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1장

monomomo 2006. 12. 6. 07:36
 

劇團 천지인 2006 정기공연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작  이 만 희

연출  강 영 걸














劇團 천지인





        나오는 사람들    


                도  법

                탄  성

                방  장

                원  주

                월  명

                망  령

                여  인(女人)




1  장


        늙은 모습의 탄성스님이 의자에 앉아 있다.

        한정된 톱라이트.

        잠시 뒤 희미한 조명이 허공을 비추면 천정에서 도법스님이 탄 그네가 스르륵 내려와 바닥과 천정의 중간쯤에 놓이게 된다.

        사자(死者)의 모습인 도법스님.

        눈두덩이엔 피가 흥건하다.

        탁자에는 조각에 필요한 소도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두개의 찻잔이 놓여 있다.

        탄성, 조각칼(헤라)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따금씩 도법을 힐끔 쳐다본다.

        다시 침묵이 계속된다.

        그들 뒤에는 흉칙하고 일그러진 불상이 있다.

탄  성  (쉰 목소리로) 왔나? 어떤가?

도  법  그냥 그래.

탄  성  내려와서 차 한잔 하지 그래. 이승의 물맛이 그립지 않나?

도  법  아니 됐네.

탄  성  나이를 먹으니까 참선하다가도 졸고 횡보하다가도 졸고 그래.

도  법  기력이 쇠잔해서일 거야.

탄  성  그럴 짬도 없는데 그러니까 문제지. 늙으면 그저 죽어야 되나부이. 나도 자네 곁으로나 갈까?

도  법  아직 일러.

탄  성  후후후. 도통하지 못했으니 더 정진하라는 얘기 같군. 아암. 그래야지. 그렇고 말고. 돌대가리니 속세에 더 머무를 수밖에. (사이) 항상 자넨 나보다 앞서 갔지. 해인사 선방에서도 그랬고 오대산 토굴에서도 그랬고 이 봉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어. 자네가 춘향이었다면 난 춘향이 시봉하는 년이었다고나 할까. 자네 생시(生時)엔 이 몸이 시샘도 많았다고.족히 이십년은 늦은 늦깎이 후배가 경공부나 참선에서 자꾸 앞서가니 괴롭지 않았겠나?

도  법  허허. 처음 듣는 얘기군.

탄  성  생사(生死)를 마빡에 써 붙이고 참선하는 중이 그런 하찮은 것에 신경이 끊이질 않았으니 내 자신 얼마나 미웠겠나.

도  법  난 늘 자네가 앞서 간다고 생각했었네.

탄  성  하하하. 자네가 미술대학 선생자릴 내던지고 서른 몇살인가에 갓 입산했을 때도 난 자넬 업수이 여기질 못했어. 다른 행자들과는 달리 범상치 않았거든. 그만큼 자네가 커버린 채로 들어왔다고나 할까. 하하하.

        (주전자 있는 데로 가서 물을 따라 한모금 마신다. 창 밖에 눈을 두다가) 어두워졌군. (의자에 도로 앉으며) 이런 어둠이 찾아올 때면 번뇌망상이 꼬리에 꼬리를물어. 예컨대 진리란 무엇일까? 진리란 진리라고만 불려질 뿐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까? 또 있다면 그 반대의 것도 진리가 아닐까? 하하하. 어렸을 때 생각들이 다 늙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내려오라는 손짓)

도  법  (그네가 바닥에 닿을 듯 내려온다. 그네에서 내려 탄성에게 다가간다) 오늘따라 말이 많군.

탄  성 그렇지? 오늘은 특별한 날이거든……. 나도 자네처럼 이런저런 상념들을 저 어둠에게 맡겨두고 어디론가 가게 되겠지. 이젠 별 것 아닌 선행으로 죽음의 위안을 삼던 나이도 지났어. 명예나 금전에 빠져 죽음 자체를 잊어본 적도 없는 반쪽 수행자이기도 하고. 그저 먹물 옷을 입다보니 폭행이나 강도 강간 같은 큰 죄만은 면할 수 있었다는 자족이 있을 뿐일세.

