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영화

소년 다리를 건너다.-시놉시스

monomomo 2002. 10. 5. 13:00












<소년, 다리를 건너다> 시놉시스


―1
강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쪽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한 반면, 아래쪽에는 낮은 지붕들이 잇대어져 있는 빈촌이 올망졸망 둥지를 틀고 있는 천변 마을.
그 두 마을을 이어주는 낡은 나무 다리가 걸쳐져 있다. 원래 두 마을을 이어주는 길이 있지만, 멀리 돌아 다녀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지름길로 마을 사람들이 임시로 얽기설기 엮어 만들어서 삐걱거리고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다.
그 다리 가까운 천변에 간판도 없이 자리잡고 있는 김노인의 고물상. 슬레이트 지붕으로 빗물 듣는 소리 요란하고, 비닐 천막 안쪽에는 각종 유리병과 페트병이며 깡통, 플라스틱 용기들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다. 비닐끈으로 묶어놓은 신문이며 잡지, 종이류들은 따로 비닐이 씌워져 있고, 그 위에 낡은 저울이 묵직하게 놓여 있다. 저만치서 장화 신은 발이 빗속을 느리게 걸어온다. 고물상 마당 밑으로 들어서며 우산을 접는 사람, 김노인이다. 김노인, 비닐 봉지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나와 방으로 들어간다.
안쪽에 자리잡은 김노인의 방.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오래된 서랍장과 그 위에 반듯하게 얹어놓은 이불, 옷걸이에 걸린 옷들, 그리고 14인치 고물 텔레비전 윗벽에 걸린 부부의 흑백 사진이 차례로 보인다. 방을 반 너머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에 쓰려는 것인지 모를 자잘한 물건들과 낡은 연장들.
젖은 웃옷을 옷걸이에 걸고 천천히 텔레비전을 켜고는 초점을 맞추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화면을 들여다보는 김노인. 채널을 돌릴 때마다 현란한 쇼 프로그램, 방청객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 들리는 오락 프로그램, 코미디 등이 나오다가 문득 화면이 멎는다. 푸른 바다 한가운데의 작은 돌섬에 떼지어 누워 있는 바다사자들. 둔중한 몸을 움직이고 커다란 이를 드러내며 영역 싸움이 한창인 놈들도 있다.

