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性交) 후에 모든 동물은 「- 슬퍼진다 -」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is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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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미 후에 모든 동물은 슬퍼진다.
쿤데라가 한 말인 줄 알았는데 비스무리한 말이 두루두루 많눼.
그 슬픈 짓을 왜 하는지,,,모르겠지.
하지 않는 내가 왜 슬픈지 모르는 것 처럼.
헛헛함이 주는 만족도라는 게 있다.
그렇담 만족에서 오는 헛헛함이란
상상속에 있었던 걸 경험함으로써 기대치를 채워주지 못해서일까?
아님 단지 습관일까?
한때, 날 미치게 했던 사내, 쿤데라.
녀석은 나를 황홀경에 이르게 해
내 영혼을 사로잡았던 몇 안 되는 양놈이었다.
조선 말기에 공예인(工藝人)·상인(商人)·기녀(妓女) 들이 즐겨 불렀다는 「유산가(遊山歌)」는 12잡가(雜歌) - 「적벽가(赤壁歌)·제비가·소춘향가(小春香歌)·선유가(船遊歌)·집장가·형장가(刑杖歌)·평양가(平壤歌)·달거리[月令歌]·십장가(十杖歌)·출인가(出引歌)·방물가(方物歌」 - 중에 그 백미(白眉)로 꼽힌다.
- 화란춘성(花爛春城)하고 만화방창(萬和方暢)이라 호시절이로구나. 어화 벗님네야 산천경개(山川景槪)를 구경가세 -를 읊조리노라면 노천명의 「푸른 5월」의 싱그러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계절의 여왕을 맞아 절정(絶頂)을 이룬 녹음방초(綠陰芳草)에 모두들 「나드리」를 챙긴다.
부푼 기대와 솟아오르는 흥취(興趣)로 나서는 아침과 낙조(落照) 번질 즈음에 귀로(歸路)에 접어들 때의 감흥(感興)에는 일말(一抹)의 허무(虛無)와 아쉬움이 긴 그림자에 짝진다.
왜 교미(交尾) 후에 모든 동물은 허탈(虛脫)과 비애(悲哀)의 어둠에 잠길까?
「구름 한 점없는 15야(夜) 달밤에 호면(湖面)에 잠긴 만월(滿月)을 보느라면」 가슴이 아린다고 S. 모옴은 빨강머리(red)에서 술회(述懷)하였다. 불완전(不完全)한 인간이 완전에 도달하는 행운의 찰나 - 그 짧은 행복을 영원히 걸머쥘 수 없다는 절망이 오히려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다.
그렇게 몽매(夢寐)에도 그리던 여인(女人)과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와 자살(自殺)해 버리는 탐미(耽美) - 과연 그 죽음은 포만(飽滿)의 여운(餘韻)이 가시기 전에 영면(永眠)을 택한 것인가 아니면 육욕(肉慾)의 향연(饗宴)뒤에 오는 허탈과 비애때문인가?
「영원에의 희구(希求)」에 선인(先人)들의 마음 가짐을 보면
청산(靑山)은 엇뎨하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는 엇뎨하야 주야(晝夜)애 긋디 아니난고. 우리도 그치디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 호리라.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 11 |
원효(元曉)동산 시절에 「돌아오지 않는 강 (River Of No Return, 1954)」의 마릴린 몬로는 얼마나 열기(熱氣)와 감미로움을 안겨주던 연인(戀人)이었던가?
귓결에 속삭이는듯한 허스키한 목소리와 천진무구(天眞無垢)한 눈빛과 풍염(豊艶)한 몸매와 그리고.........
때로는 사나운 폭풍우가 불기도 하지요. 사랑은 그 강을 항해하는 여행자. 이리저리 휩쓸리다 영원히 폭풍의 바다로 사라지지요. here is a river, called the river of no return. Sometimes it's peaceful and sometimes wild and free. Love is a traveller on the river of no return, Swept on forever to be lost on the stormy sea. |
노쇠(老衰)와 주름살이 종착역(終着驛)이 닥아옴을 암시(暗示)해 주는 지금에 연인(戀人)이었던 M·M의 속삭임과 염자(艶姿)는 쓸쓸한 마음을 쓸어주는 손길이면서 또한 인생과 삶이 얼마나 덧없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이가 날 부르는 소리가 I can hear my lover call, "Come to me.' |
정극인(丁克仁 - 不憂軒)의 「상춘곡(常春曲)」은 저 5월의 어두움을 말끔히 씻어낸 절편(絶篇)이다.
작자가 전북 태인에 돌아와 자연에 뭍혀 살 때 지은 것으로 자연을 기리는 송가(頌歌)이면서 자연을 소재로 하여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주제를 부각(浮刻)시키고 있다.
즉, 은일지사(隱逸志士)의 한정(閑情)이 「벽계수(碧溪水)」, 「녹양방초(綠楊芳草)」, 「세우(細雨)」 등의 자연적 배경과 조화(調和)를 이루었으며,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와 취락(醉樂)을 즐기는 작자의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이 효과적으로 그려져 있다.
갓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건듯 부러 녹수(綠水)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 |
서둘러 등정(登頂)에 바쁜 산오름이나 차중에서 휭-하니 목적지에 도착하여 이리 끼웃 저리 흘끔거리는 눈요기의 승경(勝景)에 늙음의 천금같은 시간을 뺏기지 말자!
지필(遲筆) - 「육희(六喜) 와 육보(六寶) 중에서 」 - 의 완숙(完熟)으로 가자 !
- 모든 동물이 슬퍼지는 - 그 올무를 피해 가는 것이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 뿐.
홍진(紅塵)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生涯) 엇더한고. |
쿤데라를 검색하다 복사해 옴.
『현대시』2004년 8월호에 실린 시들
When one Has Lived a Long Time Alone/Galway Kinn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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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e one has lived a long time alone,
one likes alike the pig, who brooks no deferment
of gratification, and the porcupine, or thomed pig,
who enters the cellar but not the house itself
because of eating down the cellar stairs in the way up,
and one likes the worm, who by bunching herself together
and expanding works her way through the ground,
no less than butterfly, who totters full of worry
among the day lilies, sa they darken,
and other species better than one's own,
which has gone amok, making one self-estranged,
when one has lived a long time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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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one has lived a long time alone,
and the hermit calls and there is an answer,
and the bullfrog head half out of water repeats
the sxual cantillations of his first spring,
and the snake lowers himself over the threshold
and disappeares among the stones, one sees
they all live to mate with their kind, and one knows,
after a long time of solitude, after the many steps taken
away from one's kind, toward the kingdom of strangers,
the hard prayer inside one's own singing
is to come back if one can, to one's own,
a world almost lost, in the exile that deepens,
when one has lived a long time alone.
