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장
초상집.
어둠 속에서 금강경 독송소리.
용명(溶明)되면 우측 상수 병풍 앞에 흰 천으로 덮인 시신(屍身)이 있다.
도법과 탄성이 그 앞에 앉아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시달림-사람이 죽었을 때 불교에서 하는 의식-을 하고 있다.
향로에 가득찬 향불.
겨울 바람소리 세차다.
탄 성 쉬었다 하세. (무릎을 두어번 두드린 다음 몸을 풀기 위해 일어나서 步禪을 한다) 자네도 좀 걸어. 앞으로 너덧시간쯤 더 두드려줘야 될 테니까.
도 법 괜찮아.
탄 성 바람소리가 으시시한 게 다시 추워지려나 보군.
도 법 글쎄.
탄 성 힘들지?
도 법 오래간만에 하는 거라.
탄 성 그럴 거야. 난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복수(腹水)증세야. 전생에 많이 처먹은 업보지.
도 법 장사집이 너무 조용하지 않나?
탄 성 다들 곯아떨어졌겠지.
도 법 곡(哭)소리도 안 나는군.
탄 성 차라리 울지 않는 게 낫지……. 안색이 안 좋구먼?
도 법 아닐세. 냄새가 좀 고약하군.
탄 성 조금 있음 괜찮을 걸세. 길들이기 나름이지. 한번은 고속버스에 치인 사람을 시달림하러 갔었는데 어찌나 냄새가 고약하던지. 칠월 뙤약볕이었나봐. 장삼에 가사까지 걸치고 대로변에서 목탁을 두드리는데 빡빡머리가 왜 그리 야속하겠나. 그런 데선 삿갓이라도 쓰고 하라면 좋겠대.
도 법 (마음에 없는 미소)
탄 성 도법당.
도 법 (건성으로) 응?
탄 성 김명석.
도 법 왜?
탄 성 뭘 그리 생각하나?
도 법 생각은 무슨.
탄 성 내가 맞춰볼까?
도 법 뭘?
탄 성 저 시체에 대해 생각했겠지. 왜 죽은 걸까. 죽어야 될 큰 이유라도 있는가? 어떤 기막힌 사연일까? 이 시체에서 불상에 필요한 무엇인가가 숨어 있진 않을까……. 난 안 그래. 저 사람은 죽을 때가 돼서 죽은 거야. 그뿐이야. 여보게 도법당. 자네와 내가 무엇이 다른 줄 아나?
도 법 갑자기 무슨 소린가?
탄 성 모든 일을 자넨 어렵게 풀고 난 쉽게 풀어. 불상만 해도 그래. 자넨 불상이라 하면 부처님의 미소나 자비로운 눈에 있다고 생각하지. 그래서 오직 눈과 미소만을 생각하지. 난 그렇지 않아. 쉽게 생각해보자고. 눈 속에 무슨놈의 부처가 숨어 있겠나. 미소 속에 무슨놈의 부처의 법열이 살아 숨쉬고 있겠어. 예술가들은 그런 조그만 데서 어떤 신비를 찾는지 몰라도 그게 아냐. 부처란 몸 전체에 있다고 생각해. 목도 갸우뚱하고 입도 찌그러진, 척 봐서 느낌이 오는 쉬운 부처! 쉽게 생각하라고. 단순은 복잡 위에 있어.
도 법 (일서서며) 이 사람 어쩌다 죽었다던가?
탄 성 드디어 관심이 발동했군. 자살했어.
도 법 자살?
탄 성 그것도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 질러서.
도 법 소신공양(燒身供養)처럼?
탄 성 응.
도 법 무슨 일로?
탄 성 뭐 그렇고 그런 이유겠지. 주간지 삼류기사처럼.
도 법 …….
탄 성 관심 갖지 마.
도 법 …….
탄 성 생각하지 말라구.
도 법 …….
탄 성 시달림은 시달림으로 끝내야 돼.
도 법 …….
탄 성 냄새 참 지독하군.
도 법 안 되겠어. 향을 더 꽂아야지.
탄 성 한통 다 태웠어.
도 법 더 없나?
탄 성 응, 장작이라도 안 땠으면 좋겠구만.
도 법 원래 시체 있는 방엔 불을 안 때잖아?
탄 성 우리가 추울까봐 때나부지.
도 법 이상한 것 천지야.
탄 성 생각하지 말래두.
도 법 아니야.
탄 성 뭐가?
도 법 입산한 지 얼마 안 돼 첫 시달림 갔을 때 얘긴데,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고생고생하다가 죽은 사람이 있어. 입관할 때 시신을 봤는데 반은 이미 썩었고 반은 괜찮아. 상상할 수 있겠나? 반은 괜찮고 나머지 반만 썩었다 이말이야.
탄 성 허허. 이 사람 왜 이래?
도 법 그 후 달포쯤 지났을 때야. 큰 법당에서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는데 누가 앗 뜨거.하면서 지나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반쪽짜리 그 사람이야.
탄 성 (경고하듯) 도법당!
도 법 현실이었을까 환상이었을까?
탄 성 자네, 이번에도 그걸 확인해보려고 따라 나섰나?
도 법 그 후론 내가 그 반쪽짜리가 되어 관 속에 누워 있는 거야. (탄성, 시체 앞에 가서 앉는다. 염불해줄 채비) 살아 있는 내가 죽어 있는 나를 들여다보고 히죽히죽 웃고 있다니까. 전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뚜렷했고 몇만리를 걸어도 그 경계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아득하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그 경계가 없어. 눈만 감아도 넘나드는 거야.
탄성, 목탁을 탁탁 두드려서 오라는 표시를 한다.
바람소리 쌩쌩.
도법, 탄성 옆에 와서 앉는다.
탄 성 금강경이나 두어수 더 때려주지.
도 법 이번엔 내가 요령을 잡을까?
탄 성 마음대로 해. 우리가 염불해 준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그게 다 지 업(業)인데. 땡초가 땡초 제도하는 격이지. (목탁을 두드리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일어서면서) 아궁이에 찬물이라도 끼얹고 와야지. (밖으로 나간다)
도 법 (요령을 흔들며 경을 외우려다가 탄성이 나간 쪽을 향해) 탄성당. 탄성당. 냉수 좀 떠 오게. (대답소리가 없자) 탄성당. 탄성당.
이상한 듯 오른쪽으로 시선을 가져오는데 흰 천으로 덮인 시신, 상체를 일으키고 있다.
도 법 으악!
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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