김노인이 아내의 무덤가를 손질하고 있다. 잡풀을 뽑다 말고 문득 비어 있는 옆자리를 바라보던 김노인, 빙그레 미소를 띤다. 가져온 막걸리 한 병을 무덤 주위에 뿌린 뒤 북어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던 김노인, 무덤 옆의 빈 자리에 가만히 드러누워 본다.
며칠 전 김노인은 친척 노파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장성한 아들딸들이 있는데도 혼자 살더니 죽은 지 열흘만에 발견된 불쌍한 할머니. 관 위에 흙을 다지며 노래를 부르는 일꾼들 주위에 지친 표정의 가족들이 있었고, 한쪽의 돗자리에선 몇몇 늙은 조문객들의 술판이 한창이었다.
“올해 야든 서인가 너인가 잡쉈지 아마. 아들 딸네 돌아댕기믄서 손주들 키워주구 살림 살다가, 오륙 년 전부텀 혼자 사셨을 거라. 짐 되기 싫다 그거지. 뭐,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씩 오던 자식들이 한 주씩 건너뛰는가 싶더니 그게 한 달이 되구, 낭중엔 명절이나 생일 아니믄 들여다보기나 했간디. 워낙 깨끔한 냥반이라 혼자 살어두 살림 하나 빈틈이 없었는디. 작년인가 한 번 입원했다 나온 뒤루는 영 그전만 못혀드라구. 그래, 겨울 가구 날 풀리니께 맥�이 명줄 놔버린 게지 뭐. 근대 저 냥반 가구 나서 며칠만에 발견헌 줄 아슈? 열흘이여 열흘. 그것두 참, 막내딸네 초등핵교 댕기는 손녀가, 핵교 갔다 들어가는 길에 하냥 들러봤다 발견했다누먼. 지 할매가 마지막으루 키운 손녀가 핼미 정이 그리웠는지, 그 전에두 가끔 일�이 들러서 잠깐씩 놀다 가구 그랬다나. 아까 자석들끼리 쑥덕거리는 소리 들어봉께, 지 아부지 기일이 음력 4월이닝께 까딱 잘못 했으면 한 달 보름이나 지나서야 발견할 뻔했다는 거여. 안 그래두 발견할 때 할매 몸이 살짝 맛이 갔었다는디, 아주 형체 무너진 담에 알었으면 저것들 얼굴이나 들고 다녔겄어? 암튼지 대가리 굵은 자석들이 어린 손녀만두 못헌 법이랑게.”
조문객들의 호기심어린 물음에 자신의 아들은 미국으로 이민가서 자리잡은 지 20년이라고 둘러대는 김노인. 그럼 그쪽도 죽으면 얼마 만에 발견될 지 알 수 없는 일이라며 이웃이라도 잘 사귀어두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얘기를 들으며 자리를 떴다.
부엌 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오는 김노인. 밥상 위에는 라면 냄비와 김치 종지 하나뿐. 텔레비전은 저 혼자 떠들어대고, 김노인은 라면을 안주삼아 막걸리 잔을 비워댄다.
그 날 밤, 김노인은 꿈을 꾼다. 방 안에 혼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 자고 있는가 싶었는데, 점점 몸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구더기까지 끓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김노인의 얼굴 위로 "연고자도 없는 것 같은데 태워서 강에 뿌려버리지, 뭐." 하는 사람들 소리. 사진 속의 죽은 아내 얼굴 위로 피눈물이 흐르며 벽을 적신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는 김노인. 주전자 꼭지를 입에 대고 벌컥벌컥 마신 뒤, 입가를 닦으며 무언가를 떠올린다.
초상집에서 김노인은 ‘영’이라는 아이를 만났다. 아니, 우연히 보았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는 이 꼬마녀석은 호기심의 화신인양 시골집 구석구석을 훑고 다녔고, 오랜만에 대하는 어린 녀석에게 김노인은 막연한 애정을 느낀다. 꼬마의 부모는 맞벌이 부부로 하룻밤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꼬마 ‘영’이는 처음 대하는 시골의 장난거리에 눈이 팔려 더 있으려고 고집을 피운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김노인은 자신이 아이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운좋게도 김노인네와 아이집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었다.


―2


‘영’이라 불리는 이 아이는 늘 혼자였다. 맞벌이 부부인 엄마와 아빠는 늘 이런 말을 하며 외출하곤 했다.
“피아노 학원에서 다른 데 빠지지 말고 곧장 와.”
“낯선 사람하곤 말하지마.”
“누가 맛있는 거 준다고 해도 절대 받으면 안돼.”
“핸드폰이랑 열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목에서 빼지마.”
“우리 나간 뒤 잊지말고 문 잠궈!”
혼자 노는 이 아이는 베란다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곤 했다. 그곳에는 낡은 다리와 낮은 집들, 그리고 개미처럼 꼼지락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보는 것만으로 지루해지면 어느 구석에서 발견한 삼각 프리즘을 통해 일렁이는 세상을 봤다. 형형색색의 햇빛 속에 놓인 세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있는 미니어처 같기도 했고, 또 언제나 자기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변해버리는 구름 같은 곳이었다.
어느 날 베란다에서 요요를 가지고 놀다가 잘못 놓쳐버렸다. 아이는 잔디밭에 떨어진 요요를 찾아 마침내 집을 나온다. 그리고 멀리 위에서만 바라보던 낮고 조그마한 곳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망태를 짊어지고 비닐 봉투를 든 김노인이 목장갑을 낀 채 느릿느릿 천변을 뒤지고 있었다. 맥주 캔이나 소주병은 집어서 망태에 넣고, 담배꽁초며 휴지 나부랑이는 비닐에 넣는 식이다. 그러다가 깨어진 거울이나 의자를 보면 하릴 없이 주워서 집에 가져왔다. 그렇게 모은 잡동사니들로 집안이 가득차도 큰 재산이라도 되는 양 모아두고 바라보았다.
어느 날 강둑을 뒤지던 노인의 눈에 영이가 들어왔다. 깨어진 요요를 손가락에 낀 채 우두커니 선 아이. 김노인이 개천가 돌더미 위에 앉아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그렇게 서있던 아이는 김노인이 장난 삼아 거울로 반사광을 보내자 화들짝 놀라 도망가버린다. 깨어진 요요만 그 자리에 남긴 채.