한 사람이 오래 오래 홀로 살아온 뒤,
8
한 사람이 홀로 오래오래 살아온 뒤에
단순히 만족만을 추구하는 돼지들과 고슴도치
지하실로 기어들어 가지만 지하실 층계를 오르면서
층계를 다 먹어버리기 때문에*
집안으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저 가시 돋은 돼지들을 똑같이 좋아하게 되고
꿈틀꿈틀 열심히 땅 속으로만 제 영역을 확장해 가는
벌레들과 저물어 가는 나리꽃들 사이 가득히
근심이 흔들리는 나비들을 차별하지 않게 되고 드디어는
스스로을 이간하고 미쳐서 날뛰는 자신의 종족보다
다른 종족들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한 사람이 오래 오래 홀로 살아온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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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홀로 오래 오래 살아온 뒤에
마침내 숨어 살던 개똥찌바귀가 응답을 하고
짝을 찾는 개구리들이 물위로 반쯤 머리를 내밀어
첫 봄의 영창을 시끄럽게 불러 대고 몸을 낮춘 뱀들이
문지방을 넘어 돌 틈으로 슬그머니 미끄러져 갈 때
한 사람이 드디어 저들 모두가 끼리끼리 교미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낯선 자들의 궁전을 향해 자신의 종족에서부터 저만큼 멀어져 간
오랜 고독 뒤에 한 사람이 비로소
가슴 속으로부터 강렬한 기원이 '네 종족에게로 돌아오라
깊은 유배 속에 사라져 가는 너의 세계로
돌아오라 그럴 수만 있다면' 라고 부르는 노레를 듣게 될 때
한 사람이 오래 오래 홀로 살아온 뒤에
악어/이하석
몸길이 1미터 60센티면 악어로서는 중간 정도인데,
이 악어는 우리가 본 것 중 가장 크게 여겨진다
과장이 심했기 때문인데,
그러나 무섭지 않은 악어
이빨은 생략됐고 완강하 입 모양만 냉정하게 빛난다
악어는 어슬렁거리지 않고 화가의 작업실 한 구석에 놓여 있다
두터운 갑피는 하나 하나 다른 모양으로
우리 삶터 곳곳에 숨어 있다가 화가에게 들킨 것이다
쓰레기 하치장, 폐차장, 고물상 어디에나
그는 악어조각을 찾아다녔다 악어가 될만하면
뭐든 사 모으고 주워 모았다
온갖 쇠파이프들 용접으로 연결하면서
그는 악어처럼 마음과 몸을 뒤틀었다
불꽃이 튀어도 악어처럼 악문 쇠 놓지 않은 채
온몸 뒤틀어댔다
악어가 완성되면 화물차에 실려가서
시내 중심가 우아한 건물 안에 한동안 전시된다
그런 악어만 찾아다니는 문화인들이
큰 아가리에 손을 넣어 악어의 영혼에 닿기라도 하려는 듯
깊숙이 손가락을 휘저어본다
깊은 속 닿아 아주 차갑게 느껴지는 게 있다고 해서
그게 악어의 영혼이 아님은 물론이다
악어 우글대는 세상에 그게 진짜 악어가 아니니
손을 대들 뭐 위험하겠는가?
나무의자
무슨 나무로 만든 의자?
소나무라면 그 잎에 찔려 아프게 비명 질렀던
즐거운 기억이 있다
지금 내가 앉은 의자도 소나무다
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밖에 나앉은 의자는 속전속결의 다리를 꺾던
기억에만 특히 민감한 면이 있다
완고하다고 할까
사고적이라고 할까
소나무라면 그 잎에 찔려 아프게 비명 질렀던
즐거운 기억이 있지만
의자일 뿐이어서 나는 거기에 앉아
잠시 꺾인 무릎 아래로 팔을 늘어뜨린다
소나무로 만든 의자라고 특별할 건 없다
모든 의자는 직립을 미워하며
선 이의 완고한 다리를 곧잘 꺾어버리는 걸
나는 안다
그것도 행복의 한 논리라면
나는 거기 앉아 잠시 동안이나마
소나무 잎에 아프게 찔린 다리의 즐거운 통증도 기억한다
그건 특별한 기억도 아니고
더더구나 내가 시인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리라
말러를 듣다/김성춘
1
구스타프 말러를 듣는다
처음 보는 큰 강이다
강 건너
새가 지고 온 저녁놀이 환하다
슬픔의 뼈가 만져 진다
2
소 마굿간 위로
슬리퍼 끌고 동네 마실 나온
달
어슬렁어슬렁 떠오른다
5월, 들
뻐꾸기가 울었다. 낭산*을 도르르 말아 올린다.
경운기 끌고 탈, 탈, 탈 노랑나비 한 마리 오고 있다
노랑나비를 타고 온 낭산 하늘이 잠시 파르르 떤다
무논에 콸콸콸 어린 봄이 재충전 되고 있다
왜가리 한 마리 진흙 묻은 자전거 타고 둑길로 오고 있다.
뻐꾸기가 울었다. 둑길의 애기똥풀꽃이 아장아장
봄나들이 간다. 낭산이 도르르 풀리고 있다
* 낭산 : 경주 선덕여왕릉이 있는 산
개다리춤/이명수
개운산 재개발지구 한쪽 귀퉁이 빈터, 아이들이 개다리춤을 추고 있다. 포크레인 소리 잠시 멈추고, 장마철 햇살 비집고 살금살금 키가 크는 아이들.
아이들아 모여라, 개다리춤 추자,
천 원짜리 한 장 내걸고 춤시합을 붙였다.
흔들다 지쳐 다리 사이로 엉금엉금 기는 놈도 있다. 누워서 두 다리를 하늘에 대고 부르르 떠는 놈도 있다. 나도 다리가 부르르 떨렸다.
줄기채 뽑혀 나와 털어내려 해도 올망졸망 매달려 허공에서 개다리춤을 추는 어린것들.
노랑머리 점박이 네가 최고야, 천 원을 상금으로 건네주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나도 아이들 틈에 끼어 털레털레 개다리춤을 추었다. 한 아이가 다가와 내게 동전 한 잎을 내민다. 조막손만한 7월 햇살에 빛나는 은화.
이런 상을 받은 적이 얼마만인가.
아직은 풀꽃들이 지키고 있는 재개발지구 한쪽 귀퉁이. 이 땅에 두 발로 버티어 서 몸을 흔들어봐,
언덕을 내려오며 열심히 열심히 개다리춤 연습을 했다. 동전 한 잎 손에 꼭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며
사잇길
사람들은 103동과 104동에 누워
떠 있고
103동과 104동 사이
부처님은 서 계시다
개운산 오르는 길
사람과 부처 사이 그 틈을
비집고
없는 듯 있는 듯 피어 있는
개망초, 애기똥풀은 황홀하다
나는 풀꽃들에게도 절하고
산으로 간다
우리 모두는 사이를 갖고 있다
사이에서 태어나
사이에서 살다가
먼 사잇길로 떠난다
있는 듯 없는 듯 황홀하게 떠난다
나의 직물織物/이영춘
어제는 그와 싸움을 하고 증오하고 어머니 집에 가고 아이들을 생각하고 인연들을 생각하고 강가에 나가 죽음을 생각하고 붓다를 생각했다 오늘은 다시 후회하고 밥을 먹고 책을 보고 시를 생각하고 시장에 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나물을 다듬고 장롱을 닦고 열쇠를 닦고 마당을 쓴다 밤에는 늦도록 메일을 확인하고 편지를 보내고 편지를 받고 뉴스를 보고 연예프로를 보고 off mode로 캄캄해질 때까지 컴퓨터를 노려본다 이런 것을 보르헤스는 업이라 했던가 나는 전생에 죄를 너무 많이 짓고 이 지구까지 쫓겨 왔나 보다 바람에 날리는 개똥참외 같은 먼지로 인생이라는 큰 함정에 빠졌나 보다 다행히 한 톨의 사람이란 이름으로 숨이 붙어 지금까지 직립보행 하나 보다 그러나 내일은 다시 무엇이 되어 이 지구를 떠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단 하나 분명한 소망은, 살아 있는 동안 좀 더 아름다운 실로 아름다운 천을 짤 수 있다면
마야(幻影)
둥근 대낮
한적한 외길을 달린다
얼마를 달렸을까
아슬한 벼랑 모퉁이에 들어서는 순간
오토바이를 세운 한 남자가 힐끗 나를 쳐다 본다
그냥 지나쳐 나간다
톱날처럼 길이 끊긴 아찔한 절벽
차를 세우고 내 몸만 빠져 나온다
남자는 붉은 표지판 X자를 만들고 있다
어느새 경찰이 왔다
내가 두 손으로 X표를 해 보였다
그는 말했다
왜 진작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깬다
꿈이다
방안 가득 적막이 흐른다
가만가만 나를 들여다 본다
겁 없이 달려가는 나는 늘 어리석은 배우였고
표지판을 든 나는 위험한 연출가였고
꿈 속에서 꿈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나는
저급한 관객이었다
* 마야 : (환영)이라는 뜻으로 8세기의 베단타 철학자 상카라의 말에서 인용.
