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장
서전(西殿).
도법은 중앙 의자에 앉아 있고 탄성은 사진 한장을 손에 꼭 쥔 채 그 주위를 서성인다.
서로 감정을 자제하고 있다.
탄 성 이게 무슨 망신인가. 자넬 업고 초상집에서 나오는 데 낯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어. 월명이 그 코흘리개를 데리고 다녀봐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도 법 …….
탄 성 그리고 제발이지 (헤라를 집어보이며) 이 짓거린 그만둬. 자넨 할미새야. 부러진 날개로 독수리까지 업을 수야 없잖은가.
도 법 모래로 밥을 짓긴 마찬가질세.
탄 성 자넨 불상 하난 만들지 몰라도 불도(佛道)는 망각해버렸어.
도 법 그만해.
탄 성 허허, 이 사람 왜 이리 고집이 심하지?
도 법 또 억지를 부리니까 그래.
탄 성 그렇다면 자네 주머니에 있던 이 마누라 사진은 무엇을 뜻하는 겐가?
도 법 그게 어쨌다는 것이야?
탄 성 이게 다 세속적인 것에서 오는 탐욕, 분노, 우둔 때문이 아니겠나?
도 법 넘겨짚지 말어.
탄 성 찔렸으면 아프다고 해.
도 법 왜 자꾸 쓸데없는 것을 들먹거리는 거야. 내가 아닌 말로 암내 맡은 수캐마냥 날뛰기라도 했다는 소린가?
탄 성 그렇다면 오십이 다 된 지금에 와서 불상을 만들겠다느니 탱화를 그리겠다느니, 왜 엄한 짓거리 하고 댕겨.
도 법 그게 이거 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탄 성 (버럭 소릴 높여) 왜 상관이 없어. 절밥 먹고 있는 중이 자꾸 딴 짓거리에 한눈 파니까 그렇지. (헤라를 치켜들며) 이런 놀음하려면 절엔 뭣하러 왔어. 차라리 속가에 나가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시지.
도 법 불사(佛事)를 놀음이라고 생각하나?
탄 성 그럼 이게 신선놀음이 아니고 뭐야.
도 법 뭘 모를 땐 가만이 있는 게야.
탄 성 가만히 있게 됐어?
도 법 가만히 안 있음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탄 성 이 짓을 그만두든지 속퇴를 하든지 무슨 구정을 내야지.
도 법 누누히 말했잖아. 속인(俗人)이 되든 도인(道人)이 되든, 깨우치든 망가지든 마지막 원력(願力)으로 삼아 결판을 내고 싶다고.
탄 성 그 원력이 허깨비로 나타났던가?
도 법 시체가 일어섰단 말이야. 불에 타 죽었다던 그놈이 벌떡 일어섰다구.
탄 성 바퀴가 상하면 구르지 못하고 노인이 되면 수행을 못해. 쉰이면 적은 나이가 아니야.
도 법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탄 성 (냉정을 되찾아 낮은 목소리로) 그래. 자네 말마따나 시체가 다시 살아났다고 치세. 그게 뭐가 무섭나. 아닌말로 자넬 죽이려고 대들었다 한들 무어 그리 대수겠어.
도 법 자네… 연비를 어떻게 생각하나?
탄 성 연비라니…… 갑자기 연비는 왜?
도 법 살다보면 급류에 휘말리게도 되고 짧은 시간 내에 큰 결론을 내리고 싶을 때가 있지. 그럴 때 택하는 것이 연비일 게야. 타오르는 촛불에 다섯 손가락을 밤새 태우면서, 피범벅 땀범벅이 되어, 후회하며 발악하며 외쳐대는 그러면서도 뭔가 정리하고 결심하고 참회하고 용서받는 그런 응집된 시간.
탄 성 그 연비가 자네에겐 불상조각이었다?
도 법 그래.
탄 성 불상 만들려다 또 그 시체 보려고?
도 법 시체가 나타난다면 그것조차 불상에 집어넣어야지.
탄 성 당당하군. 그렇지만 지금도 불안에 떨고 있어.
도 법 마지막 원력이라고 덮어두게나.
탄 성 원력일 것도 없어. 언제 어디서 또 다른 시체가 불쑥 나타날지 몰라 벌벌 떨면서 무슨놈의 고상한 미사여군가.
도 법 그만두세.
탄 성 왜 듣기 싫은가?
도 법 계속 반복 반복 반복이야.