-3


매주 수요일은 폐지를 모으는 날. 일찍 움직이지 않으면 딴 노인네들에게 뺏길 터였다. 고물상에서 빌린 리어카를 가지고 건너편 아파트촌으로 간 노인은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오던 영이를 만난다. 그리고 자신이 고친 요요를 아이에게 준다. 발그레 웃는 아이. 하지만 김노인이 주머니에서 내민 사탕을 보자 마치 따귀라도 맞은 듯 뒷걸음질친다. 그리곤 달아나 버린다.
며칠 수 아이는 어느 새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엄마 아빠의 세상과 전혀 다른 그 곳으로 통하는 길. 온통 새로운 것들. 날벌레가 윙윙거리고 바닥이 보일 듯 말 듯 얕게 흐르는 냇물, 그리고 삐걱거리는 허름한 나무 다리.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탐험에 나선 아이의 조그만 발이 낡은 다리에 난 구멍에 빠지고 신발이 벗겨졌다. 운동화는 개천에 떨어져 점점 멀어져갔다. 생일선물로 받은 새 나이키 운동화가 떠내려가는 것을 그렇게 멀거니 볼 수 밖에 없었다. 첫탐험은 실패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천변에 나간 김노인. 그러나 웬일인지 고물과 쓰레기 줍는 일은 건성이고, 자꾸만 다리 건너를 훔쳐본다. 이마에 손을 대고 해를 쳐다보며 시간을 가늠하는 김노인. 그러나 다리 건너편에는 가끔씩 산보하며 오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촌 쓰레기장을 겉돌며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까지 행여 아이를 만날까 기대하며 주위를 배회했다. 분리수거장을 어지럽힌다며 타박을 주는 경비원과 짧은 실랑이를 벌이고 돌아서는 김노인 앞에 피아노 가방과 요요를 든 아이가 서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냇가에서 주운 운동화를 내밀었다. “짝을 잃은 운동화는 아무 쓸모가 없는겨”라고 말하곤 그냥 돌아섰을 뿐이다. 그런데 살풋 돌아서는 김노인의 리어카를 아이가 잡았다.
“태워주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날 저녁 어두워질 때까지 노인은 아이를 태운 리어카를 끌고 목적지도 없는 산책을 했다. 신바람이 나서 “좀 더요! 좀 더 빨리요!”라며 달랑달랑 발을 흔드는 아이를 보며 양쪽 마을을 서너 바퀴 돌았다.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것이 그저 빨리 달렸기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노인은 알고 있었다.
마침내 아이가 다리에 모습을 드러내고, 김노인은 반갑게 아이를 맞는다. 그 동안 감기 때문에 학원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다는 아이. 김노인은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뭔가 특별한 것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다.
폐타이어를 예쁘게 칠해 쌓고 묶은 뒤 말끔히 갈아낸 판자를 올려 탁자를 만들고, 폐타이어로 의자도 만들어주는 김노인. 페트병을 자르고 나무젓가락을 이어 멋진 바람개비도 만들어준다. 바람개비를 잇대고 또 잇대어 거대한 바람개비들이 완성되고. 그렇게 하루하루 몰라보게 달라지는 모습에 즐거워하며 아이는 매일같이 김노인의 집으로 찾아온다.
