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말했다.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중이라고.
자신의 부재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이것 저것 꼼꼼하게 챙겨서 사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것.
좋은 일이다.
하지만 10년을 넘게 자기에게 맞게 길들여진 사람이 그리 쉽게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생활의 부재만을 염려해서 한 배려였기 때문이다.
마음, 정신, 영혼의 부재는 미쳐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한계였다.
그 사람이 단지 가족에게 엄마로서 혹은 아내로서 밥하고 빨래하고 그런 존재감으로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는데.
의식주쯤이야 그야말로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이말이다.
"밥 먹었어?" 이 말 한마디가
"많이 아파?" 이 말 한마디가
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들릴 수 있다는 것.
이는 다시 말해서 "사랑해"라는 이 한마디가 끔찍하게 혹은 황홀하게 들릴 수 있다는 차이점이다.
죽어 가는 그 사람을 잠시 내 안에 들여 놓고 살다가 다시 내 몰기까지
아팠다.
실제든 상상이든 마음 안에 존재하는 어떤 상이 부재한다는 것은 상실의 아픔을 아는 자들은 겁내 할 것이다.
어떤 식이든 존재자의 부재는 아프기 마련이다.
그 사람과 난 어느새 정들었었나 보다.
다시는 죽어가는 사람을 주제로 글을 쓰고 싶지 않다.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그 영혼을 받아 들이고 또 합일해서 교합하기까지
그 과정의 아픔을 견뎌내고 다시 내몰기까지 얼마나 힘든 일인가에 대해서 이번 일을 통해 뼈져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하물며 작품 안에서 누군가를 그려내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데 실제로는 어떻겠는가?
하여 배우들의 고충을 조금은 이해 할 것 같다.
그걸 아는 내가 내가 나라고 말 하지 못하는 상황을 무어라 설명 하겠는가?
세월이 깡패라고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용서 해 줄 거라고.
생각해 보니 사랑의 죄악이란
그 사람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길들여져서 내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 되는 것이긴 하겠지만.
하여 아프다.
어쨌든 아프다.
죽지는 않겠지만 죽을 만큼 아프다.
또 다시 나는 깊은 침잠의 시간을 보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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