격포에서/김정희
1.
횟집을 떠다밀며 미끄러진 길이 파마머리 파랗게 물들이는 바다로 추락한다. 그 머리를 끌어 덮다 밀쳐내는 채석강에는 시간이 층층으로 쌓여 있다. 몇 길 높이로 쌓아놓은 헌 책(古書) 같은 바위 틈새에서 옛 이야기를 찾아 읽으며 바다는 흐느끼다 낄낄거린다. 그 소리가 바다 위에 물거품으로 하얗게 깔린다. 바닷가 모래알들은 그 책장에서 떨어져 나온 글자들이다. 바람은 그들을 짜 맞추느라고 부산하게 뛰어다닌다. 하루 두 번씩 생각난 듯 다시 와서 그 책장에 숨겨 놓았던 지난 날들을 들추던 바닷물이 뒤를 돌아보도 않고 주춤주춤 수평선에게 끌려 간다. 넘어 가는 해는 황금빛 긴 꼬리로 바다 바닥을 번쩍번쩍 쓸고 있다.
2.
바닷바람이 유채밭에서 노랗게 뒹굴 때 영산홍은 가지마다 횃불을 꺼내들고 열렬히 봄을 환영한다. 그 둔덕 아래 검게 쪼그라진 할머니 하나 갈색 고무다라에 바다를 가두어 놓고 나를 부른다. 그 둥근 바다 속에 무르익은 봄 하늘이 빠져 있고 삶은 고동과 소라가 그 하늘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비릿한 냄새가 튀어나와 지나가는 내 발길을 끌어 당긴다. 꼬리를 자르고 귀를 세게 빨아야 따라나오는 고동의 한 평생, 구불구불 동굴에 숨겼던 발자국들, 우리도 오늘을 잘라버려야 지난날이 줄줄이 따 오고 그 빈 속을 내일로 가득 채울 수 있을까. 젊은 여자가 고동을 쪼옥 빨며 천연색 스냅사진처럼 서 있다. 담배를 입에 문 사내는 고동처럼 두 다리를 비비꼬고 있다.
약수를 푸며
산의 품속에 깊이 숨어 있는 절 앞마당 한 쪽 구석에
대나무 홈통이 밀어내는 유리밧줄 같은 물줄기가
쌓인 적막을 絃으로 타며
끊어질 듯한 풍경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낮은 곳에서 편히 잠들려는 약수에
햇살이 가시처럼 박히고
바람이 가는 회초리로 내리친다
회초리자국이 뱀 껍질 무늬로 흔들린다
산이 써 놓은 끝 없는 소설인 그 물줄기는
나직나직 콧소리로 염불하며
아직도 길道을 닦고 있다
큰 돌그릇이 가슴을 움푹 열어
그 소리를 둥글게 끌어안는다
약수는 눈을 감고 가부좌한 채 잠깐 쉰다
내가 퍼 올린 바가지 속에
그 물소리가 가득히 담겨 있다
청학재 시편/성선경
-쑥국
쑥쑥쑥 봄날이 왔다고 차오르는
쑥쑥쑥 어머니 한 바구니 캐오셔서
쑥쑥쑥 한 솥 가득 국 끓이시니
쑥쑥쑥 할머니도 드시고 나도 먹고
쑥쑥쑥 입춘 같은 입춘서 같은
쑥쑥쑥 국량이 커야 큰일 한다고
쑥쑥쑥 어머니 한 그릇 더 퍼주시는
쑥쑥쑥 전혀 배고프지 않은 춘궁 같은
쑥쑥쑥 쑥국.
청학재 시편
-제미祭米
참 우리 동네는 재미나는 도깨비만큼이나 참 많은 신들도 함께 살아서 사람 반 신명 반 어울려 살았는데요 그래서 늘 밥 한 술만 떠도 고씨례 고씨례 하고 신명 대접을 했는데요 무슨 무슨 날이다 하면 한 상 잘 차려서 터주대감 조왕신 정랑신까지 골고루 찾곤했는데요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던 날이 제미를 하던 말이었는데요 쌀신명 대접한다고 흰 쌀밥에 칼치국에 나물 한 대접을 놓고 먼저 절을 두 번하고 손을 싹싹 빌면서 할머니께서 무어라 무어라 주문을 외면 나는 아무런 의미도 모르면서 분수처럼 마구 흥이 솟지 않았겠어요 제사가 끝나면 쌀밥에 칼치국을 아주 소원처럼 먹을 욕심으로 나도 할머니 따라 싹싹 빌곤 하지 않았겠어요 그러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마음이나 속이 허한 나이면 봄도 여름도 없이 할매 우리 또 언제 제미하노 묻곤 하지 않았겠어요 그러면 할머니는 그래 그래 좀 있다가 그러면 금방 참 시원한 칼치국물이 목을 타고 시원히 내겨라곤 하지 않았겠어요 참 쌀밥 한 그릇에도 천지신명을 다 담았더
키가 작아 더 커 보였던 할머니.
살구꽃이 지는 자리/정끝별
바람이 부는 대로
잠시 의지했던 살구나무 가지 아래
내 어깨뼈 하나가 당신 머리뻐에 기대 있다
저 작은 꽃잎처럼 사소하게
당신 오른 손바닥뼈 하나가 내 골반뼈 안에서
도리없이 흩어지고 있다
꽃 진 자리가 비어간다
살구 가지 아래로 부러진 내 가슴뼈들이
당신 가슴뼈를 마주보며 꽃 핀 자리
한 잎 뺨 한 잎 입술 한 잎 숨결
지는 꽃잎도 저리 인연의 자리로 쌓이고
문득 바람도 피해간다
누구의 손가락뼈인지
묶였던 매듭을 풀며 낱낱이 휘날리고 있다
하얗게 얼룩진 꽃 그늘 아래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부쳐준 오래된 편지 한 장을 읽으며
누운 사람들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가
비스듬히 누워 포도알을 주워 먹으며 구라를 푸는
내 꿈은 그런 향연이었어
누군가의 눈을 보며 머리를 괴고 뒹굴며
몇날 며칠 디스커션하는 거
벌거벗고 누운 그랑드 오달리스크처럼
공작새 깃털로 뒷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살짝 뒤돌아 기다리는 팜므 파탈의 능선들
결코 뼈 따위는 숨기고 있지 않은
주름진 살집 안으로 파묻히고도 싶었어
오 마리아의 팔에 안긴 지저스 크라이스트!
