는 그녀의 말이 논리에 맞는지 어긋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쉼표를 찍을 약간의 휴식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친구가 커피숍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겨우 그녀의 말을 끊을 수 있었다.

내가 일어서자 그녀는 내 소맷깃을 붙잡았다. 위를 올려다보는 큰 눈이란 자칫 슬퍼 보이기 쉬운데다 그녀의 간절한 표정이 간절한 표정이 그럴싸했기 때문에 나는하마터면 그녀가 나와 가까운 사람인 듯이 느낄 뻔했다. 그녀가 말했다.

"찻값은 내가 낼게. 그냥 나가."

바라보고만 있는 나에게 그녀는 "나 돈 많아"하더니 정 못 믿으면 할 수 없다는 듯이 짐짓 쾌활한 몸짓으로 가방의 지퍼를 열고는 그 안에서 지갑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그녀가 약간 과장되게 흔드는 바람에 지갑 안에서 공중전화카드 한나가 떨어졌다. 이상하게 그녀는 상당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 카드를 황급히 집어 넣으려고 접힌 지갑을 펼쳤을 때 나는 그녀의 지갑 속에서 족히 너덧 개는 되어 보이는 공중전화카드를 보았다.

"그 사람한테 전화할 때 쓰려고. 통화하다가 끊어지는 게 싫어서 넉넉히 갖고 다녀."

그녀가 변명했다.

"집이 시외인 모양이지?"

그녀는 돌연 멍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몰라."

"모른다구?"

"아직 전화번호를 몰라."

"그럼……."

"아니야! 같이 자긴 했어."

그녀가 너무나 단호하게 발음했기 때문에 그 말은 마치 마땅히 치러야 할 의무는 다 치렀다는 뜻으로 들렸다. 순서에 의해서 자기 앞에 다가왔을 뿐인 검표원엑 무임승차가 아니라고 제풀에 발끈하는 기차 승객 같기도 했다. 먼 곳의 불빛을 향해서 온몸에 생채기가 난 채 밤새 더듬어가는 나그네가 있다면 그 순간 그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듯도 싶었다. 죽을 힘을 다해서 불빛을 향해 가고 있는 간정한 희망, 그 불빚이 허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르지만 밤길 속에서 불안이란 곧나로 절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나그네의 표정은 무엇보다 자기를 믿어야만 한다는 안간힘으로 단호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시간이란 하루안 일 주일, 혹은 한 달을 단위로 하여 한 묶음씩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나는 여전히 내가 원하는 단조로움 속에서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다. 만날 수 없어 불안한 애인이나 이루지 못할까봐 조바심나는 희망 따위의,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들을 처음부터 포기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따금 외로움 비슷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스포츠센터의 푸른 풀 속에 뛰어들거나 말러의 교항곡을 듣거나, 혹은 이튿날 아무런 뒷맛도 남기지 않는 그저 그런 여자친구와 밤을 보내는 정도로 쉽게 가셔졌다. 가끔 그녀를 생각했다. 담배를 꺼내며 언뜻 내 손이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정도, 아주 가끔. 참, 나는 담배를 다시 말보로롤 바꾸었다. 말보로에서 마일드세븐에서 다시 말보로로.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그것이 사소한 아이디어로써 내 단조로움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멋진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나는 아침 이른 시각에 낙원상가 앞을 지나게 되었다. 가려고 하는 거래처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기 때문에 나는 차를 인도 쪽으로 바짝 붙이고 액셀러레이터를 천천히 밟으면서 간판들을 살피고 있었다. 신호대기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서 있을 때였다. 길가의 커피자판기 앞에 서 있는 한 여자가 무심코 눈에 들어왔다. 아마 골목 어딘가의 여관에서 밤을 보내고 나온 모양이었다. 여자는 앞을 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보행신호인데도 길을 건너지 않고 멍청하게 서 있는 것을 보면. 헐렁한 치마 위로 내놓아진 남방셔츠의 아래쪽 단추가 떨어져나가 옷자락이 배꼽 근처까지 벌어져 있었는데 그런 옷매무새나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흐트러진 몸가짐이 영 무신경하고 둔해 보이는 여자였다. 지난밤 저 여자의 몸을 더듬었을 남자는 아마 절박함이나 따스함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를테면 상대가 저 여자가 아니라도 무방한 그런 종류의 배설에 가까운 정사를 치렀으리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았다. 바람이 좀 부는 날씨라서 단추가 없는 여자의 남방셔츠가 자꾸 들쳐졌으므로 자기가 밟고 서 있는 휴지조각만큼이나 구겨지고 지친 모습인 여자는 느리게 한쪽 손을 들어서 남방셔츠의 앞섶을 붙잡았다. 그러다 문득 여자는 자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에 허연 휴지가 말라붙어 있었다. 손톱으로 긁어보려 했지만 지난밤 사랑 없는 남자의 정액으로 접착된 그 휴지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휴지가 붙은 손가락을 옥수수를 먹듯이 이빨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누가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던지 잇몸을 드러낸 그 자세로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차를 출발시키며 정면에서 보니 어디서 본 듯도 싶은 여자였다.

