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
도법의 작업실인 서전(西殿).
미완성인 거대한 불상구조물이 무대를 압도한다.
불상구조물에는 건축할 때 쓰는 비계목이 둘러쳐져 있고 나무계단도 있다.
바닥탁자에는 찰흙, 헤라, 망치, 붓, 석고 등 소조에 필요한 도구가 너절하다. 옆에 녹로(물레)도 있다. 중앙에 낡은 탁자와 의자가 있고 앉은뱅이 책상이 객석과 마주보고 있다.
월명, 서전을 청소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캐롤을 흥얼거리면서 밀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다.
그때 털모자를 쓴 도법이 등장한다.
월 명 히익! (노래를 멈추며) 어디 갔다 오세요?
도 법 바람 좀 쐬고 오는 길이다.
월 명 밖에 눈이 많이 왔죠?
도 법 응.
월 명 (불상 구조물쪽을 가리키며) 여기도 치울까요?
도 법 아니 됐다. 수고했다. 이제 가봐.
월 명 예 예. (퇴장한다)
도법, 먼 발치서 불상구조물을 의시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 듯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다시 불상을 보면서 헤라를 치켜들지만 묘안이 없다. 이러기를 여러차례. 드디어 연장도구함을 들고 계단을 올라 구조물 얼굴 앞에 선다. 세각을 한다.
그때 문을 통해 조심조심 등장하는 원주스님. 여성적인 모습과 걸음걸이다. 손에 든 보자기를 탁자에 놓은 다음 다시 조심조심 나가려 한다. 그때 도법 스님이 인기척 소리를 듣고 돌아본다.
원 주 (여성적인 말투로) 아유, 이 오도방정. 눈에 띄면 방해될까봐 몰래 가려 했는데… 죄송해요. 누룽지 좀 싸 왔어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그렇지 개구리 점프하듯 끼니를 건너뛰시면 어떡해요. 그럴수록이 몸조릴 잘 하셔야지요.
도 법 점심 공양이 체했나봐요.
원 주 아 그럼 저한테 말씀하셔야지요. 원주라는 게 뭐하는 소임입니까. 스님같이 편찮은 분이 있는가, 대중스님들의 영양상태는 어떤가, 콩나물 두부 참기름은 얼마나 있는가, 뭐 이런 것을 두루두루 살피는 게 원주 아녜요? 뭘 드릴까요? 까스명수? 활명수? 건위정? 원기소? 말씀만 하세요. 제가 즉각
도 법 (빙긋이 웃으면서 계단을 내려와 원주에게 다가간다. 원주의 빠른 말투와 몸짓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원 주 (입을 막으며) 아유 이 오도방정! 항상 입조심 몸조심한다는 게 또 이러니. (계면쩍은 듯) 도법스님 죄송해요. 전생엔 지가 비구니였나 봐요. (불상구조물을 바라보며) 아유 이쁘기도 해라. (자기의 불쑥 튀어나온 말에 놀라) 히익 이 입! (입을 찰싹 때린다) 부처님께 이쁘다니. 호호호호 존안유망하시네요. 이제 다 끝난 건가요?
도 법 아직도 멀었습니다. 존안도 완성되지 않은 걸요.
원 주 그래요? 저게 아직 안된 거에요? 난 또…….
도 법 존안이 완성되면 여기다 석고를 입혀서 틀을 뺀 다음, 다시
원 주 (말을 덮치며) 무지하게 복잡하네요. 하긴 부처님 만드는 게 하룻밤 뚝딱 같이 쉽겠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을 머린데. 그래도 초파일 봉안식까진 시간이 충분하겠지요?
도 법 그래야지요.
원 주 이번 초파일은 으리으리할 거에요. 명찰 대덕스님들을 모두 모셔다가 큰 잔칠 벌일 테니. 대찰 큰 법당 봉안식이니 허술하게 치를 수도 없잖아요.
도 법 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요.
원 주 아유 도법스님 하시는 일이 어련할려구요.
