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이민을 갔다.
오늘 오후 비행기로.
이민이라기 보다 시집을 간 것이다.
몇 해 전 이혼을 하고 수년 동안 딸 하나를 기르며 살던 조카는
그 이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상대가 결혼을 하자고 아무리 졸라대도 총각이라는 이유로 거절을 했었다.
그 남자는 가정을 꾸려서 아들 딸 낳고 살고 싶어하고
조카는 지금의 딸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견해차 때문이었다.
결론은 지금의 딸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싫고
애먼 남자 자기 때문에 인생 망치게 할 수 없다고 밤마다 울면서 그 남자를 포기했다.
아프냐고 묻는 내게 죽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나 하나 아프면 그만인 것을 여러사람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고.
속 깊은 아이였다.
자기를 포기 하면서 상대를 배려했던.
내가 좋아 하는 몇 안 되는 피붙이 중 하나다.
괜히 나땜에 영향 받아서 영극영화를 전공해서 고생도 지질히 많이 했다.
-나 땜에 조카 두명이 영극영화를 전공했다. 잘 살려서 써먹지도 못할 것을. 그 때문에 원망도 많이 들었다. 언니들한테. 애들 다 베려 놨다고-
그 조카.
결혼 하겠다고 했을 때 사랑하느냐고 묻는 나에게
"지금이 싫어서, 지금 보단 낫겠지 뭐."
조카는 실연을 당한 직후였고 부모님이 좋다고 하는 정말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하고 결혼을 했다.
남편은 목사였다. 지금도 목사고.
그 남자와 이혼 하겠다고했을 때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다 반대했다.
무엇이 문제냐.
술을 마시냐?
담배를 피냐?
도박을 하냐?
아님 계집질을 하냐?
아니었다.
너무나 착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좋은 남자였다.
그런데 싫다는 것이다.
그걸 어찌 말로 표현하나.
그 반대에 부디쳐서 5년을 참고 살았다.
나만 유일하게 이혼을 하라고 했다.
싫은 사람하고는 눈만 마주쳐도 싫은 법인데 어떻게 살을 맞대고 사냐.
좋은 사람하고 살아도 좋을까 말까하는 세상에 이혼해라.
-그 때 난 가족들한테 맞아 죽을 뻔 했다. 지가 뭘 안다고...그게 쥐약이었지만 꼭 해 봐야 아나? 내가 가끔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 해 보고도 알 것 같은 것은 안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조카가 맡았고 아버지는 종종 만나게 했다.
좋은 남편은 아니었지만 좋은 아버지였으니까.
그렇게 맡은 딸을 피아노 선생님을 하면서 힘겹게 기르는 이야기를 신문에 기고를 했다.
그 신문을 본 외국 살던 그 남편이 신문사로 편지를 보냈다.
본인도 딸을 혼자 기르는 남자라고 힘내라고.
그렇게 시작 된 편지들이 쌓이고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진 이들이라서 그런지 사랑이 싹 트고 결혼까지 해서 오늘 떠났다.
떠나는 조카한테 그랬다.
외국이 좋기야 하겠냐만 그려러니 하고 살아라.
걱정 하지마. 지금 보단 낫겠지.
조카는 항상 지금보단 낫겠지 하고 사나 보다.
긍정적인 말인지 부정적인 말인지 감이 안 잡힌다.
그러면서 농담 한마디 건넨다.
나는 두번이나 가는 시집. 이모도 한 번 가보지?
농담을 들으면서 이제 갖 마흔을 넘긴 녀석이 오십을 넘어 육십을 향해 가는 사람한테 시집을 가면서
마음 하나 맞는 거 믿고 갔지 무슨 육적인 욕정을 가지고 갔으랴싶어 마음 한켠이 애잔해졌다.
다만 포기가 아닌 것이었기를 바래 본다.
밥 한 번 먹자는데 미국가면 하나님과 영어로 말해야 하는 걸로 아는지 교회에 가서 기도해야 한다며 도통 시간을 주지 않아 못 먹고 말았다.
잘 살기를 기도한다.
나는 당연 한국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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