그날도 일진이 나빴다. 결국 거래처를 찾지 못해 전화를 두 번이나 해야 했고 힘들게 찾아가보니 만날 사람이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거기에서 나와보니 내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우고 차를 세워 놓았던지 누군가 타이어에 펑크를 냄으로써 화풀이를 해놓았는가 하면 자리를 비운 사이 새로 들어온 카피라이터 하나가 내 컴퓨터에서 작업을 하다가 파일 하나를 몽땅 날려버렸다. 담뱃가게에 말보로가 다 떨어져 하는 수 없이 마일드세븐을 사야 했다.

나는 담배를 끄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쨌든 그녀가 이렇게 병원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장소에서 불러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나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켰다. 여자 진행자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매끄러운 나머지 귓속에 들어오는 즉시 흘러나가버리고 있었으면 남자 초대손님의 목소리는 전문성과 소신에 가득 차서 웅웅거렸다. 여자 진행자는 우리나라의 교통사고 사망률이 세계 1위라고 고지할 때는 자못 침통한 목소리이더니 바로 다음 순간 "다행히 오늘의 교통사고 사망자는 열한 명밖에 되지 않네요. 선생님. 정말 다행이지요?"라고 할 때는 재빨리 기쁜 어조로 억양을 바꾸었다. 나는 '다행'이라는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대체 누구한테 다행이라는 뜻일까. 살아남은 사람, 이를테면 라디오를 듣기 전까지는 내가 교통사고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나까지를 포함해서,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다행이겠지만 그 날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목소리'라는 게 원래 아무 상관없는 대다수의 사람이 듣기에는 객관적으로 들리는 점이 있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로 저 여자 진행자처럼 필요에 의해서 그런 목소리를 내도록 훈련을 받기도 한다.

그녀가 마침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왼쪽 뺨의 흉터를 보고 6인 병실 안에서도 쉽게 그녀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녀의 병상 주위는 물주전자 하나 없이 썰렁했다. 내가 침대시트를 끌어올려서 그녀의 드러난 한쪽 발을 덮어준 것은 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그녀가 눈을 떴다.

"올 줄 알았어."

나는 누가 나를 반기는 것은 질색이다. 그 반가움에 값할 일이 귀찮고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차라리 실망시키는 쪽을 택하곤 하는데, 그녀에게 내뱉는 말 역시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교통사고라니까 병원비 때문도 아니겠고, 나한테는 왜 연락했지?"

그녀가 기운 없는 가운데에서도 약간 깔깔 소리를 냈다.

"네가 곁에 있어줬으면 하고."

"무슨 소리야?"

"전에도 말했잖아. 난 수술이 무서워."

"무서워서 날 찾았다는 거야?"

나는 이 병실에 들어선 것을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아플까봐 무서워하는 게 아니야. 난…… 깨어나는 일이 무서워."

그녀는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느낌 알아? 어디선가 아련하게 소리가 들려. 기계 소리 아니면 발소리, 문소리, 사람의 목소리…… 그 중에 어떤 한 소리를 듣고는 깜빡 의식이 돌아오는 거야. 그때 정말 무서워. 꼭 아주 낯선 세상이란 말야. 아직 완전히 마취가 안 풀려서 온몸이 꽁꽁 묶인 것같이 꼼짝할 수가 없는데 간호사들은 그 낯선 세상에 어울리는 아주 낯설고 무심한 목소리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며 휴가날짜를 조정하고 있어. 왜 있잖아. 지금 꾸고 있는 악몽에서 빨리 깨어나려고 발버둥치는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때, 꼭 그런 때 같아. 사실 난……."

애써 말을 이으려고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려나왔다.

"아침에도 그래. 아침마다 깨어나는 순간이 무서워."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누군가 곁에 있었으면 하는 거야. 만약 내가 결혼을 한다면……."

순간 조금 전까지의 절박함은 간데없고 그녀의 웃음에는 언젠가처럼 이 상황에서 도무지 얼토당토않은 교태가 떠올랐다. 그것을 보자 나는 어쩐지 그녀의 다음 말이 분명 나에게 좋지 않은 말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내 동작을 따라 눈을 위쪽으로 치뜨면 그녀는 그러나 기어코 이렇게 말을 맺는 것이었다.