누군가의 품에 그렇게 길게 누워
이제 다 탕진했노라 쭉 뻗어버린 채
뜬금없는 이 생을 마감하고 싶어
검은 관 속에 누운 노스페라투 백작처럼
불멸을 저주하며 새벽마다
목숨 건 내 사랑의 이빨을
네 목에 꽂을 날을 기다리며
영원토록 누워 있고 싶어
길바닥이든 물 속이든 지뢰 위드
이 삶의 진창에 누워버린 사람을 보면
나도 따라 그냥 팍 드러눕고 싶었어
질긴 힘줄을 풀고 부드럽게 퍼져야
그 어디든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
파도 속의 종탑/이향지
뼈 없는 물로 몇 억년 출렁거리고 나서
껍질만 단단한 구리종으로 한 백년 울다
구리치마 안쪽에 쇠 주걱 하나 감추어 달고
파도 속 이무기 잠재우러 들어간
종
고만 울자 고만 울자 주걱을 잡아도
배꼽을 맞으면 저 모르게 쓰러지며 터져 나오는 울음
절간의 종이 울면 명부까지 배부르고
파도 속 종이 울며 배들이 난파를 면한다네
파도 속에서 종이 운다
파도가 종을 친다
살아 있는 나무들 성벽을 이룬 큰 호수 가운데
뎅그렁 뎅그렁
샅이 쓰린 종소리
호수는 넓고 깊고
종은 작지만
파도를 넘는 종소리
물 위건 흙 위건 널마루 위건
상투를 들보에 매달고
떨어질 만큼 발이 떠야 맑은 소리를 내는
종 하나를 위하여
거친 물속 바위 정소리에 발을 묻고 견디는
딱한 종탑도 있다
깨트릴 수 없는 것
아파트 18층 창 밖 난간에
잉꼬 한 마리 앉아 있다
아득한 공중에서도 난간이 필요한 자유
난간을 오그려 잡고 꼬박꼬박 조는 새
문을 미니 문틀 따라 옆걸음 친다
기댈 곳 없는 공중에서도
옆걸음 칠 수 있는 자유
나는 자유의 적이다
비 오는 날 탈출을 감행한
새와 나 사이의 유리창은
자유의 두께
빤히 보이지만 깨트릴 수 없는
작은 새가 제 날개의 힘만으로 날아올라온
자유의 높이
빤히 보이지만 뛰어내릴 수 없는
똑 같은 두께 똑 같은 높이에서 떨며
자유가 부자유를 들여다본다
쌀을 주어도 외면하는 자유
좁쌀을 내밀어도 도리질하는 자유
자유는 의심이 많다
좀 더 크게 문을 열고
좀 더 가까이 좁쌀을 내밀자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 버리는 새
자유는 안이 싫은 것이다
날아온 자유
날아간 자유
고양이! 고양이!/이경림
오후 네 시, 아파트 뒤 비탈진 기슭
치마폭만한 바위를 달구는 햇볕 위에 벌렁 누워
고양이 한 마리 미동도 않는다
어떡 독한 凝視도
숨막히는 境界도 없다
한낮과 저녁 사이 어중간한 오후의 후미짐을 방패삼은
저 묘한 안락!
머지 않은 곳에서 노파 하나가
머리칼이 명주실이 되도록 默言精進 중인 줄도 모르고
더 아래는 들쥐 한 마리 캄캄한 하수구를 빠져나와
풀숲으로 줄행랑 중인 줄도 모르고
건물 모서리 삼각 그늘 속에서 看守 같은 저녁이
열쇠꾸러미를 절그렁거리며 오는 줄도 모르고, 그는
휘파람이라도 불듯한 자세로 누워
무얼 보는 것일까?
저 위, 어슬렁거리는 너털구름에 씌인 듯
깔고 누운 치마바위에 씌인 듯, 아니
누렁 고양이 같은 것에 씌인 듯
오후 네시의 黃泉을 홀랑 뒤집어 쓰고 누운
저 고양이!
고양이!
분홍빛
한가한 휴일 오후였네
심장병을 앓는 어머니와 일에 지친 아버지를 모시고
연안부두에 있는 해수탕에 갔다 오는 길에
새로 단장했다는 雅岩島에 들렸네
노을에 뒤덮인 뻘에는 분홍 갈매기들이 날고
밀물인지 썰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이 저만치서 그저 분홍으로 철석거렸네
-노을이 좋구나
분홍 백발을 날리며 아버지가 말씀하셨네
-사흘 후면 우리가 결혼한지 오십년 되는 날이다.
어제 같은데... 너희 엄마... 고생 많이 했다... 이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정신까지 흐려졌으니...
분홍 뻘엔 뭔가 분홍인 것들이 곰실거렸네 조막만한 도요새 무리가 분홍 꽃무리처럼 흔들렸네
-오늘 저녁은 내가 사마. 저 노을 값이다
-아버지두...
저녁 식탁에는 분홍을 홈빡 뒤집어 쓴 것들이 놓여 있었네
사흘 후, ....
아버지는 문득 쓰러지셨고, 며칠 후 돌아가셨네
그 무슨.... 분홍빛
거짓말!
처럼
만일암터/조용미
만일암터, 대숲으로 둘러싸인 곳 바람이 쓸고 가는 댓잎소리와 새소리만 사는 곳 돌계단 아래 천년수와 암자 몇 채를 거느리고 있는, 오층석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곳 샘가에 연둣빛 머위꽃이 피어 있는 곳 어치가 대숲에서 나왔다가 어디론가 재빨리 사라지는 곳
바람은 탑의 근처에는 살지 않고 만일암터를 둘러싸고 있는 대숲에만 머문다 산봉우리를 넘어 탑이 있는 대숲까지만 불어오고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바람은, 탑의 영역을 침입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바람을 만나려면 나무가 있는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오층석탑과 천년수 사이에 짧은 시누대 터널이 있다 천년 묵은 나무와 천년 묵은 탑 사이에 있는 대숲터널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빽빽하고 어둑하다 문 없는 문의 빗장을 열 듯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더듬는다
천년수에서 어둑한 대숲터널 저쪽을 통과하는 자만이 탁 트인 하늘 높은 산중턱의 암봉과 옛절터에 우뚝 솟은 오층석탑을 볼 수 있다 대숲터널을 지나쳐버리고 나면 오층석탑을 보는데 다음 생까지 천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만일암터에서 천년수 까지는 천리길이다 천산북로를 거기서 보았다고 하면 당신은 내 마음을 탓할 것인가 천산북로나 명사산을 만일암터의 대숲터널에서 본다는 것, 끝이 보일 듯 짧고 어둑한 저 초록터널은 빛과 모래의 입구, 시간과 죽음의 출구
바람이 천년수를 만나러 내려오는 밤이면 오층석탑 위로 폭우 같은 달빛이 쏟아진다 석탑 위로 비단 같은 모래가루가 떨어져 내린다 탑이 달빛에 울리는 소리는 천년수 아래로 내려가고 나뭇가지들이 소리를 내며 달빛을 받아먹는다
숨구멍
언 못에 싸락눈이 덮인다
못에 숨구멍이 나 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의 정소리 뚫려 있는
얇은 창호지 같은 숫구멍처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숨구멍을 가지고 있다
바람이며 땅기운이 드나들기도 하고
영혼이 숨을 내뱉기도 하는
그 구멍은
얇은 막으로 덮여 있다
얼음이 덮이니
나무그늘 아래로 물이 파랗던 여름보다
물은 더 살아
쌔근거린다
아무리 두꺼운 얼음도 물을 다 덮어버릴 수는 없다
눈 덮인 못에 검은 숨구멍이
여럿 나 있다
물이 숨을 내뿜는 곳이다
어떤 숨구멍은 장수하늘소를 닮았고
어떤 것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줄을 닮아 있고
저 숨구멍은
원생동물인 아메바를 닮아 있다
못이 숨을 쉰다
저 못은 답답한지 우묵하고 검은 숨구멍을
가끔 들썩이고 있다
얼음을 지치는 아이들이 어쩌다 숨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이 있다
그럴 때 숨구멍은
가장 큰 숨을 쉰다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의 추억 3/김경수
