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그저,,,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가기.

monomomo 2003. 8. 14. 20:36



다만 예를 갖췄을 뿐.

모든 것을 외면하고 싶었다.

무릇 사람의 관계란,

끊을 때는 미련을 갖지 말고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질다는 건 알지만 오히려 기회라 생각하고 싶다.

혹여 나의 친절함이 잘 못 읽혀져 최소한의 고마움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짐작하고 다른 일이라 여겨지도록 보여지는 것도 중요하니까.

하여 아니라고 판단 된 그 다음 순간

나역시 마음 돌리는 것 쯤은 잘 할 줄 안다는 것을 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을 후회 할 것이다.

아니 이미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상처 받고 싶지 않는 보호 본능이

단조로움을 원하는 한 사내처럼.

나도 단조로움을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 켠이 아리는 이유는 뭣 때문일까?



은희경ㅡ타인에게 말걸기ㅡ


(전략)……………
내 등뒤에 대고 그녀가 말했다.
“내일 또 올 거지?”
“ ?뭐?”
내 목소리에 충분한 짜증이 섞여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명랑했다. 오히려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그녀를 더욱 즐겁게 하기라도 한 듯 그녀는 깔깔 웃었다.
“그때 말야.”
그녀의 검은 눈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산부인과에 따라가달라고 처음 찾아갔을 때, 왜 하필 너였는지 알아?”
“왜 그랬는데.”
“ 네가 친절한 사람 같지 않아서야.”
“……”
“거절 당해도 상처 받지 않을 것 같았어.”
담배를 꺼내려고 주머니를 더듬다가 나는 그녀가 잘 관찰했듯 대부분의 남자들이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 담배를 넣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만약 병원에 따라가준다 해도 너한테라면 신세진 느낌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지. 남의 비밀을 안 뒤에 갖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정 같은 것, 그런 것을 나눠주지 않을 만큼 차갑게 보였기 때문에야.”
“…….”
“ 난 네가 좋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냉정함 말야. 그게 너무 편해. 너하고는 뭐가 잘못되더라도 어쩐지 내 잘못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불을 붙이려던 나는 이곳이 병실 안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고 담배를 도로 담뱃갑 안에 집어 넣었다.
“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이제보니 그녀의 벌어진 눈 속은 꽤 깊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그렇게 냉정하게 살 수 있는 거지? 사실은 너도 겁이 나서 피해버리는 거 아니야?”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서 뺨 위의 흉터가 함께 끌려다니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 흉터는 몇억 년 전의 사암 속에서 발견된 연체동물의 화석처럼 이미 사라져버린 삶의 어렴풋한 흔적을 느끼게 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치었다는 택시가 사력을 다해 급정거를 함으로써 오히려 그녀가 원했던 죽음과 절망을 유보해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 택시 운전사도 나처럼 그녀를 만나서 일진이 나빴던 것만은 틀림없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끊어지려는 순간 송수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그러나 저쪽에서는 깔깔대는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점을 쳐볼 필요도 없이 역시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 나는 소리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고는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의 습관대로 먼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며 나는 샤워바스가 엎질러져 있지 않은지 타월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젖어 있지나 않은지 살펴 보았다.
샤워를 마치고 폴로 조깅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냄비에 정량의 물을 붓고 조심해서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냉장고에서 저칼로리 우동을 꺼내 봉지를 찢을 때도 성급히 귀퉁이를 크게 찢어서 내용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생각해보니 전화 속의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였던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끓는 물 속에 액상스프를 넣었다.
내가 전화를 기다리는 것일까? 냄비 안의 우동 스프가 뭔지 이상하다고 생각 되었다.
간장색이 배어 나오기 시작해야 하는데 건조된 파 부스러기가 둥둥 떠다녔다.
액상 스프가 아닌 분말스프를 먼저 넣은 것이다.
나쁘게 정해진 일을 피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언제나 내 머릿속에는 ‘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말이 떠오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나는 단조로움을 원한다. (문학동네,1996년 봄)


'그냥,,,그저,,,그렇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다는 것은.  (0) 2003.08.23
푸념.  (0) 2003.08.19
한 순간인 삶.  (0) 2003.08.07
간절히 원하는 것.  (0) 2003.08.04
살아 남은 자의 이기적인 슬픔.  (0) 2003.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