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반 지갑 속에서 자라는 아이.

monomomo 2002. 7. 9. 11:51




반 지갑 속에서 자라는 아이.


“아무 이상이 없는데 왜 그런데요?”
“그거야 잘 모르죠! 검사를 더 해 봐야지 지금으로서는, 목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고…
순환기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뇌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으니 엠알아이 검사를 한 번 해 보시죠?”
참참참!!!
의사와 나눈 대사가 아니었음 싶은 대사를 나누고 난 뒤,
아무리 시큰둥하지 않으려 해도 저리 시덥잖은 말을 하는 의사를 믿기란 쉽지 않았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 읊는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자기 검진이 가능한 말을 들으려 병원에 가는 게 아닐진데…
저이도 배울 때는 저러지 않았겠지.
의술은 인술이라 생각하며 해부학 시간에 나는 역한 피 비린내 참아가며 각오를 하던 때도 있었겠지.
이 땅에서 죽어 가는 생명에게 새 삶을 주는데,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치리라 각오하며 공부를 했으리라.
또 한 번 그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짐작 되어지는 대로 얘기하는 일은 점쟁이가 하는 말이지,
적어도 의사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보아하니 환자들이 병원에서 돌림방을 당하면서 더 병을 키우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각설하고.
소아과 병동을 지나다가 첫돌이 갓 지난 듯이 보이는 아가를 봤다.
그 아가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귀찮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도저히 아가가 지을 수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 아가의 표정을 보고 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 하나가 떠 올랐다.
한 남자의 반 지갑 안에서 커 갔던 한 아가의 얼굴이.

지갑 안의 아가 아빠는 작가다.
그는 날이면 날마다 머리에 새집을 짓고 아침을 맞았고,
그것이 아니라도 엄청 선택을 하고 살아야 하는 일들 가운데,
매끼 마다 선택을 해서 배달을 시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일까지, 덤으로 해야 했던 자칭 잡문작가.
아가의 얼굴은 언제나 그의 반 지갑 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그는 학교 때부터 글을 쓰고자 하는 다른 학생보다 작가적 재능이 월등해서
문학상이란 문학상은 다 휩쓸다시피 하여 부러움을 사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일류 작가가<소설가>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것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적어도 그가 한 아가의 사진을 반 지갑 안에 넣고 다닐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술자리에서였다.
친구들은 모두 그가 잡문을 쓰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한 줄 짜리 삼류 비디오 카피라도 마다 않고 이것 저것을 써대는 그에게
친구들은 안타까움 반, 꾸지람 반으로 한마디씩 던져댔다.
그러나 그는 그때 마다 아니라며 자기는 이런 잡문이 어울리며 그 쪽에 훨씬 재능이 있다고 응수를 하곤 했다.
친구들은 그의 그 시니컬하고 불성실해 보이는 태도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어느 한 날, 친구들은 다른 날과는 조금 강도가 다르게 그를 닦아세우기 시작했다.
“야! 이 세끼야! 너는 우리의 꿈이었어. 임마!”
“니가 그러고 있으니 우리가 어디 꿈이라도 꾸겠니? 쨔샤!”
“봐서 알지? 너도? 그 벨 것도 아니었던 X만이도 문단에서 한 가락 하고 있는데 넌 뭐하냐?”
“ 그러게. 조 새끼 아주 우끼는 새끼 아니야?”
“냅 둬라! 지 꼴리는 대로 살라고. 저 씨방새한테 얘기 해 봤자 입만 아퍼! 등신 같은 놈”
정도 껏 순화를 해서 옮겨 놓아서 그렇지 입 달린 친구들은 다 한마디씩 그에게 던졌다.
아무 말도 않고 술만 묵묵히 마시던 그가,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뒷 주머니에서 반 지갑을 꺼내 보이며 울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다.
“ 이거 보이냐? 내 딸이다. 얼마나 이쁜지 아냐? 모르지? 니들이 뭘 알어? 뭘 안다고 주둥아리 놀리느냐고?
그래~~ 니들 다 잘났다. 열심히 예술들 하고 살아라. 나는 니들이 말 한대로 웃기는 새끼다. X도 아닌 놈이라고.
그래서 니들이 나 이렇게 사는데 뭐 보태 준거 있어? 잡문은 쓰기 쉬운지 아냐? 이 X보다 못한 새끼들아?
이년이 내 딸인데 잘 봐 둬! 니들 며느리 감 될지도 모르니까!
나! 삼류 작가로 살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이년 꼭 살리고 말거야.
태어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발자국도 병원 밖엘 못 나가 본 이년 꼭 살려서 시집 보내고 말 거야.
7년을 중 환자실에서 살면서 아빠 한번 못 불러 보고 취학 통지서 받은 이 년 꼭 여자로 만들어 줄 거야!
시집은 못 보내더라도-울면서- 생리 할 때까지, 생리 할 때까지 만이라도 살게 해 주고 싶어.
그 때까지만 살아 달라고, 그 때까지 살아만 있어 달라고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 하는지 니들이 알기나 해!
기집애로 태어 났으니까 꼭 기집애를 만들어 주고 싶단 말이야!
내, 이년 만들 때 목욕 재게하고 정성은 안 드렸다마는 최선을 다 했다.
붓글씨 쓰는 심정으로 X끝에 힘주고 거북구자, 용용자를 일필휘지로 휘둘렀다. 이X같은 새끼들아!
그러니까 니들이 원하는 그것, 내가 꼭 해 줄 테니까 좀 기다려라.
원이라면 해 주께. 그러니 아가리 닥치고 좀 기다려 주라. 응? 이년이 생리하는 그날까지만, 부탁이다.”

그의 지갑 속에서만 자라던 그 아가는, 그나마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었던 것이다.
친구들이 그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모진 말을 해서라도 그가 가려 했던 길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맘에서 한 말이었는데 그것 조차 그에겐 상처가 되었었다.
그 아이가 살았으면 지금 열 다섯 살인데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이 끊겼으니.

그의 절박함과 달리 내 일이 아니라서 잊고 산 일이다.

ㅡ잊기 위하여 혹은 잊지 않기 위하여ㅡ

새록새록 이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날씨가 몹시 텁텁하다.

이번 주엔 수소문을 해서라도 그를 만나 술이나 한잔 할까 한다.





짱짱 ^*^))// 방글방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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