어느 날 김노인은 아이를 앉혀놓고 병뚜껑으로 탑을 쌓으며 죽은 사람을 본 적 있냐고 물어본다. 작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긴 했지만 죽은 모습을 본 적은 없다고 대답하는 아이. 하지만 죽은 사람을 보면 무서울 것 같다고 한다.
김노인은 아이에게 사람이 몇 살까지 살 수 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백 살 먹은 할머니를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고 대답한다. 김노인은 몹쓸병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만 산다면 150살까지도 살 수 있다고, 그런데도 7, 80이면 죽는 것은 나머지 삶을 다른 데서 다른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연속극처럼 2부, 3부의 삶이 있는 거라고. 그렇게 된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아이. 김노인은 아이에게 다음에는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냐고 묻는다. 아이는 예쁜 돌고래나 만화영화의 주인공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다음에는 기러기 같은 철새로 태어나 동무들과 함께 넓은 하늘을 제 집처럼 날아다니고, 이 나라 저 나라 유람하며 살고 싶다고 말하는 김노인.
어느 날 김노인은 장판 밑에서 돈을 꺼내 아이와 함께 시내로 나간다. '어항/수족관'이라 쓰인 상점으로 들어가 아이와 함께 금붕어를 고르는 김노인. 물고기밥과 함께 지느러미가 아름다운 금붕어 다섯 마리를 사가지고 돌아온다. 마당에 색색깔의 종이로 접은 깔개를 놓고, 그 위에 유리판을 깐 뒤 그 위에 폐타이어 두 개를 겹쳐 쌓고 물을 붓는 김노인. 그 안에 금붕어를 풀어놓자 아름다운 어항이 된다. 탄성을 지르는 아이에게 금붕어 먹이 당번의 임무를 주는 김노인. 금붕어가 굶어죽지 않도록 매일 와서 먹이를 주라고 부탁한다. 아이는 기뻐하며 금붕어마다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같이 김노인의 집에 드나든다.
혼자 죽는 두려움,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사람 냄새를 맡고 싶다는 외로움이었을까? ‘영’이는 죽음이 뭔지나 알까? 개미집을 쑤시고 매미 다리를 뜯으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이 아이에겐 아직도 죽음이란 그저 유희며 놀이감이 아닐까?
부쩍 말수가 늘어나 수다스러울 지경인 김노인을 보며 고물상 주인과 다른 넝마주이 노인들은 조롱섞인 농담을 했다.
“밥숟갈 놓고 싶슈?”
“죽을 때가 됐네~ 안 하던 짓을 하고”
그 날 저녁 김노인의 아들이 출소하여 집에 왔다. 다시 일어설 사업자금을 달라며 떼를 쓰는 아들에게 김노인은 따끔한 일침을 가했지만 아들도 만만치 않았다.
“내 모든 재산과 늬 에미의 목숨까지 이미 너에게 줬다.”
“나 아니었어도 죽을 사람은 죽는 거예요!”
“그 때 죽진 않았을 거야, 이눔아!”
“나만 살자고 하는 짓이에요? 내가 잘 되면 덕 보는 게 누군데요?”
“그게 누구냐? 대체 누구야?”
“명당 자리에 꽃상여 탈 사람이 누군데요? 나 말고 누가 그러겠어요?”