-도시인의 수면제
바다에 와서 비로소 날 수 있었다. 나는 작은 날개를 최대한 넓게 펼치고 바다 위의 긴 활주로 위를 쾌속질주하여 날아오르는 단풍잎이었다. 혁명을 꿈꾸던 시인 마리네티의 빛나던 이마 위로 더운 여름의 햇살에 시들어 떨어져 눕는 날카로운 외로움이었다. 바다 위로 햇살은 수직으로 떨어지며 혀처럼 부드러워진 금속성 음의 파편을 날린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던 전선을 넘어와 혁명에 지친 종소리가 가늘게 울리자 먼 길을 절뚝이며 걸어온 하얀 부리를 빛내던 하얀 꽁지의 새가 저물어가는 도시의 아스팔트를 힘차게 밟고 향기로운 혁명의 빛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바다가 아름다운 피로감으로 곤히 잠이 든다. 그렇게 혁명의 나팔을 불던 20세기가 지나가고 피카소의 고독한 눈이 하늘의 별이 되어 빛난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의 바다가 하얀 이빨의 파도를 물고 올 때마다 이전에 없던 하나의 별이 하늘에 또 생겼다. 바다.... 그 긴 음절 속에 모텔이 들어선다. 바다 모텔 속에 지느러미를 달고 아가미를 벌렁거리던 한 남자가 한 여자의 유두를 물고 잠이 든다. 지금 잠든 자는 더 이상 깨지 않는다. 그는 영원히 함께 있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의 추억 4
-도시인의 사랑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은 우리의 가슴 속에 노래하는 새를 넣어두는 행위라는 것 외에는. 새가 매일 어둠 속에서 무지개 빛을 부화시키면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색을 낳고 색이 우리 가슴속에 뜨거운 강을 출렁거리게 한다. 우리 그 언젠가 바람이 세차게 불던 갈대밭에서 만났지 않았던가. 사랑은 그래 사랑은 노래보다 먼저 와 내 가슴에서 부서진다. 노래가 있어 새가 있고 새가 있어 사랑이 있다. 목이 하얀 새가 걸어가는 강물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의 금박을 바람이 밀어내며 강의 투명한 속살을 애무한다. 신은 죽었다.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아 죽은 신이 인간을 위해 사랑한다. 그리고 부활한다. 사랑이 돌아오면 그땐 어둠이 젖고 또 젖어 슬픔이 흘러갈 도랑을 밤새도록 기진할 때까지 파야지. 어둠이 색은 본디부터 없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창세기이전부터 있었던 강철로 만들어진 어둠의 등을 누가 두드리면서 걸어온다. 밤늦도록 불이 켜진 골목길을 흘러간 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는 떠나간 사랑의 그림자를 밟으며 그 사랑의 집 앞에 잠시 나비처럼 머물다 돌아선다.
불멸이거나 혹은 찰나이거나/현희
1.
일제 시대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중국의 홍구공원에는 루신의 동상이 있다.
아큐정전으로 널리 알려진 위대한 소설가의 동상.
불멸의 이름을 얻은 소설가는 이 공원에서 영원한 보금자리를 얻었다.
2.
이 홍구공원에는
패트병에 붓을 꽂아 시를 쓰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는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에서
붓에 검은 먹이 아니라 투명한 물을 적시고
온 힘을 다해 시를 한자 한자 쓰고 있었다.
시를 쓰는 동안
먼저 쓴 시들이 하나 둘씩 지워지고 있었다.
글자들은 아무런 집착도 없이
불멸에 대한 몸부림도 없이
시간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가 정성을 기울여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
생각하는 내 가슴 속 티끌까지 쓸어버리며
인간도
자연도
햇살도
다 그렇게 사라지는 것임을 조용히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사라지는 것이 참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그 때 알았다.
3.
홍구공원의 루신 동상은 세월을 깎아 불멸을 빚어내고
할아버지는 허공에 쌓이는 시간의 흔적을 쓱-쓱-쓸어내고
나는 불멸도 찰나도 아닌 경계 밖에 엉거주춤 서 있고.
한여름밤의 꿈
나는
나무
나는
바람
나는
꽃잎
나는
새
나는
안개
그대와 함께 산책하는 수목원. 나는 달빛에 흠뻑 젖어서 천 개의 팔을 벌리고 하늘을 경배하는 나무가 되고, 나뭇가지와 잎을 찬찬히 어루만지며 아름다움을 쫓아가는 바람이 되고, 그대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서 조용히 눈을 뜨는 카사블랑카의 꽃잎이 되고, 내 마음에 격정의 파문을 일으키며 날아오르는 새가 되고, 벌떡거리는 심장을 감추는 안개가 되고.
잠 못 이루는 한여름 밤
도시의 빌딩과 빌딩 사이
면벽을 하고 누운 머리 위로
달빛은 긴 다리를 놓는다.
꽃잎들, 먼지처럼 흩날리는/정채원
아직 볼 붉은 꽃잎들
간밤 비바람에
붉은 마침표를 찍으며 뚝 뚝
땅으로 곤두박질친 꽃잎들
모진 비바람 다 꿈이었어
아침햇살이 안쓰거운 듯 쓰다듬고
바람 휙 지나가자
모여든 꽃잎들 말줄임표가 된다
그래, 아직 할 말 다 못했지
밤새 썼다 구겨버린 편지들 쌓여 있지
막 용서를 구하려던 참이었지
애원해도 애원해도
한 번 쓰여진 우주의 일정표에는
첨삭용 빨간펜이 없다
땅에 누워서도 아직 핏빛 꽃잎들
나무에게로 되돌아갈 길이 없다
언제나 일정대로
꽃이 피고,
다리가 무너지고,
자살소동을 벌이던 애인이 변심하고,
쌍둥이가 태어난 햇빛 부신 어느 휴일
우주선은 산타처럼 공중에서 흩어지고
아, 아,
꽃이 진다
또 바람이 분다
먼지처럼 흩날리는 꽃잎들
말줄임표가 흩어져 슬그머니 마침표로
바뀐다, 일정대로
이제야 늦잠 깬 꽃망울들 벙그는 아침
이륙을 꿈꾸다
책을 펼쳐 얼굴을 덮고
캄캄하고 환한 나라를 헤매네
그대 눈길로 손길로 혹은 입술로
감겨주던 눈꺼풀 오늘은 책으로 덮네
아직 하반신 돌 속에 갇혀 있는
로뎅의 미완성 조각처럼
돌에서 빠져나오려 애쓰는 부끄러운 육신이
육신의 감옥에서 도망치려는 영혼이
몸부림치네, 눈 꼭 감은 세상에선
죽었던 사람들도 샤갈의 그림 속 연인들처럼
하늘에 불빛 꽃다발로 피어나는 밤
검푸른 돌담 위를, 포도주빛 지붕 위를
나도 우주를 유영하듯 날아다니고 싶네
슬픈 허공이 천만 근 짓누르는 나라에서
이따금 번개 치듯 기억이 칼금을 긋는
이 캄캄하고 환한 나라에서
책풍선에 매달려 꿈꾸듯 지상을 뜨고 싶네
머리 스무 개 달린 길조/진수미
물고기가 놀고 있어요. 식기 세척기 안에서
가느다란 수초 사이로
막 몸을 구부리며 빠져 나왔어요.
거대한 범선이 머리 그림잘
쿵 짚으며 침몰했지만 동요하지 않아요.
환상과 나를 엮는 고리는 언제나 모호하죠.
산소가 모자란 물고기처럼
숨을 몰아쉬다 서둘러 광폭해지는 거죠.
자비심 많은 아주머니가 신선한 물을 주면
쏴아아아 우린 잠시 기절한 척해요. 유일하게
보여드릴 수 있는 개인기예요.