도  법  아니야. 인간은 본래 완성자일세. 완성자임을 모르는 데서 무지가 싹트지.

탄  성  (손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저것이 태양이다 했을 때 무엇이 있던가. 태양은 없고 가리킨 내 손만 허공에 있지 않은가. 내가 그 꼴일세.

도  법  자네가 허공을 잡았다고 했을 때 허공이란 다만 이름만 있을 뿐 모양이 없으니 잡을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 이와 같이 자네의 마음 밖에서 그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탄  성  어둠 속에서는 나무는 있어도 그림자는 없다 이 말인가?

도  법  스스로 말함이 없어야 저절로 입에서 연꽃이 필 것일세.

탄  성  그러니까 자넨 나무요 난 그림자다?

도  법  (엷은 미소)

탄  성  으시대지 말어. (만지작거리던 헤라로 두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며 빈정대듯) 이랬었나? 다시 한번 해보지 그래. 자넨 숱한 의문을 남긴 채, 하룻밤 뚝딱 희한한 부처를 하나 만들어놓고는 두눈을 찌르고 서전교 교각에서 몸을 던져 죽고 말았어. 그게 도대체 지금 나한테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겠지… 바위틈에 끼어 있던 자네의 시신을 들어내며, 그리고 피로 물들었던 자네의 작업실 이 서전을 치우면서, 언젠가는 자네의 죽음도 정리되어야 한다고 마음먹었지.

도  법  탄성당. 무상참회(無常懺悔)일세. 난 당시 지나간 허물은 뉘우칠 줄 알면서도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몰랐어.

탄  성  그 참회하는 마음으로 두눈을 후벼파고 용감하게 자폭했다는 얘기 같군.

도  법  (미소만 지을 뿐)

탄  성  어떤 똘중들은 이런 말을 하대. 파계는 개안(開眼)이라고. (힘을 주며) 팔정도(八正道) 중 으뜸은 아직도 정견(正見)이라! 바르게 보아야지. 부처의 면상이 보잘 것 없다고 해서 눈알을 찌르고 구도(求道)를 쫑(終)낸다는 것은 어쩐지 청정비구로서 떳떳치 못한 행동 같지 않던가?

도  법  그렇게 묻는 자네의 마음이 바로 내 마음일세.

탄  성  그렇다면 자네 세상은 아직도 암흑인가?

도  법  때론 광명도 있지.

탄  성  그래 그것을 보아야지.

도  법  자네도 잘 보라구.

탄  성  뭘?

도  법  자네 마음 속에도 있으니까.

탄  성  후후후. 나이가 듦에 인생살이가 허망터니 요즈음 들은 얘기 중 가장 그럴 듯하군.

도  법  가장 흔한 얘기지.

탄  성  그래 맞아. 흔한 얘기지. 그 흔하고 흔해 빠진 얘기 속에 뭔가 답이 있을 텐데 까먹고 잊어먹고, 잊어먹고 까먹고 늘 그 모양일세. 이건 우문(愚問)이네마는…… 왜 죽었나?

도  법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옛 부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그 제자인 가섭이 전할손고.

탄  성  (무릎을 치며) 옳고 옳고.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어리석은 질문이었어. 나도 이젠 이런 짓거리에 신물이 나. 말도 안 되는 것을 말로 묻고 말로 대답하고. 허지만 궁금했거든? 자네 평생 화두(話頭)만 해도 그래. ꡒ어떤 사람이 잠자다 일어나 거울을 들여다보니 얼굴이 없어졌다. 왜 없어진 것일까? 얼굴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때마다 난 이렇게 결론을 내렸지. 거울을 뒤집어 뒷면으로 본 거라고. 단순한 생각이었어. 난 항상 단순한 것을 좋아했으니까. 그러나 화두란 듣고 배우고 끝없이 의심하는  거라고 하던가? 의심에 의심이 끊이질 않더군.