김노인의 말상대가 되어주는 유일한 이는 고물상의 벙어리 아줌마였다. 장성한 자식들이 다달이 부쳐주는 생활비가 있는데도 고물상에 나와서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는 이름도 성도 알 수 없는 이 벙어리 아줌마는 김노인이 뭐라고 말하든 고개를 끄덕였고 가끔은 벙긋 웃어주기도 했다. 그런 아줌마에게 김노인은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자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병색이 완연하던 아내가 자신의 병원비를 아들의 사업자금으로 쓰라고 우겼던 것에 대해,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야 한다는 때늦은 후회에 대해, 그런 아들이 감옥에 들어가던 날 치뤄야했던 쓸쓸한 장례식에 대해, 세간을 처분하고 이 동네로 이사오던 날의 어둑함에 대해. 그리고 새로 만난 어린 친구 ‘영’이에 대해…

“시간을 견디는 게 두 가지 있단다. 골동품과 고물이지. 갈수록 값이 나가는 것은 골동품이 되지만, 고물은 그 대신 작은 추억을 갖단다. 추억은 값을 따질 수 없거든.”
아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지 모르는지 따지지 않고 노인은 늘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오늘 주워온 고물 중에서 뻐꾸기 시계를 골라 보여주었다. 하지만 김노인의 정성스런 손길에도 이 시계는 작동하질 않고 뻐꾸기도 문 밖에 몸을 내민 채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무안해진 노인.
“허이구 이 뻐꾸기는 아주 단단히 고장이 났구나”
“죽은 거예요?”
“아니. 언젠간 울 거야.”
“언제요?”
“모르지..아직은 울고 싶지 않은 게야..”
김노인에게 오는 것에 재미를 붙인 아이는 금붕어에게 줄 먹이 봉지를 들고 가는 것은 물론이고, 언제나 환영받는 신문뭉치들을 가져가기 위해 이웃집 문간에 놓인 조간 신문을 꿍쳐 오기도 한다. 통행세를 내라고 우기는 동네 악동들의 시비를 피해 자전거를 타게 되었고, 그 자전거가 고장나자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마술손은 이를 고쳐낸다. 노인의 손에 닿는 것은 뭐든 마술처럼 다시 살아났다.


-4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엄마가 고물상으로 김노인을 찾아온다. 아이의 엄마는 그 동안 애 말만 믿고 친구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동네 사람들을 통해 은별이가 다리 건너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는 말을 듣고 아이에게 물어본 뒤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동안 학원 선생님한테 거짓말을 하고 학원도 자주 빠졌더라고.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친구를 못 사귄 탓이겠지만, 그래도 제 또래와 노는 것이 아이한테 좋은 것 아니겠느냐며, 혹시 앞으로 아이가 오더라도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가는 길에 고물상 주위를 돌아보며 쇠붙이에 유리조각에 아이한테 위험한 물건들 투성이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아이의 엄마. 두부에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멍하니 텔레비전에 눈길을 던지고 있는 김노인. 더 이상 아무것도 만들려 하지 않는다.

고물을 팔러 시내에 나갔던 김노인은 일전에 봐두었던 장의사 집으로 향한다. 장례 비용과 절차 등을 물어본 뒤 문을 나서는 김노인. 잘 좀 부탁한다는 김노인의 말에 정정하신 걸 보니 부탁할 일 생기려면 아직 한참 먼 것 같다며 웃는 장의사.
집으로 돌아온 김노인은 돈을 모아두었던 장판 밑을 들춰본다. 그러나 돈을 싸두었던 손수건만 있을 뿐 돈은 보이지 않고. 망연자실 앉아 생각을 더듬어보는 김노인. 금붕어를 사러 가기 전에 돈을 꺼낼 때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에게 생각이 미친다. "와, 할아버지 부자네요. 난 아직 돈 쓸 줄 모른다고 엄마가 돈 잘 안 주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지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 안에 앉아 있는 김노인. 아이가 올 시간이 한참 지나고 어두워지도록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장례비로 쓰려고 모아두었던 돈을 다 날리자 허탈해진 김노인.
때마침 아이가 상기된 얼굴로 노인의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자기집 냉장고를 온통 쓸어담은 듯 푸짐한 음식과 두툼한 신문뭉치에다가 금붕어 먹이까지 내놓았다.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몽둥이를 든 노인은 아이를 세게 때렸다. 이 모든 상황이 마치 자신의 실수인 양, 실패한 자신의 인생인 양, 때리고 또 때렸다. 실망과 낭패감에 젖은 아이는 눈물을 훔치며 다리를 건너 집으로, 자신의 세계로 내달렸다. 다시는, 이제 다시는 다리를 건너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집으로 뛰어갔다.
며칠 뒤, 천변을 뒤지고 다니던 김노인은 다리 건너편에 서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그러나 김노인은 못 본 체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고, 아이는 한참을 머뭇거리며 서 있다가 다리를 건너오더니, 김노인 앞에 비닐 봉투를 내려놓고 힘없이 돌아서 간다. 봉지에 든 것은 맥주캔 하나와 바나나 두 개. 김노인은 아이가 사라진 자리를 눈으로 더듬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아이는 다리 앞에서 김노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소주며 과자 같은 것들을 건네주곤 쭈삣거리다 돌아간다. 괘씸한 마음에 아이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김노인.
어느 날 쪽마루에 우두커니 걸터앉아 있던 김노인, 담배 쌈지에서 꽁초를 꺼내다 떨어뜨리는 바람에 몸을 수그리고 더듬어 집어든다. 그 때 쪽마루 그늘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김노인이 집어든 것은 아들 봉현이 만지작거리던 지포 라이터. 그제서야 돈을 가져간 것이 자기 아들임을 깨달은 김노인, 힘없이 주저앉는다.