도 법 업보만 느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원 주 아유 도법스님이사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대로가 무진법문이신데. …… 저 갈래요. 도와드린다는 푼수가 항상 폐만 끼치니. 아이 참. (나가려고 돌아선다)
도 법 바쁘지 않으면 좀 앉으세요.
원 주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의자에 앉으며) 헤헤헤. 저야 뭐 바쁠 게 있나요. 씻고 닦고 치우고, 매냥 그 일이 그 일이지요. 하긴 내일 대전 보살들이 들이닥칠 모양인데 준비해논 건 없고 막막하답니다. 김치도 담가야겠고…… 그거야 겉절이로 하면 되겠지만 또 찌개거리 국거리…… 아유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요. 게다가 채공행자가 갓 들어와서 일하는 걸 보면 애간장 태운다고요. 기껏 한다는 게 다꾸왕 무침이니 어쩌겠어요. 지가 헐레벌떡 설레벌떡 설쳐대는 수밖에. 스님, 이번에는 절대로 우리 절 된장 안 뺏길 거에요. 이느무 대전 보살들이 얼마나 깍쟁인지 제각각 비닐봉지 하나씩 가지고 와서 스님 된장이 아주 맛있네요. (비비꼬며) 호호호호. 흥! 절은 뭐 지네들 된장 치다꺼리하라고 생긴 건가. (입을 막으며) 아유 이 오도방정. 도법스님 앞에선 늘 조심한다는 게…….
도 법 (빙긋이 웃는다)
원 주 모든 스님이 도법스님만 같다면야 시방세계가 불국토일 거에요.
도 법 하하하. 무슨 말씀을.
원 주 전 밤마다 스님만을 생각한답니다. 난 언제나 저런 스님이 될꼬. 말없고 조용하고 그 가운데 움직이시고.
도 법 겉모양뿐이지요.
원 주 저렇게 겸손하시지. 같은 선방 수좌라도 우리 주지스님은 아직 멀었어요. 제 나이 서른셋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지가 선방 수좌입네 하고 시시때때 가리지 않고 욕하는 걸 보면 그게 중인지 욕발이 아나운선지 분간할 수가 없대두요.
그때 탄성스님이 등장한다. 헝겊가방을 어깨에 멘 것이 어디 나갈 차림이다. 도법과 원주는 탄성의 등장을 아직 모른다.
도 법 왜요, 탄성당이야 진국이지요.
원 주 아유 말도 마세요. 주지스님이 진국이면 진국들은 맨날, 개자식 미친놈 꼴갑떨고 옘병하네. 소리가 끊이질 않으라고요.
탄 성 (큰소리로) 개자식 미친놈 꼴값떨고 옘병하네.
원 주 (그제서야) 으악! (도망친다. 잠시후 문을 빠끔히 열고) 주지스님 죄송해요. 호호호호.
탄 성 호호호호 맨날 죄송 죄송. 언제나 칭송 칭송 할꼬.
원 주 흥!
탄 성 또 저쪽에 앉아 스님, 전 밤마다 스님만을 생각한답니다. 이랬었누?
원 주 흥! 쳇! 핏! (문을 꽝 하고 닫는다)
탄 성 (탁자에 헝겊가방을 내려놓으며) 불상은 잘 돼가나?
도 법 그럭저럭.
탄 성 오늘 예불 마치고 나오다가 내가 방장스님께 이랬지. 스님. 되벱(道法)이는 예불에 맨날 빠지니 곤장이라도 몇대 갈겨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스님 말씀마따나 예불에 안 들어오는놈이 어디 중이랍디까?이랬더니 그 골수중 한다는 소리가 그 자체가 원력(願力)이요 기도인데 예불은 무슨 예불인고. 후후후 그 자체가 뭔지 아나? …… 방장스님도 돌았지. 자네 같은 땡초에게 이런 대불사를 맡기다니. (구조물을 유심히 본다) 되어가는 대로 되어지는 게 아름다움이라고 했던가? 아름답군. 훌륭해. 그렇다고 명작이란 뜻은 아니야. 자네 솜씨치곤 괜찮다 이거지.
