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늦은 약속 시간은 어머님 제사 시간이었다.
이미 제사를 다 지내고 모두들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난, 대충 인사를 하고 거실 한 켠에 마련된 어머님 영정 쪽으로 갔다.
생존 당시와 가장 가까운 시절에 찍은 영정 앞에 앉아 술을 한잔 올리고 기도를 했다.
ㅡ 알지? 말 안 해도? 나 길게 말 안하고 싶어. 모를리도 없겠지만 모름 말고. 하여간 나 일 시작 했거든? 그러니까 알아서 해! 잘 되야 된다는 것도 알지? 알아서 해 줘! 믿을게. 안 오려고 하다가 왔어. 7년만에 나타나서 지 필요한 말만 한다고 삐졌다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왔어. 큰일 시작하려니까 생각 나데? 그럼 나 일어난다? ㅡ
엄마는 뭔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암말 없이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눈물을 흘릴 계획은 없었으나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자위가 묵직해지면서 슬픈 것도 아닌데 명치끝이 아려왔다.
제기랄!
난데없이 오빠<난 그를 부를 때“저기요?”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얼굴이 마주쳐야만 말을 한다>가 집합을 시켰다.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불콰했다.
그는 내 생에 단 한번도 들어 보지 않아서인지 듣기에도 생소한 <가족>이라는 단어를 거론하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이렇게 가족이 되어…… 우리는 가족이니까…… 이 오빠가 자꾸만 맘이 약해진다……한 10년쯤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우리 가족이……”
참나!
오늘 쓰려고 그간에 가족이라는 단어를 그리 아끼셨나?
그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무슨 접속사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가족가족가족가족
족히 100번은 더 쓴 것 같다.
난 한번도 사전에서 의미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가져 본 적이 없다.
함께 살면서 티격태격 싸우면서 정이 쌓아지고 두터워 지는 그런 가족.
이른바 우리 가족은 함께 살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는 가족이다.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엄마를 사랑했지만,
언니들이 있고 오빠라는 작자도 있지만,
단 한번도 동시에 기억할 만한 잔존 기억이 없는 가족이란 가족이라 볼 수 없다고 생각 되어지기에.
이렇게 묶으면 언니가 떨어져 나가고 저렇게 묶으면 오빠가 떨어져 나가고
어떻게 묶으면 아버지가 떨어져 나가야 하거나 엄마가 떨어져 나가야만 이루어 지는
이상한 구성원의 가족들 틈바구니에서
줄 긋기도 안 되고 어떻게 묶어야 한 묶음이 되는 가족인지 구별하기도 힘들고 해서
그냥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게 편해서
그렇게 살고 있는지 이미 오래다.
난 무슨 <가족>을 염불처럼 외워야 하는 종교 집단의 교주의 설교처럼 들리는 그의 일장 연설을 들으며
게다가 <우리>라니? 언제부터 그와 내가 <우리>로 묶여졌지?라는 의문을 가졌다.
내 울타리 안의 <우리>엔 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언제부터 내 허락도 없이 내가 그의 <우리>안에 속해 있었는지 강하게 고개를 디밀고 치고 올라오는 반발심이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보게 만들었다.
올해로 환갑이 된 그가 한 말의 요지는 이러했다.
어딘가 아프단다. 그래서 약해졌단다. 그래서 나도 생각나고 언니도 생각 나고 그랬단다. 재산도 수십억이 된단다. 이제는 자장면도 잘 사먹는단다. 그렇게 먹고 싶은 자장면도 안 사먹으며 왜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단다.
환갑이 돼서야 자장면 수십억 그릇 사 먹고도 남을 돈을 모아 놓고
이제 겨우 자장면 한 그릇 자유롭게 사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어째서 한 뱃속에서 나와서 이리 다른 사고를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난 무조건 오늘만 생각한다.
가장 확실한 오늘이 가장 확실한 어제가 될 수 있으며
가장 확실하게 오늘을 보내야 확실한 내일이 있다고 믿고 오늘에 최선을 다한다.
오늘 내 기분을 상하게 하고 내 기분을 다치게 한다면 내일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했기에
낭비는 아니더라도 늘 필요한 돈은 그때 기분에 따라 써 줬다.
하여 가장 확실하다고 믿는 오늘을 보내고 있으므로 내일 또한 확실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돈이라는 것은 필요할 때 제때 써 주지 못하면 아무 효용가치가 없다.
표현에 어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돈은 항상 그의 마음만 든든하게 해 줬으며
통장에서 아라비아 숫자의 길이가 남들보다 좀 더 길고
콤마의 갯수가 남들보다 좀 더 많다는 것 이외의 역할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 돈은 이미 돈으로써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
언젠가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 밑으로 무릎을 끓고 들어 오면 그때 내가 너를 돌봐주마!”
그 때 난 결심했다.
“내가 혀끝을 물고 죽으면 죽었지, 아니 빌어 먹는 한이 있어도 니 밑엔 무릎 안 꿇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치사하긴 하지만 내 대학 등록금 한 번만 대 줬어도 가능했을 용서!
방 빼서 영화 만들 때 1원만 보태줬어도 가능했을 용서!
물론 내가 예술이다 나발이다 하면서 이 바닥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예쁘지는 않았겠지만
연극을 한답시고 굶어가며 살아갈 때 밥 한끼는 고사하고
돈 안 드는 위로와 격려 한마디만 해 줬어도
함께 끌어 안고 어디가 아프냐고 울어 주며 용서했을 것이다.
그가 아니었어도 지금까지 잘 살아 왔는데
이제 와서 절대로 그 앞에서 무너질 수 없다.
주는 것 받아 주는 것도 미덕이라는 것 쯤은 나도 알고 있다.<돈을 주겠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의 말이 무슨 유언의 일부를 남기는 듯 했고 마치 상속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자리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므로>
난 용서를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 할 것이다.
니가 그렇게 나가면 같은 사람이 될 거라고.
그래도 상관 없다.
지금 용서하면 다 허물어져 버린다.
그를 목표로 죽어도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살았는데
이제와 용서해서 약해지는 내가 되고 싶지 않다.
다만 그의 건강 정도는 빌어 줄 것이다.
아프지 말고 살아 있어야 나랑 정면으로 부딪혀서 승부를 겨룰 수 있으니까.
적도 아니고 동지도 아니면서 내가 살아 가야 할 이유와 해야 할 일의 목표점에
그나마 그가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느라
김치를 싸서 쥐어주는 그의 낯 설은 행동을 얼떨결에 떨치지 못하고 받아왔다.
그리고 그 김치에 라면을 먹으며 생각했다.
씨팔!!!
그지 같은 핏줄!!!
*그나저나 엄마는 영정을 찍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길래 저리 입술을 굳게 다무셨을까?
무엇이 저리 엄마의 입술을 굳게 다물게 하였을까?
결의에 찬 엄마의 입술에서 뭔가 한마디 나올 것만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설마 “의 좋게 살아야 한다” 라는 말을 차마 못하신 건 아닌지.
제발 그 말만 아니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짱짱 ^*^))// 방글방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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