-5


늦게나마 자신의 오해를 알게 된 노인은 처음 그 때처럼 아이의 아파트 앞을 기웃거리며 다시 아이를 찾는다. 어색한 재회. 생뚱맞게 구는 아이에게 노인은 예전에 주웠던 뻐꾸기 시계를 선물한다. 아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멈춘 시계를 누가 본대요?”
“하루에 두 번은 맞지 않니?”
“죽은 뻐꾸긴걸!”
그렇게 심드렁하니 둘은 헤어진다. 마치 다시는 안 볼 모양처럼.
어느 날 아침 일어나 기운 없는 손놀림으로 리어카에 고물을 싣던 김노인. 문득 폐타이어 어항을 바라보다 깜짝 놀란다. 금붕어 두 마리가 없어진데다 한 마리는 살이 반쯤 뜯어먹힌 채로 둥둥 떠다니고 있었던 것. "망할 눔의 도둑괭이들."을 연발하며 낯을 찡그린 채 죽은 금붕어를 꺼낸 김노인, 멀리 던져버리려다 문득 손을 가져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천변 한구석을 모종삽으로 파서 금붕어를 묻어준 김노인, 나직히 한숨을 쉬고는 다시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골목길을 돌아나간다.
다음날 시내로 나간 김노인은 수족관에 들러 죽은 것들과 똑같이 생긴 금붕어 세 마리와 작은 놈을 하나 골라 어항에 풀어놓고, 페트병을 모아 다시 바람개비를 만들기 시작한다. 오후에 천변으로 나가 아이를 기다리는 김노인. 아예 고물이며 쓰레기를 주울 생각도 않은 채 이제나 저제나 다리 건너편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마침내 저만치서 모습을 드러내는 아이. 김노인은 벌떡 일어나 다리 위로 달려가며 새로 만든 바람개비를 날린다. 그 모습에 쭈삣거리며 서 있던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고, 김노인과 함께 다리 중간에 서서 바람개비를 날린다.