도 법 어쩐 일인가?
탄 성 죽었나 해서 들러봤지.
도 법 들러보이?
탄 성 쉽게 죽을 것 같진 않구만. 언제쯤이면 끝나겠는가?
도 법 글쎄.
탄 성 삼년 가지고도 부족했던가?
도 법 짧은 시간일 수도 있지.
탄 성 자넬 보고 있노라면 석가탑을 만들었다는 어느 석공 얘기가 떠올라.
도 법 그래?
탄 성 좋은 뜻으로 얘기한 게 아냐. 그만큼 어리석다 이 말일세. 소탐대실(小貪大失). 사실 난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돼먹지 않은 것에 집착하려 들고 그로 인해 심신이 병들어가고 있어. 한마디로 꼴불견일세. 속세에서 못 이룬 꿈을 꼭 이런 식으로 풀어가야 하나? 불제자의 수도는 그래선 안 돼. 속세와의 단절 속에서 깨우쳐야만 되는 거라고. 수도승이 옛 그림을 찢어버리고 말간 백지 위에 새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면 자넨 속세에서 그리다만 그림을 그대로 가져와 그 위에 덧칠하고 있다고나 할까.
도 법 자네 마음에 쏙 드는 게 어디 있던가.
탄 성 없는 것을 자네가 보여주면 얼마나 좋겠어.
도 법 그러니까 무지혜자 아닌가, 당해봐야 깨닫게 되는.
탄 성 (구조물을 보며 혼잣말로) 화가와 수도승이라…… 자넨 어느 쪽인가?
도 법 기대승과 율곡의 편이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일세.
탄 성 두마리를 쫓다가 둘 다 놓치고 말 걸?
도 법 결국 난 한마리를 쫓고 있는 셈이지.
탄 성 그럴까?
도 법 그럼.
탄 성 (의미있는 미소를 지어보인 다음) 쉬었다 해. 잘 안될 땐 푹 쉬는게 최고야. 환경을 바꿔 보든지. (도법을 살피며) 망중유한(忙中有閑)이란 말이 있지. 짬을 내어 북성암이라도 댕겨오지 그래. 거긴 아직도 입에 맞는 홍시가 남아 있을 걸.
도 법 (의자를 권하며) 좀 앉게.
탄 성 아니, 곧 가야 돼.
도 법 어딜?
탄 성 (앉으며) 한 많은 사람이 또 이 세상을 하직했다네.
도 법 시달림 가려고?
탄 성 응.
도 법 그렇게 시달림 갈 스님이 없던가?
탄 성 이 밤중에 누가 썩 좋은 일이라고 나서겠나. 주지 밥상 잘 차려먹었으니 그런 데나 다녀야지.
도 법 …….
탄 성 시체를 보면 달포쯤 정신도 차릴 테고.
도 법 …….
탄 성 (침체된 분위기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낀 뒤 활달하게 일어서며) 난 본디 불상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이야. 법당에 있는 불상이라는 거이 한결같이 원만상이거든. 여유있고 품위있고 자비롭고 부족함이 없지. 그건 석가모니 본연의 모습이 아닐 거야. (구조물을 가리키며) 이것은…….
도 법 말해보게.
탄 성 정신차려.
도 법 잘 봤네.
탄 성 하나를 소유함은 더 큰 하나를 잃는 법이지.
도 법 자네도 잘 보라고.
탄 성 자꾸 비워내야 할 텐데 자꾸 채워넣고 있어.
도 법 그럴까?
탄 성 (가방을 메며) 가야겠네.
도 법 혼자 가려고?
탄 성 너무 늦으면 귀신이 심심해 하거든.
도 법 장사집이 어딘데?
탄 성 원포리 지물포집.
도 법 길조심하게.
탄 성 빙판길엔 이력났어. (나가려 한다)
도 법 어이 탄성당.
탄 성 (멈춘 채로)
도 법 같이 가세.
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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