멍청하게 방출된 씨앗은 깨끗하게
먹어치워야 해요. 가끔은 그놈의 꼬리가
이빨 사이에 버둥거리기도 하지만
그건 살짝 그로테스크해지려는 기미일 뿐이에요.
우리는 체외에서 수정하지 않거든요. 끽해야
몸체의 머릿수만 불리는 겁니다.
스무 개 머리통을 가진 고깃덩어릴 보신 적이 있나요?
거품이 팡팡 터져 나가는 시간이에요. 人魚처럼
저를 기억해 주실래요?
볕 좋은 해변에서 당신을 만날 상상,
머리칼을 쓸어내,
사위는 조용해지고
세제 향이 은은하게 묻어나는 접시 위에
머리 스무 개 달린 구운 생선을 올려놓았습니다.
엄마는 이건 길조라는 말을 덧붙였죠.
미장 匠 하는 여자
촤르르륵 시멘트 가루가 산을 쌓으며 쏟아진다.
촤르르 시멘트 부대 주둥이가 오바이트 하듯
가루들을 거침없이 쏟아 붓고,
바닥난 구역질로 어깨 들먹이며 나는
주저앉아 있다. 체를 쳐
돌멩이를 고르던 아주머니가 등등 탕탕
두들겨 주신다. 등이 울릴 때마다
목구멍에선 꾸역꾸역 미역처럼 풀어지는
머리칼이 기어 나온다. 영사 막이 흔들리듯
차르르 차르르 시멘트 가루가 흘러내린다.
내 혀는 시생대 고생대 화석들을 빚어내기 시작한다.
내 혀는 중생대를 거쳐 파충류를, 유인원을 토해낸다.
아주머니가 시멘트 부대를 탈탈 털고
안과 겉을 뒤집어 놓는다.
내 혀가 뒤집어진 얼굴을 게워낸다.
퉁퉁 불은 달덩이가 푸딩처럼 쏟아지고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곱디고운 가루들을 반죽하신다. 사내들아 벽돌을 쌓아라.
제멋대로 생겨먹은 벽돌들을, 아그들아 어서 싸게
내려놓거라. 어깨가 짓눌릴 때마다 천장이 아슬
아슬하게 높아만 가고 짓이겨진 반죽 덩어리 나는
아주머니가 머리통을 으깨 주셨을 때
열락悅樂에 앉아 있었다.
9시 10분 35초의 물방울/이낙봉
인공폭포 앞에서 시계 바늘이 멈추었네요, 할머니는 정류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요, 인공암벽 불빛이 쏟아지고 황금잉어가 웅성거리고 있네요,
복숭아꽃살구꽃아기진달래폭포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디카폰으로 사진을 찍고요, 기계음에 맞추어 춤추는 젊은이들의 몸에서는 비린내가 나네요,
복숭아꽃살구꽃아기진달래폭포
황금잉어에게 먹이를 주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주식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이네요, 여전히 시계는 멈추어 있고요,
맹인지팡이가 걸어간다
오존주의보가 발령된 서울
지하의 회색벽이 무섭게 달아난다,
사이버대학의 학생 모집 광고판 아래, 술 취한 사내가 장애인오약자임산부 좌석에 앉아 덜컹거린다, 입술이 두툼한 여자의 가는 허리가 덜컹거린다, 덜컹거리는 허리 옆에서 목이 굵은 사내가 덜컹거리고 긴 머리를 동여맨 사내가 덜컹거리고 성경책을 읽는 사내가 덜컹거린다,
덜컹 덜컹 다음 칸의 경계를 밟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 곁으로 맹인지팡이가 천천히 걸어간다,
제5문명기/김영미
여름
도시의 야자나무 숲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른다
19층 베란다에 원숭이처럼 매달려
아랫동네를 내려다본다
문명의 발상
그 시원은 물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젖줄
옥상에서 시작되고
도시의 사막을 건너기 위해 기르기 시작한
우리시대의 낙타
지붕마다 파랑 노랑 원색의 물통들
물을 마시기 위해 우리가 허리를 굽혔던 적이 언제인가?
조약돌 시냇가 허리를 굽혔을 때
문득 파란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동심원동심원 냇물이 즐거이 손을 잡던
목을 축이기 위해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는 시대
나는 낙타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벽산오아시스, 엘지오아시스, 고가도로에서 잠시 끊어진다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한다 오를수록 많아지는
낙타의 발자국
목이 마르다 무한 갈증의 시대
문을 걸어 잠근 도시 위로
쏟아지는 햇빛이
칼처럼 번뜩인다
睡眠圖
문득 몸이 붓이란 걸 알았다 내가 잘 동안 이부자리에 그림을 그리다는 것을 알았다 몸을 가지런히 하고 아침까지 정하게 잔 날은 곧은 대나무 그림 한 폭을 얻었다 옆구리를 세워 칼잠을 든 날은 일어나 보면 이부자리 한 켠에 베일 듯 난이 절벽을 뛰어내리고 있었다 매화 국화 때때로 새나 나비를 친 날도 있었다 요즘은 몸과 마음이 어긋나서 인지 뿌리에서 가지에서 자꾸 토막이 나곤 한다 서너 개 탈골한 꿈을 깁느라 빗소리에 바람소리 분주한 날은 날개며 꽃잎 다 떨어져 분분히 어지럽다 머릿속 잡풀더미를 쳐낼 겸 오늘은 햇빛 질퍽한 들길을 오래 걸었다 새가 날개를 그리며 날고 있었다 목련 꽃봉오리 붓끝에 힘을 주고 있었다 빈 허공이 花鳥圖 한 폭 받아내고 있었다
그날 밤,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만나는 시각, 별똥 하나가 하늘을 죽 그어내렸다 품이 넓은 오동나무 그림자는 장미농원 울타리를 타고 올랐다 달빛만이 내 잠길을 걸어나가리 붓결을 따라 고르게 숨을 포갠다 격자창 가지런히 달빛 무늬를 치듯 이부자리 가득 달빛 수면도 그리고 나는 긴 여백
제1묘지/김록
가는 이 앞에 무슨 말을 하리
무슨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헤어지고 또 헤어지는 것은 이미 슬프지 않구나
나는 망설인다
어지럽도록 누추한 분향소에서
염치없이 시든 흰 국화를 너의 사진 밑에 놓아야 하는가
대관절 다른 이들은 어떻게 쓰러지지도 않고
절을 갖추어 하고 다시 일어났단 말인가
너의 가장 친한 사람이 여기 악당이 되어 가만히
너의 기다림처럼 가만히, 서 있다
모진 변명이라 여겼던 콧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나도 삼베 수의를 겹겹으로 입은 잠이 든 걸까
문상객들의 얼굴에도 흰 한지를 씌워야 하리
눈코입귀를 막아야 하리
죽은 너의 얼굴에서 마지막으로 흐르는 피고름을 보고도
그들은 투명한 눈물을 낭비할 것인가
너를 따라 잠잠히 관에 넣는다
나의 하찮은 신의를 화장터로 보내다오
너의 뼛가루 하나하나를 추모하고 정원에 묻을 때
남은 이 가슴에 박히는 뼛가루 하나까지
등짝
등짝, 내 친구의 죽은 등짝은 살아 있었어
종일 누워 산 사람들을 기다리느라 등이 배긴다고 울고 있었어
그래, 그런 게 욕창이라는 거겠지
그래, 그런데 욕창은 아니었어
짓물러서 생기는 종기는 분명 아니었어
곪아 생기는 부스럼이라고 하기엔 훨씬 큰 상처가 내 눈에 또렷이 박힌 거야
그냥 살짝 분홍빛으로 배긴 등짝이, 내 눈에는 욕창으로 보이고도 남았어
제길, 내 눈은 살아서도 죽어 있었던 그 등짝을 노려보았었지
그 애는 살아 있는 동안 하필 발레를 했을까
곱사등이 등짝이 발레 따위로 갑자기 펴지기나 한단 말이니!