탄 성 (빈정대듯) 시체를 피해서 불상제작에 몰두해? 불상이나 시체나 다 똑같은 집착이야. 그것도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도 법 …….
탄 성 (나직하게) 집착은 끝이 없어. 하나의 집착은 또 다른 집착을 불러일으키거든.
도 법 …….
탄 성 자네 오대산 토굴에서 삼년 결사날 때 생각나나? 그땐 이렇게 집착이 심하지 않았어. 너무 집착하지 말게. 미색(美色)이란 한낱 허깨비에 불과해. 선방에 가버려. 허리춤에 붙은 뱀 집어던지듯 휙 던져버리라고. (헝겊가방을 어깨에 멘다) 큰소리 쳐서 미안하네.
탄성, 퇴장한다.
멍한 시선의 도법.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거닌다.
그때
화상을 입은 망령이 나타난다.
목만 하얗고 나머진 피투성이인 괴기의 모습.
망령, 도법의 뒤에 서서 도법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다.
망령의 움직임은 흉한 몰골과는 달리 천진난만한 원숭이를 연상케 한다.
어투도 그렇고.
이상한 예감을 느낀 도법, 뒤를 돌아본다.
순간 기겁하여 뒤로 넘어진다.
망 령 허허. 이 사람 남의 삭신이라도 뜯어먹어야지 안 되겠구만. 젊은 사람이 왜 이리 겁이 많어? 한번 본 적이 있잖어. 이제야 알아보는 모양이군. 겁먹은 얼굴 하지 말어. 겉모양만 가지고 무서워하면 어떡해.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껍데기가 좀 끄슬려서 그렇지 알맹인 말짱해. 자, 잘 봐, 괜찮지?
도 법 (외면한다)
망 령 안 되겠군. (두어발짝 물러나서 歌舞한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어때 이젠 마음이 놓이지? 도법당, 우리 수인사나 하고 지내세. 난 김명석이야. 공교롭게도 자네하고 이름이 똑같애. 흔히들 김맹석이라고도 부르지. 그게 부르기 편한가봐. (다가서면 도법이 멀리한다) 하하하하. 아직도 경계하는군. 하지만 다 알아. 자네 고향이 충남 보령군 대천읍 국말리 나무장터. 1男 4女 중 막내. 네 계집 끝에 고추였으니 자네 아버지 김팔만이가 얼마나 좋아했겠나. 맹석이 안 그래? 자, 이제 일어나.
도 법 도대체 당신은 뉘시요?
망 령 나? 김명석. 김맹석이라고도 부른다니까. 아! 이제야 입을 떼었군. 글쎄 그래야 된다니까. (다가간다)
도 법 (뒷걸음질친다)
망 령 그래. (뒤로 물러나며) 뭐 이 정도 떨어져서 얘기하지. (주위를 훑어보며) 땡초 노릇 하느라 고생이 많구만. (코를 막으면서) 어휴. 홀애비 냄새. 가끔 향수라도 뿌리게나. (탁자에서 헤라를 집으면서) 날이 번뜩이는군. 조심하게. 눈이라도 콱 찔리는 날엔 볼장 다 보겠어. 그런데 이걸로 뭘 조각하지? (주위를 살피다가) 저거군. 저것이 문제의 그 불상이렷다. (구조물을 본다) 일리는 있어. 탄성당은 ꡒ이것은 개지랄이다ꡓ 자네는 ꡒ이것도 수행이다ꡓ. 탄성당은 요만할 때부터 중 노릇 했기 때문에 자네 같은 신식중하고는 달라. 예술에 대해선 도무지 깜깜이라고. 나도 그래. 그래도 탄성이보다는 조금 낫지. (유심히 본다) 근사하군. (그러다가 갑자기 뒤로 물러난다) 안 되겠어. (망치를 든다)
도 법 (달려가 붙들며) 왜 그래요?
망 령 헤헤헤.
도 법 (망치를 뺏는다)
망 령 그래 자네가 만든 것이니 자네가 부수게.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 난 부처 상판만 보면 울화통이 터져. 자네들이 쥐를 보면 징그럽듯이 난 부처만 보면 속이 뒤집힌다니까. (불상에 침을 탁 뱉으면서) 에이 더러운 자식. 아무리 할 짓이 없기로서니 여기까지 와서 날 괴롭힐 게 뭐야. 헤헤헤, 오늘은 그만 가겠네. 오래 놀다 가려 했는데 저게 있어서 기분이 잡쳤어. 다음에 또 (도법을 툭 치면서) 보세.
망령, 손을 흔들며 퇴장.
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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