도  법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완성자라네.

탄  성  그럼 자네는 완성자로 죽은 건가?

도  법  아닐세.

탄  성  그럼 역시 사기꾼으로 죽은 게구먼.

도  법  그럴지도 모르지.

탄  성  그래. 그게 무방할 거야. 난 자네의 기이한 죽음을, 완벽한 불상을 만들 수 없다는 한계성으로 마감했었지. 그게 가장 쉽고도 고상한 결론이었으니까. 그런데 해가 바뀔수록 엉망진창이 돼버렸어. 이봐 도법당.

도  법  ?

탄  성  (흉칙한 불상을 가리키며) 어디서 저런 엉터리 발상을 하게 됐나?

도  법  후후후.

탄  성  내가 말한 쉬운 부처였나, 아니면 자네가 말하던 망령이었나?

도  법  내 불안의 그림자였지.

탄  성  그 불안의 그림자가 바로 망령으로 나타났다?

도  법  그렇지.

탄  성  하면 망령이란 자네의 고통만을 긁어모은 분신일 수도 있고?

도  법  (고개를 끄덕인다)

탄  성  그랬었군. 저 불상은 너무나도 참혹해서 보는 이를 당혹케해. 그러나 이윽고는 그 고통에 동참케 하거든. 불안감이나 작은 욕망 따위를 물러가게 하고 애잔한 긍휼심을 불러일으키지. 모르긴 해도 고통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한 자비 능력을 갖고 있어. 기이한 일이야. 이떻게 해서 저런 작업이 하룻밤새에 일어나게 되었는지.

도  법  난 꿈을 꿨어. 고달팠던 이 生에서 마지막 악몽을 꾼 거야.

탄  성  꿈 속의 일들이 모두 현실로 나타났으니 그게 문제지.

도  법  악몽이 너무 커서 현실을 눌러버렸다고 생각하게나.

탄  성  난 지금 망설이고 있어. 내가 죽기 전에 저 망칙한 불상을 어떻게 할까 하고 말이야. 여기에 모셔놓고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깝고 큰 법당 부처님으로 모시기엔 경망되고 잔혹스러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나?

도  법  자네도 악몽에 시달리나보군.

탄  성  대답해보게.

도  법  휙 하고 한 선(線)을 그어버려.

탄  성  어떻게?

도  법  …….

탄  성  내 임의대로?

도  법  물론이지.

탄  성  또 나에게 미루는구먼.

도  법  자네의 의지처는 항시 자네 자신뿐이니까.

탄  성  도법당.

도  법  응?

탄  성  이 서전(西殿)을 정리하려고 해. 어찌됐건 더 늙기 전에 뭔가 답을 구해야 할 테니까.

도  법  (서서히 일어나 그네에 앉는다. 허공으로 서서히 오르는 그네)

탄  성  마침 새로 온 교무스님이 경(經) 공부할 처소를 달라기에 이곳을 말했지. 도배를 다시 하고 청소를 깨끗이 하면 자네의 체취도 자연 없어질 거야. 사실 여기사 공부하기엔 금상첨화(錦上添花)지. 눈앞 계곡엔 모악수(母岳水)가 흐르고 서전 교각과 주위의 은행나무 겹진달래는 아름답다 못해 무릉도원 같질 않던가. 이제야 실토하네만 이 서전을 지금껏 이대로 놔둔 것도 순전히 이 땡초의 욕심이었다고. 아마 지대방에선 대중스님들의 험구가 대단했을 걸. 도법스님의 혼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이야. 헌데 아쉬운 점도 있어. 이따금 무료해질 때면 자네 영혼을 여기에 불러내서 혼자 횡설수설하는 것이 일과처럼 됐었는데. 아무튼 이젠 자네의 죽음을 내 머리에서 말끔히 씻어내야 할 때가 왔어. 어떻게 정리해야 되지?

        자네의 인생과 죽음과 악몽을…….



­암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