난 그 가엾은 등짝을 동정하는 대신 경멸했었지
그렇게 미워하던 등짝이 비로소 관에 안치될 때
나는 처음으로 슬픔을 느꼈어
그 등짝은
죽었다고 오해했던 그 등짝은 무섭도록 살아 있었어
너무나 많은 기억으로 굽었던
너무나 나쁜 기억으로 굽었던 등짝의 그 큰 혹은 온데간데없었지
그런데 웬걸, 내가 슬픔을 느낀 그 순간
생저 내 친구의 여린 등짝에서 음흉스럽게 안으로 자란 그 망할 혹이 내 친구의 폐를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등짝을 굽어놓고 말았어
그래, 그래서 자네가 보고 있는 내 등짜기 슬퍼 보인다면
우리는 슬픔의 양날을 알며서 말하는 게 아니라
다 이 망할 큰 혹 때문이야
그러니까 자네도 명심해
함부로 남의 등짝 따위에 이러쿵저러쿵 관심을 보이면
그 사람이나 자네나 다 혹으로 죽는다는 것을
등에 붙은 게 안으로 밀려 들어간다는 것을
푸르딩딩/황강록
푸르딩딩해져 버렸다
나 아무것도 안하다 보니
하나씩 하나씩 내 안의 불발탄들 제거하고 보니
안 예쁜 거, 언제 들킬지 몰라 불안한 거, 하면 혼나는 것들
하나씩 발라내다 보니 어느새
푸르딩딩해져 버렸다
너무 많이 했더니
덤벼. 다 덤벼. 다 내꺼야. 내가 다 먹을 거야
이것도 맛있고, 이것도 맛있고, 이 철없는 허기가 천년만년 갈 줄 알았더니
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것도 있고
할수록 쌓여가는 것도 있었는데... 하여간
너무 많이 하면 몸에 해롭다더니
푸르딩딩해진 채로
나 거울보며 넋 놓고 있다
"괜찮을 거야 키 클라고 그러는 걸 거야" 혼잣말 해보고
"뭐든지 하다가 한 단계 더 나아질 때쯤이면 무지하게 안되곤 한데." 위로해보고
"이젠 딴 거 할 때도 됐지 뭐, 멋진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희망에도 차봤다가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 아냐?" 냉소적도 되어 봤는데
불어터진 국수가락 같다 모든 가닥들
조금 이어지다가 뚝 끊어져 버린다 그냥 막강하게
푸르딩딩할 뿐이다
푸르딩딩한 거에서 뚝 멈춘 채
좌회전, 우회전, 전진, 후진, 기아4단, 다 해봐도
딱 막힌 채
되돌아가거나 그냥
밀고 나가거나 어쨌든
푸르딩딩한 거 이후는 알지 못한 채
막막하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이후에 대해선 말만 무성하지 듣도 보도 못한 채
푸르딩딩하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갉
았다. 아무도 모르게, 책상 모퉁이
구멍이 점점 더 커졌다. 몰두
해서
들여다 보면, 못 튀어나온 아래로, 책상 밑 서랍, 책들이
속살을 드러냈다. 사각사각....
선생님이 내 옆에 와서 보고 있는 걸 알지 못했다. 애들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와아 웃었다.
뭐하고 있었어?
.......
뭐하고 있었냐고?
........
선생님이 내 손의 조각도를 뺏더니 내가 뭘하고 있었는지 가르쳐 줬다.
책상을 훼손하면 돼?
난 책상을 훼손한 죄로 교실 뒤로 가서 손들고 서 있었다. 뭘하고 있었는지 대답해야 하는 곤란함보다는 손 들고 있는 게 훨씬 나았다.
며칠 째 사각거렸는지 모른다. 문득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요새 뭐하세요?
...........
적멸寂滅/이기범
빡빡 머리를 밀면서 성에 가득한 집은 멀어지고 등 붙일 구들을 찾아 도망이 익숙한 나날, 서로를 죽이지 못해 나부꼈던 사랑한다는 말. 차갑게 가라앉는 두꺼비집 같은 땅 속. 걷어 올린 화냥년 치맛자락처럼 누렇게 뜬 얼굴. 간밤에 쑤어 논 밀가루 죽을 싸들고 등교 길은 죽을 만큼 싫었다. 레일 위를 질주하는 씩씩한 기차를 보면 슬퍼진다. 해가 스러지기를 기다려 집을 짓는 거미를 보면 서글퍼진다. 아, 울음이라니 경계해야 할 울음 따위란,
영화 포스터를 붙이는
탑 비디오가게 아저씨
안녕하세요
손을 흔들던 왼쪽 의수
가법게 머리 숙이고 돌아서는
둘리오락실 앞에는
땀 흥건한 발소릴 기억하는지
절 때려주세요
때려주세요
늦은 밤까지 머리 치어드는 오락기
아이들은 커다란 망치를 들고
날 기다린 것인지도 모를 일
골목을 돌아 나올 때까지
대못 꺾어지는 소리
쩌렁쩌렁
열사병
냇물에 발을 적시다
물러서지 않는 더위
이겨내지 못해
물에 빠져 발버둥치는
잠자리를 본다
수면에 알을 낳다
이 얕은 냇물
수마로 변했는지도 모를 일
보도블록 교체 작업이 입에
풀칠을 해주던
정릉동 개천 옆에서
막걸리만이 힘겨운 걸 잊게 해줄 거라
꼬드기던 십장아저씨
아,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막걸리
몽롱해진 하늘
어느 새 옆에 누워
빈대떡 뒤집듯 날 굴리다
먼데 까맣게
쏟아지는 것이 잠자리라고
머리 위에서 빙빙 이념 흔들던 잠자리라고
온몸이 한겨울에 던져진
그해 여름
배부른 뱃거죽
평평한 자갈 위에 널어 말리며....
