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라!
씬 1 골목길
돗수 높은 안경을 낀 사내 큰 배낭을 메고 골목길을 걷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숫자를 세듯 손가락을 접는다.
골목을 꺾어 돌 때마다 제식 훈련을 하듯 정확하게 좌향좌나 우향우를 한다.
사내, 고개를 들어 주변의 간판이나 건물의 글씨들을 읽거나 풍경을 눈에 넣을 듯 뚫어져라 본다.
발이 벼룩 시장 설치대에 걸려 넘어진다.
전자 오락을 하던 꼬마, 넘어지는 소리에 놀라 뒤돌아본다,
땅 바닥을 더듬으며 안경을 찾는 사내.
안경을 찾지 못하자 꼬마가 찾아서 손에 쥐어준다.
사내 안경을 받아쓰고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옷을 털며 걷는다.
꼬마, 사내의 행동을 익히 아는 듯 손가락을 접으며 사내가 걷던 흉내를 내며 뒤를 따른다.
사내, 옷을 다 턴 뒤 소년과 같은 모습으로 걷는다.
걸음걸이는 여전히 제식 훈련 하듯 걷던 사내,
마치 건전지를 넣어 놓는 자동 인형처럼 정확하게 비디오 가게문을 향해 들어간다.
소년, 사내가 들어가자 전자 오락기로 달려간다.
-게임 오버-라고 쓰인 화면을 보고 전자 오락기를 발로 차는 꼬마.
씬 2 거실
침대에 누워서 비디오를 보는 사내.
비디오를 보는 사내, 자주 안경알을 닦아 쓰고 눈을 비비기를 반복한다.
화면이 흐리게 보이다 선명하게 보이다 반복한다.
한 쪽 벽면에 사내의 사진이 종류대로 걸려 있다.
-미스터 맥도날드 류-내용과 상관없이 담담히 보는-
씬 3 안경점
시력 도표에 지휘봉이 가리키는 글자를 읽는 사내.
지휘봉이 글자를 가리키자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크게 떴다 작게 떴다를 반복한다.
안경점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커다란 글자들을 가리킨다.
새로 안경을 받아든 사내, 진열대 위에 놓인 스탠드형 거울 앞에 선다.
흐릿한 거울 속의 사내. 안경을 바꿔 끼자 선명하게 보이는 시야.
씬 4 전봇대 앞
걷던 사내 걸음을 멈춰 서서 전봇대에 쓰인 광고( 화려한 사진이 든 여행상품 광고)를 읽는 사내.
씬 5 식당
라면 봉지를 읽으며 라면을 먹던 사내,
라면 수증기에 안경알이 흐려지자 런닝셔츠에 닦은 후 라면봉지를 읽는다.
씬 6 방
서랍을 정리하는 사내.
양말은 양말끼리, 팬티는 팬티끼리.
티 셔츠, 바지도 잘 정돈한다.
씬 7 거실
비디오를 보는 사내, 자주 안경알을 닦아 쓰고 눈을 비비기를 반복한다.
화면이 흐릿하게 보이다 선명하게 보이다를 반복한다.
사내 일어나서 VCR을 때려보고 텔레비전도 때려본다.
변화가 없는 화면.
공구통에서 여러 가지 공구들을 꺼내 놓고 비디오를 분해한다.
씬 8 화장실
화장실을 정리 정돈하는 사내.
여기저기를 손뼘으로 거리를 잰다.
물을 틀어 손을 씻던 사내, 무심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본다.
흐릿하게 보이는 얼굴. 물로 거울을 닦아 본다. 여전히 뿌연 얼굴.
사내, 푸카푸카 얼굴을 문지르며 세수를 한다.
다시 거울을 보는 사내. 거울 속의 자기 얼굴 만져본다.
깊이 각인해 두려는 듯, 연인의 얼굴을 애무하듯 만진다.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서 있다가 칫솔을 보지 않고 꺼내 치약을 묻혀 이를 닦는다.
씬 9 안경점
시력 도표에 지휘봉이 기리키는 글자를 읽는 사내.
지휘봉이 글자를 가리키자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크게 떴다 작게 떴다를 반복한다.
안경점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커다란 글자들을 가리킨다.
뭔가 잘 되지 않은 듯 설명을 하고 있는 안경점 주인.
알았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나가는 사내.
씬 10 사진관 앞
사진관으로 들어가는 사내.
어금니까지 보이게 활짝 웃고있는 진열용 사진.
사진관에서 나오는 사내.
손에 사진이 들려 있다.
사진을 보며 걷는 사내.
사내의 눈만 크게 확대된 사진.
씬 11 거실
한 쪽 벽면에 있는 사진 옆에 눈 사진을 잘 보이게 놓는다.
능숙하게 비디오를 볼 준비를 하는 사내.
비디오를 보는 사내.
화면이 흐릿하다.
안경을 벗어 놓는 사내.
비디오를 보는 사내.
화면이 까맣다.
거의 사방이 보이지 않는다.
대사와 음악만 들린다.
비디오를 보는 사내.
눈을 감고 비디오를 보는 사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고 계속 리모콘을 작동하여 음악에 맞추고 비디오를 본다.
눈을 감고도 비디오가 보이기 시작한다.
- 끝 -
연출의 변
마음의 눈으로 뭔가를 볼 수 있다는 것.
눈을 감고도 뭔가를 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항상 나를 긴장시키는 것이었다.
보고 싶으면 눈을 감고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외형적인 -본다-는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주제를 가장 잘 살릴 수 있을까를 고민 하다가 소재를 맹인으로 택했다.
중의적으로 표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지금 고민인 것은 혹여 외형적으로 -보다-만 잘못 보여 질까봐 걱정이다.
사족 같은 느낌으로 구구하게 널부러 놓기도 좀 뭣하고.
한때 말이 듣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을 때가 있었다.
언어, 말.
그 폭력성과 횡포,
그리고 무용성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말이 없는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대사가 없다.
여하튼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
짱짱 ^*^))// 방글방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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