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누군가를 붙잡기 위해 너무 오래 매달리다 보면
내가 붙잡으려는 것이 누군가가 아니라, 대상이 아니라
과연 내가 붙잡을 수 있는가, 없는가의 게임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게임은 오기로 연장된다.
내가 버림받아서가 아니라 내가 잡을 수 없는 것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어 더 이를 악물고 붙잡는다.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분노한다.
당신이 그랬다.
당신은 그 게임에 모든 것을 몰입하느라
전날 무슨 일을 했는지 뒤를 돌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당신은 그를 '한번 더 보려고'가 아닌
당신의 확고한 열정을 자랑하기 위해 그를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걸 전투적으로 포장했고, 간혹 인간적인 순정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 그 끝 지점을 확인하는 순간
큰 눈처럼 닥쳐올 현실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당신은.
그 무렵 나는 당신을 그 절망에서 꺼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도화지를 기다랗게 말아 눈에 대고는 그곳을 통해 단 한 가지만 보려 드는 당신,
그런 당신에게 어울리는 건 한참 느슨하고 모자란, 나 같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허나, 당신은 몇 년째 그대로였다.
여전히, 오랜만에 길가에서 마주친 나 같은 사람은
아침 신문에 끼여 배달되어 오는 전단지 같았다.
어떻게 그 모든 것들이 몇 년 전과 똑같은 그대로일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을 거둬버린 그를 향해 다시 사랑을 채우겠다고,
네 살 난 아이처럼 억지 부리는 일로 세상 모든 시간을 소진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고장난 장난감처럼 덜그럭덜그럭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낯선 곳에 가 있으면서 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균형을 잃은 지 오래이면서도 그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고양이처럼 돌아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찌 될 것인지, 어찌해야 할 것인지를
결코 당신이라는 고양이는 알려주지 않는다.
*
웃기는 기억이 떠 올랐다.
녀석이 말하기를
"선배, 일기장 좀 빌려줘"
어찌나 진지했는지 난 일기장을 빌려 줬다.
어느날 그의 집에 놀러 갔을 때
그의 컴퓨터 옆엔 내 일기장에서 발췌한 글들이
포스트 잇에 씌여져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날도 그는
오십만년 전부터 먹고싶었던 동태찌게를 끓였고
백만년 전부터 먹고싶었던 총각김치를 내 왔다.
그의 과장법이 허풍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음식을 먹는 모습이
정말 백만년전 부터 먹고 싶었던 사람처럼 성실하게 먹었기 때문이었다.
성실을 어떻게 느낄 수 있었느냐고?
혓바닥이 델 만큼 뜨거운 국물을 혓바닥으로 굴려 가면서
콧 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전력을 다해 먹는데만 치중하는 모습에서
짜식
시를 써도
지금처럼 전심전력을 다해 쓰겠구나 싶었다.
어느날 그에게 전화했다.
" 나 말이야 다리 하나 짤랐거든, 그러니까 술 사줘"
현찰로 1억 2천만원을 떼이고 포기하느라 다리 하나 자른셈치자고 위로하던 날이었다.
기억에도 없을만큼 술을 마셨다.
난 그의 침대에서 혼자 아침을 맞았다.
"내가 왜 여기서 혼자 자지?"
"선배가 너무 취했거든요"
"너라면 같이 여행을 갈 수 있겠다"
"나도 선배라면 여행을 같이 갈 수 있겠어요"
늘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던 녀석이었는데 의외의 반응에 놀랐다
"왜지? 난 이유가 있는데,,,같이 자지 않아도 되잖아. 오늘처럼."
"왜 그렇게 생각하죠? 잘 수도 있지 왜 안된다고 생각하지? 이상하네."
"그건 안 돼.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 관계는 깨지고 말게 될거야"
그러나
자던 안 자던
깨질 관계는 어떤 식이든 깨지고 만다.
지금 그와 내가 만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만나지 않는다고해서
관계가 깨진 건 아니지 않나?
어느 해 겨울 석달 동안
우리는 거의 매일 스키를 타고
노천 온천에서 사우나를 하며
드라마와 영화를 기획했는데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가는 길목에
밤새 내린 눈길이 위험하다고
늘 붙잡아 주곤했던
후리지아 꽃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타나서
미소가 주는 상큼함과 친화력을 가르쳐 준 아이.
제법 주변을 챙길 줄 아는 아주 이기적인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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