-6


다시 김노인의 집을 찾아온 아이는 못 보던 금붕어를 보고 깜짝 놀란다. 김노인은 아이를 기쁘게 해줄 마음에 새끼가 태어난 거라며 거짓말을 하고, 도둑 고양이들이 넘보지 못하도록 구멍 뚫은 유리 덮개까지 마련해 준다.
그 동안 무슨 돈으로 계속 이것저것 사들고 왔냐며 김노인이 묻자, 아이는 자기가 엄마한테 비밀을 얘기하는 바람에 할아버지가 화난 것 같아 집에 있는 먹을것을 몰래 가져왔던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마음이 짠해진 김노인은 엄마가 걱정하시니까 이제 매일 오지 말라고, 그저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들러서 잠깐 금붕어 밥 주고 할아버지 잘 있나만 보고 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는 이제부터 학원도 안 빠지고 공부도 열심히 할 테니까 매일 오면 안 되냐고 애원하고. 김노인은 방학 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면 더 반가운 것처럼, 가끔 보는 편이 오랫동안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라며 아이를 달랜다.
밤마다 김노인이 쌓아올리던 탑은 점점 뾰족해지고, 자잘한 물건들을 꼬고 자르고 칠하며 만들어온 작은 초가집도 모양을 갖춰갈 즈음, 김노인은 세상 떠날 때가 가까워옴을 느끼기 시작한다.
어느 날 수의를 사온 김노인에게 아이는 그게 무슨 옷이냐고 묻고. 김노인은 특별히 죽은 사람들만 입을 수 있는 단체복이라고 대답한다. 그럼 교복 같은 것인가 보다고 말하는 아이를 웃으며 쓰다듬어 주는 김노인. 이걸 입어야만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만일 어느 날 영이가 왔는데 할아버지가 이 옷을 옆에 두고 있거나 입고 있으면, 그건 할아버지가 기러기로 태어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라 생각하라고 말해 준다. 그 때가 되면 할아버지는 참 행복할 거라고, 봄이 되어 멀리 추운 나라에서 찾아올 때면 영이네 학교를 들러 잘 있나 보고 가고, 떠날 때도 아이의 머리 위에서 인사하고 갈 거라고.
이후로도 김노인은 아이가 올 때마다 함께 탑이며 초가집을 만들면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너가 왔을 때 할아버지가 아무 말도 안 하고 누워 있으면, 그건 할아버지가 이미 죽어서 사람 말도 못 알아듣고 사람 말을 할 줄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그건 머릿속으로 기러기들의 말을 배우는 중이라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넌 놀라거나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오히려 할아버지가 새로 태어나는 걸 기뻐하고 축하해 주면 된다고..
또한 장의사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전화기 옆에 붙여놓으며, 할아버지가 아무 대답이 없거들랑 이리로 전화한 뒤 "고물 할아버지가 좀 오시래요."라고 전하면 된다고 일러준다. 장의사가 뭐하는 사람이냐는 아이의 물음에, 김노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다음 세상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는 사람이라고. 아이가 이 동네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어디가 어딘지 몰랐던 것처럼, 이 세상을 떠나면 누구나 처음 가는 길이기 때문에 헤매게 마련인데, 장의사 아저씨가 그 길을 잘 인도해 준다고. 그러니까 장의사를 부른 뒤에는 아이가 안심하고 집에 가도 되는 거라고. 그리고 할아버지랑 영이는 이 다음 이 다음에, 영이가 돌고래가 된 다음에, 바다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아기 돌고래가 숨을 쉬러 바다 위로 솟구쳐 오를 때면 할아버지 철새가 그 등 위에 내려앉아 잠시 쉬어갈 거라고….


-7


가뭄이 계속되던 어느 날, 고물상에서 불이 난다. 비명소리를 듣지 못한 벙어리 아줌마만 불행히도 크게 화상을 입었고, 다달이 생활비를 부쳐주던 아줌마의 아들마저 연락이 닿지 않자, 김노인은 결국 동네 성당으로 수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 비용이랍시고 맡겨둔 통장을 찾아온다.
“돌보지 않는 송장보담 산 사람이 먼저지, 아무렴”
많은 흉터를 가지게 됐지만 김노인 덕에 무사히 퇴원한 벙어리 아줌마는 조금씩 건강을 회복한다.