"그 상대는 너일 거야."

병실을 나오려던 나는 운 나쁘게도 그녀의 링거를 바꿔 끼우러 들어오던 간호사와 마주쳤다. 내게 전화를 걸었던 장본인인 듯 여자는, 오셨네요, 하면서 알은척을 했다. 호기심이 많거나 수다스럽거나 둘 중의 하나였던지 간호사는 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그녀의 상태에 대해 원하지도 않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인대가 끊어지고 무릎뼈가 으스러지긴 했어도 석 달쯤이면 깁스도 풀고 목발에서도 해방될 거라며 교통사고를 담당하는 원무과 직원을 한번 만나보는 게 좋을 거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주기도 했다. 간호사는 또 조금 전 라디오의 여자 진행자처럼 "그만하기 다행이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했다. 그러고 보니 매끄러운 말씨도 좀 비슷한 것 같았다. 마지막을 간호사는 나와 그녀를 향해서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는 천사의 미소나 되는 듯한 의미심장한 웃음을 던진 뒤 병실을 나갔다. 아까부터 내 머릿속에 들어차 있던, 왜 내가 이곳에 왔는지 나 자신에 대한 의구심과 후회를 더욱 강력한 것으로 만들어주면서,

내 등뒤에 대고 그녀가 말했다.

"내일 또 올 거지?"

"뭐?"

내 목소리에 충분한 짜증이 섞여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명랑했다. 오히려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그녀를 더욱 즐겁게 하기라고 한 듯 그녀는 깔깔 웃었다.

"그때 말야.'

그녀의 검은 눈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산부인과에 따라가달라고 처음 찾아갔을 때, 왜 하필 너였는 줄 알아?"

"왜 그랬는데."

"네가 친절한 사람 같지 않아서야,"

"……."

"거절당해도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았어."

담배를 꺼내려고 주머니를 더듬다가 나는 그녀가 잘 관찰했듯 대부분의 남자들이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 담배를 넣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만약 병원에 따라가준다 해도 너한테라면 신세진 느낌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지. 남의 비밀을 안 뒤에 갖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정 같은 것, 그런 것을 나눠주지 않을 만큼 차갑게 보였기 때문이야."

"……."

"난 네가 좋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냉정함 말야. 그게 너무 편해. 너하고는 뭐가 잘못되더라도 어쩐지 내 잘못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불을 붙이려던 나는 이곳이 병실 안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고 담배를 도로 담뱃갑 안에 집어넣었다.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이제 보니 그녀의 벌어진 눈 속은 꽤 깊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그렇게 냉정하게 살 수 있는 거지? 사실은 너도 겁이 나서 피해버리는 거 아니야?"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서 뺨 위의 흉터가 함께 끌려다니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 흉터는 몇억 년 전의 사암 속에서 발견된 연체동물의 화석처럼 이미 사라져버린 삶의 어렴풋한 흔적을 느끼게 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치었다는 택시가 사력을 다해 급정거를 함으로써 오히려 그녀가 원했던 죽음과 절망을 유보해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 택시 운전사도 나처럼 그녀를 만나서 일진이 나빴던 것만은 틀림없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끊어지려는 순간 송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러나 저쪽에서는 깔깔대는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점을 쳐볼 필요도 없이 역시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 나는 소리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도 외출엣 돌아왔을 때의 습관대로 먼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며 나는 샤워바스가 엎질러져 있지 않은지 타월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젖어 있지나 않은지 살펴보았다. 샤워를 마치고 폴로 조깅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냄비에 정량의 물을 붓고 조심해서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냉장고에서 저칼로리 우동을 꺼내 봉지를 찢을 때도 성급히 귀퉁이를 크게 찢어서 내용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생각해보니 전화 속의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였던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끓는 물 속에 액상스프를 넣었다. 내가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일까.

냄비 안의 우동 스프가 뭔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간장색이 배어나오기 시작해야 하는데 건조된 부스러기가 둥둥 떠다녔다. 액상스프가 아닌 분말스프를 먼저 넣은 것이다. 나쁘게 정해진 일을 피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언제나 내 머릿속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하는 말이 떠오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는 단조로움을 원한다.

 

끝.

 

역시 굵은 고딕으로 된 부분이 가장 와 닿았다.

그럴 사람 마저도 없다는 느낌이 든다면 지나친 과장인가?

느낌,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냥,,,그저,,,그렇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  (0) 2008.12.14
2008 - 12 - 1 달, 목성, 금성.  (0) 2008.12.09
겨울 바다  (0) 2008.12.04
콩떼기밭을 클릭하면 행복해져요.  (0) 2008.11.30
더불어 살자고라고라?  (0) 2008.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