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연필심에 침 발라가며 뒷 장까지 자국이 남을만큼 꾹꾹 눌러 써서 숙제를 하던 기억이 있다.
숙제 검사가 끝나면 노트 밑에 선생님이 써 주신 글자.
-참 잘 했어요. ★★★★★-
하늘을 날듯 기뻐했던 기억들, 기억들.
지금은?
숙제를 내 주는 사람도 없고 숙제를 검사할 사람도 없다.
그러니 -참 잘 했어요. ★★★★★- 를 받을 수도 없다.
비가 내릴 것도 아니면서 하늘이 흐리다.
아직도 손끝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느낌에 갇혀
온 맘을 다 주고도 주지 못하는 내 맘처럼.
가슴을 가르면 그 동안 흘린 눈물이 기화되어 소금이라도 한 줌 잡힐 것 같다.
눈 한번 꾹 감으면 되는 일인데
나를 향해 선 칼끝의 날을 정면으로 보고 찔릴 자신이 없다.
빛으로 쏟아지다 어둠으로 감싸다가
어쩌자고 절망도 아닌 것이 희망도 되지 못하는지.
밴다이어그램 안에 교차 된 빗금쳐진 부분처럼
나인듯 내가 아닌 듯
마음은 아직 겨울인데 봄은 뿌득뿌득 다가온다.
동화 하나 제대로 쓸 자신도 없으면서
하필이면 죽어 가는 사람을 그려내야 할 내용을 주제로 삼다니.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 다가 오지 않아서 끙끙 앓는다.
그 사람이 지금 내 안에 사느라고 이렇게 아픈건지
죽어 가는 사람들이 나오는 작품들을 많이 봐서 그런건지
굳이 봄을 핑계대지 않더라도 몸과 마음이 다 노곤하다.
다시는 이런 배역이 있는 작품은 쓰지 말아야겠다고 맹세맹세 해 본다.
그래도 끝은 봐야 하는데......
뭔가를 완성 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하긴 제대로만 쓰면 일년 년봉인데 이 정도 아픔쯤이야 견뎌야겠지.
작가는 점 하나를 찍느라고 오전을 보내고 오후 내내 생각해서 그 점 하나 지우는데 보낸다 했거늘.
두루두루 무겁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참 잘 했어요. ★★★★★- 받기는 그른 것 같다.
거울이 되어 - 김현식
'시나리오.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네마 파라다이스. (0) | 2007.01.27 |
---|---|
쓸쓸한 날엔. (0) | 2006.03.15 |
"저 목 말라요. 물 좀 주세요!" (0) | 2003.12.24 |
오래간만의 나들이. (0) | 2003.06.11 |
차라리 꿈이었으면. (0) | 2003.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