꼭두새벽
애완견 안고
동물병원 앞에서 발 동동 구르는
사람들
알 수 있을 것 같은 오늘
이글거리는 햇살
장대비처럼 쏟아지다
그늘 속 연꽃/조숙향
욕교동 가로수 그늘 속에서
편지 봉투를 팔고 있는
지체장애자의 발끝을 본다
옆으로 뻗은 고무다리
연뿌리처럼 둥글게 휘어져 있고
둥근 다리 위에 펼쳐져 있는 좌판
뿌리줄기에서 나온 수련 같다
탁할 일상에서 끌고
나왔을 것이라 여긴 건 내 오산
청정한 이슬로 놓여 있는 편지봉투 속에는
따뜻한 희망과 사랑이 담겨 있다
진흙 생의 질곡 위로
어떻게 꽃대를 힘껏
밀어올릴 수 있었던 것일까
팔월 한낮 도로 위에서
적멸한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나
저 지체장애자의 微笑
나는 욕심으로 뒤틀린
내 생의 좌판을 생각한다
원인분석
내가 놓은 세상 다리
부실공사였습니다 뼈대공사는
세상이 누르는 힘 견딜 수 있는 콘크리트와
욕망이 잡아당기는 힘 떨칠 수 있는 둥근 철근으로
잘 접합해야 온전한 한몸 될 수 있다고
내 어릴 적 아버지 누누이 강조했지만
애당초 머리로만 받아들인 콘크리트 배합방법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모래와 자갈만 섞었다든지
자갈과 시멘트만 섞었다든지, 아니면
물을 너무 많이 넣어 굳은 후에도
물의 공간만 남았던가 봅니다
내가 세운 뼈대에서
여기저기 심각한 크랙이 발생했다고
묘지 속의 아버지 찾아와 경고했지만
상상의 공간 속으로 내가 먼저 들어갔다는 걸
불혹을 넘기 다리
무너지고 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다시 내 지반의 위치를 조사하고
나와 제상 사이를 측량합니다
오차가 생기더라도 아버지 기다려 주세요
아버지와 손잡고 건널 수 있는 다리 완성될 때까지
달콤한 한때/배용제
아주 오래된 가게의 처마 밑에서
늙고 쇠약해빠진 사내가 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
오래 중풍을 앓아 덜컹거리던 몸은
순한 풍경이 된다
지칠 줄 모르고 숨찬 기억을 만들어내던 공기들도
잠시 숨을 고른다
그가 응시하던 몇 컷의 텅 빈 풍경 속
알 수 없는 까마득한 길들이 몰려온다
졸음이 그의 생각을 막아버리자
저리 순한 몸인 것을
그러므로 그의 병도 결국 일그러진 생각일 뿐
너무 오래 방치된 길 위의 기억일 뿐
졸음에 겨운 생각은 가끔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내부에 들어찬 모든 것들이
고요해진다
얼마나 편안하고 달콤한 순간을 원했었는지
연거푸 입맛을 다시며 미소를 흘린다
잠깐씩 삐져나오려 껌벅이는 생각과
덜컹 놀라는 몸을 다시 가라앉히는 졸음
오후의 햇살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누추한 그의 달콤한 한때
세상의 모든 한 번
비가 쏟아졌다
벚꽃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처음 어깨를 두드리는 빗방울들은 단 한 번 나를 느끼곤 사라졌다
집집마다 저녁식사가 준보되는 동안 늙은이들은 창밖을 힐끔거렸고 아이들은 장난감을 망가뜨렸다
무감각한 것들에게만 불이 담겨졌다
끝없이 제 색을 짓이기며 꽃이 지고 진 꽃 뒤로 처음의 꽃이 피어났다 나무들은 오래오래 늙고 있었다
세상 곳곳에서 진저리치는 마음들이 무너졌고 그곳에선 더욱 더 날카로운 마음들이 돋아나 다시 세상이 되었다
이제 나는 젖었다
비가 쏟아졌다
세상의 모든 처음과 혹은,
모든 마지막과
모든 한 번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풍경 속에서.
유리점
김은 여전히 유리를 자르고 있다
날카롭게 잘린 조각들의 위로 견고한 김의 표정이
반사된다
규격과 치수를 벗어난 부분을 가차 없이
도려내기 위해 정확한 표식을 한다
평생 유리를 다룬 김은 노련한 숙련공이다
안과 밖의 경계가 되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종류의 틀
잘린 모서리가 쑤셔 박히자 비로소 견고해진다
저 투명한 단절,
완전히 무관해질 풍경의 치수를 재며
갖가지 모양의 틀을 이리저리 돌린다
김의 표정이 반짝인다
고정시킨 세상의 틀은 안전한지
느릿느릿 구름이 지나간다
안전한 것들과 평화로운 것들만 통과시킨다
그러나 망가진 유리를 갈아 끼울 때마다
안에서 반사된 뾰족한 흔적들이 어른거린다
여전히 김은 유리를 자른다
갑자기 그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움켜쥔다
쓸모없이 버려질 한 조각이
김이 손에 박혀 있다
붉은 내부가 뚝, 뚝, 쏟아진다
김은 그가 만든 투명한 감옥에서 무성영화처럼 어른거린다
글루미 선데이
너무 많은 일요일을 탕진했다. 나는 벌겋게 녹슨 구름의 문장으로만 묘사된다. 한때 나를 반기던 무수한 일요일의 햇빛들, 속으로 봄날은 빠르게 증발했다. 너무 늦게 꿈속에서 깨어난 나비들은 검거나 흰 꽃그림자만 찾아다닌다.
텅 빈 일요일 어디든 나를 내려놓고 싶었지만, 이미 어둠의 그림자들 가득한 베치, 길마다 퍼즐을 끼우느라 남은 호흡을 마저 꺼낸다. 헐렁해진 어둠 속 내 늙은 그림자가 일요일만 고여 썩어가는 우물을 안고 돌아선다.
일요일의 간판들, 문 닫힌 상점을 기웃거리다 겨우 비상근무중인 약국에 들러 냉동 나비를 산다. 나비야, 라고 부르자 정말 나비처럼 날아가 버린다. 내 손엔 나비의 떨림만 남는다. 세상의 흔적은 값싸 고지서로도 발송되지 않는다.
이제 곧 집 떠난 숨결들이 우연을 가장하 채 내 옷깃을 흔들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내 귀에 속삭여주지 않기를. 일요일을 기억하는 눈물이 되지 않기를.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길을 따라 집으로 간다. 나무는 나무의 습성으로, 바람은 바람의 결로 날갯짓을 멈춘 나비는 다시 꿈으로, 내 생의 어둠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이 저녁.
검은 나비 떼 우르르 날려 보내는 일요일.
* 글루미 선데이 : 1935년에 만들어져 수백 명을 자살로 이끌었던 곡, 그리고 그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꿈의 형태
얼어 죽을 만한 날씨가 아니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구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건만
한 방울의 눈물도 얼어붙지 않았다
검은 소독약처럼 번진 밤이 지나자
몇 식은 불빛들이 창밖에 매달려 있었고
금간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암각화처럼 새겨졌다
반쯤은 웅크린 듯
반쯤은 벌어진 아스팔트 틈으로 몸을 밀어넣는 듯
그의 마지막 눈빛을 반짝였을 뿔테안경만 먼지의 가면을 쓴 채
뿌연 새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을 확실하게
고정시킨 꿈은 도대체 어떤 형태의 고체인가
몸 밖까지 퍼렇게 새어나온 냉각의 불빛을 들고
그는 어떤 어둠을 밝히고 싶었을까
딱딱한 껍질을 가르고
어두운 내부로부터 흘러나온 숨결을 흡수한 지상은
다시 제 몸을 데우려
붉은 아침을 향해 몸을 뒤척이고
차디찬 바람이 호각을 불며 달려온다.
벌판으로 간다
숲을 떠나면 모든 것이 아득해진다. 지상에서 가장 고요하게 펄럭이는 벌판. 나는 깃대처럼 서서 아득함을 움켜쥐고 흔들린다. 씨앗들이 집으로 돌아가 흙 묻은 발을 툭툭 털고 노쇠한 새떼들 벌레들 노을 속으로 새끼를 찾아 떠난 텅 빈 벌판.
비워낼수록 하늘이 가깝다. 허공을 비워내고 만나는 지평선. 저 스스로 비운 것들은 노래가 된다 흔들면 흔드는 대로 후려치면 후려치는 대로 너울너울 흐르는 노래. 벌판에서는 걸음의 방향 모두가 길이다. 아득함조차 내게 주어진.
바람의 호수. 가라앉은 어둠이 일렁인다. 어둠의 표면 위에 내가 떠 있다. 방죽 물살에 흔들리던 유년의 얼굴 그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 얼굴을 마주보는 얼굴. 건져낼수록 연거푸 떠오르는 얼굴들.
아득한 건 정말 아득해진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벌판인지 지평선마저 비워낸 벌판. 나는 지평선을 넘어 거꾸로 걷고 있다. 벌판을 머리에 이고 하늘을 딛고 어디로. 벌판 저편에서 별이 뜬다. 이제 나마저 아득해진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 들려 뒤돌아보면 너무 아득한.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더 아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