-8


이제 여름 막바지의 장마가 시작된다. 허름한 천장으로 떨어지는 빗물. 바람에 벗겨진 방수천을 새로 씌우기 위해 빗속을 나선 김노인은 혼자서 천을 잡고 벽돌을 올리기 위해 악전고투를 한다. 방수천을 잡으면 벽돌을 올릴 수 없고, 벽돌을 쥔 상태로는 방수천을 잡을 수 없는 힘든 상황 속에서 힘이 다해갈 즈음, 아이가 나타나 방수천을 끌어당긴다. 뭔가 알 수 없지만 훌쩍 자라나버린 아이.
다시 늦여름의 햇살이 비친 어느 날, 김노인과 아이, 벙어리 아줌마는 힘을 모아 젖은 세간과 이부자리를 햇살 아래에 내어 넌다. 그리고 소박한 저녁 음식을 두고 마주앉은 이들. 단란한 가족인 양 그들은 웃으며 밥을 먹는다. 언젠가 김노인이 자신의 가족과 그랬듯 고물들로 만든 그들만의 세상에서 �고 까불고 장난을 친다. 김노인의 고물세계 속에는 아이가 상상할 수 있는 우주가 모두 깃들어있다. 의자도 되고 그네도 되고 돛단배도 되는 폐타이어, 문도 되고 식탁도 되고 날으는 융단으로도 변신하는 널판지, 온갖 새며 비행기가 되어 날아다니는 박스 조각들. 노인은 아이에게 말한다.
“죽은 것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단다. 니가 원한다면 이 유리병은 내일 인형이 될 거야. 또 이 거울 조각은 별이 될 수 있겠구나, 물론 니가 간절히 원한다면 말이다..”


-9


마침내 탑과 초가집이 완성되고, 김노인은 긴 한숨을 내쉰다. 마지막으로 천변을 돌며 고물과 쓰레기를 줍는 김노인. 집으로 돌아와 그 동안 만든 수많은 바람개비들을 바라보다 문득 저만치 보이는 다리로 눈길을 돌리며 빙긋이 웃음을 짓는다.
오늘 김노인은 목욕탕에 왔다. 늙고 지친 몸을 거울에 비춰보며 부지런히 비누칠을 해본다. 쭈글쭈글한 뱃가죽을 당기다가 배꼽에 손가락을 쑤셔본다. 어린 시절 맑은 냇가에서 물장구를 쳤듯, 그렇게 탕 안에서 철퍽철퍽 손바닥으로 장단을 치다가 낯선 이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와 어항 뚜껑을 열고 금붕어 밥을 준 뒤, 쪽마루에 앉아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본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완성된 탑을 쓰다듬는 김노인. 김이 오르는 두부에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초가집 마당에서 절구질을 하고 있는 아낙을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겨울 철새들이 찾아온 저수지 풍경이 펼쳐지고….
다음날 김노인의 집으로 찾아온 아이. 마당 한켠에 놓인 어항 뚜껑을 열고 밥을 주며 한참을 놀다가 문득 닫힌 방문으로 눈길을 돌린다.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노인의 집에 들어온 아이는 잠자듯 누워있는 말끔한 얼굴의 김노인을 바라본다. 수의를 베고 누워 있는 김노인의 팔을 살짝 흔들어보는 아이.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처음엔 “할아버지, 일어나요”라며 소매를 흔들다가, 노인이 꿈쩍도 하지 않자, 혼자 고물더미 속에서 논다.
그러다가 다시 심심해진 아이는 김노인 옆으로 와서 그의 얼굴을 만지다가 멈칫한다. 그 순간 뻐꾸기 시계의 뻐꾸기가 진짜 살아있는 새소리를 내며 지저귄다. 하늘에서 들리는 듯, 혹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울리는 듯한 그 소리에 놀라 눈을 올려뜨고 천지사방으로 돌려 살피는 아이.
곧이어 빠르게 달리는 아이의 모습. 노인의 집을 뛰쳐나와 다리를 건너고 언덕을 올라 자신의 아파트로 쏜살처럼 들어간다.


-10


몇 달 후, 다리 난간 사이사이마다 김노인이 만든 형형색색의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깡총거리며 다리를 건너오는 아이의 입에서는 김노인이 흥얼거리던 <열아홉 순정>의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자석에 이끌린듯 자연스럽게 김노인의 집이 있던 장소로 온다. 그 곳에 남은 것은 이제 김노인의 집 앞에 서 있던 오래된 나무 한 그루 뿐. 하지만 은행나무를 올려다보며 씽긋 미소를 짓는 아이. 붉은 태양이 낮게 걸린 석양을 향해 아이가 천천히 양팔을 벌린다.




*2001 영화 진흥 위원회 하반기 극영화 개발비 지원 선정작.







짱짱 ^*^))// 방글방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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