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정월 대보름의 달과 달집 태우기-곡성에서.
카메라 한 대를 한 곳에 고정해서 설치를 하고 매일매일 지나는 사람들을 옅보는 스모크라는 영화에서 담배 연기의 무게를 알아보는 장면이 나온다.
담배를 피기 전의 무게에서 다 피고 난 담뱃재의 무게를 뺀 무게가 담배연기의 무게라고.
갑자기 왜 담배 연기의 무게가 떠 올랐을까?
내 삶의 무게를-엄밀히 따지면 무거운 삶을 살아 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담배 연기에 날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어쨌든, 그렇담 담배 연기의 무게는 어마무시하게 무거울 법도 한데.
모르겠다.
좋다, 안 좋다, 이 두가지 밖에 모르는 나지만
담배가 인체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마무시하게 열심히 피워대는 거 보면
이분법적인, 호 불호를 떠나
또 다른, 분명한
하여간 무엇인가가 있다는
아이고 모르겠다.
왜 문장이 안 끝나지?
어쨌든 담배가 좋다는 이야기다.
어디에 어떻게 나쁘게 영향을 미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배변에도 좋고 또 심정적인 안정감을 주고 뭐 그런 등등.
저걸 왜 썼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지맘대로 횡설수설 하는 곳이라지만,,,
시장엘 갔다.
그냥 갔다.
사고 싶은 것도 없었고 살 것도 없었다.
걷다보니 시장이었다.
어디선가 꽹과리 소리가 났다.
가까이 가봤더니 정월 대보름 행사를 하고 있었다.
시장통 사람들이 어디 학교 농악 반을 불러다 하는 행사 같았다.
작년, 정월 대보름이 생각난다.
기도하고 기도라고 기도하던 시간이었다.
녹음기를 가지고 왔었어야 하는데,
사진기를 가지고 왔었어야 하는데,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면서 한참을 주변에서 머물러 있었다.
우리 가락이 주는 흥겨움에 나이가 지긋이 든 분들은 어깨을 들썩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골 깊게 폐인 주름에 쓰인 한에 비교가 안될 만큼의 흥겨움을 가슴에 담고 움직이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행복했다.
그랑블루라는 영화를 보면서
끝이 없어 보이는 어둡고 침침한 수면 밑으로
수직으로 하강하는 한 남자의 넘치는 상처를 보면서 위안이 되었던 것은
끝 닿는 지점에 이르면 다시 차고 오를 수 있는 여분의 힘을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그것이 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무력해진 삶이 부력에 의해 다시 수표면 위로 떠 오를 수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제 각각 안고 사는 검은 상처의 휘장이 걷히는 봄이 되기를 갈망한다.
뻔히 알면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조카가 내일은 교회를 같이 가자며 데리러 온단다.
신이 이 봄엔 모든이들에게 좀더 공평한 사랑을 나눠주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고 올 계획이다.
그래, 정책 중엔 햇볕 정책이 최고야.
나도 오늘부터 고목나무 하나 심어 놓고 날마다 물을 줘 봐야겠다.
싹이 나든 나지 않든 정성을 다하여,,,
시장에서 들은 꽹과리 장단의 곡 올린다.
제목이랑 아무상관없는 글이군.
역시 난 제목을 정하는 덴 능력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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